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많은 질문을 기대할게요.” 10월9일 마스터클래스 강연에 나선 조니 토 감독은 많은 준비를 해왔다. 자신의 영화인생사를 9개의 챕터로 나눴고, 1개 챕터의 강연이 끝날 때 마다 관객들의 질문을 받았다. 조니 토 감독이 한국의 팬과 영화학도들에게 전한 이야기를 정리했다.
내 영화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TVB방송국에서 일하던 시절이다. 공부가 싫어서 중학교를 중퇴한 나는 그곳에서 서신을 담당하는 등의 잡일을 했다. 방송국에 가서야 영화나 드라마에는 배우와 극본, 감독, 촬영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든 연출자가 되고 싶더라. 첫 시작은 연기자 훈련반이었다. 이곳에서 영화나 드라마의 제작과정을 배웠던 덕분에 졸업 후에는 조연출로 일할 수 있었다.
정식으로 TVB의 프로듀서가 된 건 1977년이다. 연기자 훈련반을 졸업한지 4년만의 일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이 일을 평생직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부족한 학력 때문에 더 많이 노력했다. 한 달 동안 마흔 시간도 채 못 잤던 때도 있었다. 몇 편의 드라마를 만들다 보니, 갈증이 생겼다. 연출자는 나지만, 시스템상 작품의 창의성에 관여할 수 없었다. 오로지 나는 촬영과 편집 기술을 다루는 사람이었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하고 싶었던 이유였다.
1978년 <벽수한산탈명금>이라는 무협영화로 영화감독 데뷔를 했다. 그때가 23살이었는데 경력이 부족한 탓에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와 많은 공부를 했고 이후 7년간 영화를 찍지 않았다. 지금 내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 정립된 건 <동방삼협>(1992)부터였다. 스타보다는 연기력이 좋은 배우와 작업하는 방식을 말하는 거다. <동방삼협> 당시 홍콩의 배우 개런티가 매우 높았다. 액션영화를 찍어야 하는데, 남자스타를 기용하기가 힘들더라. 남자 스타 한 명 캐스팅하는 비용이 양자경과 매염방, 장만옥을 모두 캐스팅하는 비용과 맞먹었다. 영웅이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었다.
그때 앞으로의 내 영화가 스타중심의 영화여야 할지, 나만의 스타일을 가진 영화여야 할지 고민했다. 결국 내 스타일을 고집하기로 하고 영화사 ‘밀키웨이 이미지’를 설립했다. 당시 우리의 기본이념은 ‘창조성’이었다. 배우 캐스팅도 스타가 아닌 극본과 영화의 주제에 따르려 했다. 황추생, 고천락, 유청운, 임달화 등 주로 작업하는 배우들이 구성된 게 그 때문이다. 나는 이들이 홍콩에서 가장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캐스팅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렇다는 거다.(웃음)
나는 미완성 시나리오로 영화를 찍거나 3년씩 걸려서 만들기도 하는 데, 그 때문에 더더욱 그들 같은 배우들이 필요했다. 그런 고집으로 만든 <암화> <진심영웅> <미션>은 흥행성적이 좋지 않았다. 밀키웨이의 앞날이 걱정되더라. 안좋은 평가도 많았다. 결국 생존을 위해서 영화를 만들었다. <니딩 유> <암전> <수신남녀>같은 작품들이다. 물론 <PTU>나 <익사일>처럼 밀키웨이만의 영화도 찍었다.
그렇게 상업성과 스타일 사이에서 고민하며 많은 영화들을 찍었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는 <유도용호방>과 <참새>다. 홍콩에 대한 애정을 담은 영화랄까. <유도용호방>을 만든 2004년 당시의 홍콩은 경제 불황과 사스에 시달렸다. 그래서 나는 70년대 홍콩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영화에 담고 싶었다. 문제는 70년대의 정서를 간직한 공간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거였다. <참새>에서는 지금은 사라진 홍콩의 모습을 더욱 집요하게 담으려 했다. 새로운 것은 금방 탄생하지만 옛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후대를 위해서라도 영화를 통해 지금의 홍콩을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