소란스런 영화제 인근의 부산에 대한 기억도 처음엔 설렘이었고 어느 때는 편안함이었고 어느 때는 불편한 지리함이었다. 처음 이 영화제에 왔을 때는 영화와 도시와 가을의 기운에 어쩔 줄을 모르다 미포에서, 미나미에서, 청사포에서, 남포동에서 술에 취하고, 해운대 좁은 길에서 내가 좋아하던 배우와 감독들과 스쳐지나가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감자탕집에서 감자탕을 먹는 장첸을 보고 어느 길가 일식주점에서 얼결에 평소에 흠모하던 이명세 감독님을 만나 조그만 정종 잔을 기울였던 일도 잊지 못할 기억들이다.
다소 어덜트했던 기억도 난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잘 곳이 없어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해운대 백사장에서 자거나, 여행객으로 가득한 정신없는 찜질방에서 자기도 했다. 한번은 남자들만 자는 찜질방에서 잠을 잔적이 있었는데, 득실거리는 누에집에서 잠을 청하는 기분이었다. 모르는 외간 남자들끼리 다닥다닥 살갗을 부딪치며 자는 느낌이 꽤 답답했지만 그래도 어디서도 잘 자는 성격인지라 숙면을 하기는 했다. 문제는 아침인데 잠을 깨고 눈을 뜨니 눈 앞 30센티미터 즈음에 알몸으로 주무시는 외간 아저씨의 '해삼멍게말미잘'이 보였다. 신선한 충격이었는데 영화제 하면 먼저 생각나는 추억 중 하나이다. 불행하게도.
매해 똑같이 술렁이는 남포동과 해운대에서 그러한 영화제를 즐기는 것도 일이겠지만, 또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영화제에서 가장 큰 사건은 영화를 만났던 기억이다. 세상의 이곳저곳에서는 아직도 수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술렁이는 축제의 한켠에서 나는 그 영화들을 만났다. 빼곡히 영화스케줄을 그리고, 쉬지 않고 수많은 영화들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는 영화를 만나고, 가을 냄새 짙은 해운대의 밤을 걸으며 마음을 다스렸던 그 때가 가장 좋은 추억이다. 축제의 분위기에 취하는 것도 즐거운 자극일 때가 있지만 그때 봤던 영화만큼 나한테 오롯이 남는 기억은 없다. 영화제의 주인공은 언제나 영화다.
결국 좋은 영화를 많이 만나고 그 포만감에 젖었던 것만큼 의미 있는 기억은 없다. 부산에서 로맨스를 만나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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