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의 신작 <악마를 보았다>에서 작업한 주요 공간들.
이번 <악마를 보았다> 촬영 때 역시 내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생일도 현장에서 일하며 지나쳐야 했고, 부모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셨고, 남자친구에게 수없이 섭섭함을 안겨주었고, 친구들의 결혼식 사진에는 늘 나만 없다. 이런 생활의 반복 때문에 이것이 그렇게 바라고 꿈꿔왔던 미술감독이 되는 일이었나 회의에 빠진다. 현장이란 곳이 지긋지긋해지고, 나는 왜 남들과 다른 삶을 선택했으며,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등 매일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사무실과 현장을 반복하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렇게 길게만 느껴지던 5개월의 촬영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젠 정말 한없이 잠도 잘 수 있고 아름다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뿐이다.
드디어 ‘쫑’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정말 끝났다. 짜릿함과 시원함이 가득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섭섭함은 무엇일까. 정말 뒤도 안 돌아보게 시원할 줄 알았는데 만감이 교차하고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항상 영화를 시작할 때면 누릴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해 지치지만 끝나고 나면 현장의 생동감을 그리워하고 추억한다. 이러한 것들이 내가 영화를 하게 하는 이유이고 견딜 수 있는 힘인가 보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 현장인데 내게 <악마를 보았다>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지금 서 있는 영화현장이 나에게 주는 진정한 행복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다시 난 현장 속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