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라는 캐시의 유명한 대사가 열변하듯, 캐시와 히스클리프는 피아를 분별할 수 없는 영혼의 쌍생아다. 그러나 세속적 행복 또한 선망하는 캐시는 부잣집에 시집가서 구박받는 고아 히스클리프를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경솔한 궁리를 한다. 발튀스가 그린 대목에서 캐시는 이웃의 양갓집 도련님 에드거의 방문을 기다리는 참이다. 브론테에 따르면 히스클리프와 에드거는 “황량한 언덕배기 탄광과 아름답고 기름진 골짜기”처럼 대조된다. 캐시와의 오붓한 한때를 기대하던 히스클리프는 외출이라도 하는지 묻고, 캐시는 고개를 젓는다. 불길함에 사로잡힌 히스클리프는 다시 묻는다. “그런데 왜 실크드레스를 입는 거야?” 발튀스의 그림 속 세 인물 사이에는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부재하며, 히스클리프는 불안을 넘어 이미 모든 것을 아는 자의 표정으로 주먹을 부르쥐고 깊숙이 절망하고 있다. 그는 바로 화가 자신이다. 지금 발튀스는 소설의 한 페이지에 몰입해, 닿지 않는 세계를 향해 손을 내뻗으며 “안돼!”라고 소리없이 외친다. 그의 무력함을 비웃듯, 그림 속 캐시는 정서와 체온을 감지할 수 없는 여신의 모습이다. 그녀는 너무도 하얗고, 거대하며, 차갑다.
발튀스는 리얼리스트였지만, 현실에 접근하는 발튀스의 여정은 환상과 상상, 픽션으로 우거져 있어서 종종 완성작은 소설과 시, 비극의 무대장치처럼 보이곤 했다. 훗날 히스클리프와 동일시하지 않았냐는 비평가의 질문에 발튀스는 “나는 캐시와도 동일시했다. 위대한 서양미술의 다수는 뭔가를 재현하는 예술이 아니라 동일시하는 예술이었다”라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무뚝뚝한 화가가 뭐랬건 <캐시의 몸단장>은 스스로 예술가인 독자가 열애하는 텍스트와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한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 하긴 우리 모두에게 그런 때가 있었다. 소설과 그림 속 세계와 현실을 가르는 벽이 훨씬 부드럽고 투명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던 시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