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9일 공식 개막에 앞서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기자 시사회에서 공개된 비경쟁 개막작 <문 앞의 적>(Enemy at the Gates)은 장엄한 베를린영화제 공식 팡파레와 한몸처럼 이어지는 웅장한 음악으로 포문을 열었다. 시네마스코프 화면에 펼쳐진 전장은 2차대전의 전환점이 된 1942년 히틀러의 스탈린그라드 공략 현장. 절망적 전세 속에 러시아 선전 장교 다닐로프(조셉 파인즈)는 병사 바실리 자이트세프(주드 로)의 경이로운 사격술과 전투능력을 발견하고 그를 ‘스타’로 만든다. 러시아군의 영웅이자 독일군의 저승사자가 된 영웅 바실리를 제거하기 위해 독일은 코닉 중령(에드 해리스)을 전선에 파견한다. 그러나 다닐로프가 바실리와 한 여인(레이첼 와이즈)을 사랑하게 되면서 이 영화의 독일어 제목 ‘결투’(Duell)는 두 가지 의미를 얻는다.
베를린영화제 관객의 할아버지, 아버지를 위협했던 ‘적’을 영웅으로 세운 <문 앞의 적>은, 영화제의 안마당인 포츠담 광장 인근 바벨스베르크 스튜디오에서 독일 자본을 주요 재원으로 영국, 아일랜드가 합작한 대작. 프랑스감독, 러시아 단역, 독일 스탭, 영국 스타들을 아우른 공평한 멤버 구성마저 베를린영화제 오프닝 작품답다. 장 자크 아노 감독은 할리우드식의 초인적인 영웅 스토리를 다루되 묘사에서는 유럽영화의 미묘한 터치를 유지하는 전략을 택했다. 디지털 기술이 매만진 독일 공군의 공중 폭격 장면은 여름 블록버스터를 방불케 하지만, 감정을 자극하도록 면밀히 조정된 에피소드나 카메라 앵글이 곳곳에 숨어 있다. 군복 속에서 늘 눈부신 에드 해리스를 비롯해 세 남자주인공의 연기는 수준급. 고귀한 영웅과 비열한 악당의 대결이 아닌 인간적 품위를 지닌 캐릭터들의 갈등은 <문 앞의 적>이 드라마로서 지닌 첫 번째 상품가치가 될 듯하다. 조금 길지 않느냐는 불평이 있지만, 장 자크 아노로서는 오랜만의 박스오피스 풍작을 기대해봄직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