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북송사업의 일환으로 평양에 간 가족들을 홈비디오로 담은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2006)을 연출한 ‘중죄’로 재일교포 감독 양영희는 북한 입국이 금지됐다. 북한에 있는 사랑하는 오빠, 조카들과의 만남도 그렇게 중단됐다. 그로부터 3년 뒤, 양영희 감독은 <디어 평양>의 연장선이라 할 수도 있는 또 다른 이야기 <선화, 또 하나의 나>를 가지고 다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이제 영원히 입국이 금지될지도 모르죠.” 가볍게 건넨 한 마디에 그녀가 이 또 다른 한편의 영화를 내놓기 위해 감내해야 할 희생의 무게가 묵직하게 전달된다.
자본주의 문화와 북한 체제 함께 겪는 조카딸 선화의 삶
장장 10년,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일본과 오빠와 조카들이 살고 있는 평양을 오가며 홈비디오 카메라로 담아낸 아픈 상처들. 매스게임의 광기와 수령 동지에 대한 충성, 지구상 유일한 공산국가 평양을 그저 호기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여타 북한 소재 다큐멘터리와 달리, 양영희 감독이 조심스럽게 담아온 풍경은 평양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조총련 간부로 평생 신념을 지키며 살았던 아버지가 <디어 평양>의 관찰자였다면, <선화, 또 하나의 나>는 북한에서 나고 자란 자신의 조카딸 선화를 쫓는 여정이다. 양영희 감독은 이제 아버지를 향한 반목과 이해를 기술했던 전작의 관찰자적인 시점을 걷어내고, 일본에 살다 북한으로 건너간 아버지를 둔 ‘이민 2세’ 선화의 삶에 조심스레 개입한다.
선화는 양영희 감독이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가족을 ‘감히’ 카메라에 드러낼 수 있도록 결심하게 해준 가장 첫 번째 존재였다. “가족 면허가 허락되면서 북한에 간 뒤 10년간은 아무런 기록도 하지 않았다. 홈비디오를 북한에 가져간 건 선화가 태어나면서 그 아이를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의 할머니가 보내준 학용품, 옷가지를 쓰며 자유로운 꿈을 꾸지만, 정작 현실은 경직된 북한 체제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조카딸 선화. 양영희 감독은 그런 선화에게서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북한 교육을 받고 자란 자신의 성장기, 비틀즈를 동경하면서도 철저하게 조국 비방을 금지해야 했고, 조총련에 반하는 행동은 엄두도 내면 안 되는 반쪽 자유인으로 살아야 했던 자신의 과거를 발견했다. 그리고 평양 거리,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등교하던 선화를 응시하던 감독은 선화와 오버랩되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의 데자부를 경험한다. “선화를 보면서, 유독 나이차가 많아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주었던 오빠들. 어린 시절 그 오빠들과 영문도 모른 채 헤어지면서 내 속에 숨겨져 있던 트라우마를 깨닫게 됐다.”
반쪽 자유인 아픔 감수하더라도 평양의 맨얼굴 보여주고파
북한에 있는 가족에게 행여 해가 될까봐, 선화를 내세우는 대신 아버지를 대상으로 한 첫 작품으로 에둘러 진심을 말했던 감독. 그런 이유로 두 작품 모두 다큐멘터리의 일반적인 형식인 그 흔한 인터뷰조차 시도하지 않았던 양영희 감독이었다. “촬영을 하면서 선화가 신은 미키마우스 양말이 혹시라도 미제품을 쓴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문제가 될까 걱정이었다.” ‘냉정해지리라’ 다짐을 하면서도 복잡해지는 심경. 카메라를 들다가, 혹은 편집을 하다가 연출자로서의 시선이 울음으로 바뀌어 버리고 마는 건 어느 모로 보나 지극히 ‘잔인한 연출’이다. 그럼에도 양영희 감독은 아직도 ‘평양 사람도 웃어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그들도 결혼하고 이혼하고, 아이를 낳고 섹스도 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임을, 평양의 거리도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음을 아픈 방식으로나마 전달하고 싶은 다큐멘터리스트다.
선화를 따라가는 자신의 ‘감정사’를 통해 무거운 속내를 털어놓은 양영희 감독은 “이젠 가족사는 그만 이야기하려고 한다”며 그것과 상관없는 차기작에 대한 계획을 말한다. 하지만 벌써 일본에선 두 편의 다큐멘터리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를 엮은 에세이를 준비 중이다. 그리고 자신만이 알고 있는, 기록할 수 있는 이 특별한 경험과 이야기들을 극영화로도 연출하고 싶다는 소망을 비춰본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앞으로의 작업 속, 그녀의 또 다른 도전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