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영화계의 대부 서극 감독은 영화 홍보차 한국을 찾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지난 13년간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다. ‘나의 인생, 나의 영화’라는 주제로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하고 핸드프린팅 행사를 갖기 위해 부산을 찾은 그는 “원래 유명한 감독들만 이런 행사를 하는 것 아니냐”며 무척 기뻐했다. 더불어 그랜드호텔 스카이홀을 꽉 채운 청중들에게 예정시각을 훨씬 넘기면서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아무리 시간이 모자라도 객석 질문은 꼭 받아야 겠다”는 말에 객석에선 환호성이 터졌다. 서극의 마스터클래스를 지상중계한다.
어렸을 적 13-14살 때 우리 가족은 베트남 사이공에서 살고 있었다. 친구들과 어떤 놀이를 했냐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극장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극장 앞에서 들어가는 어른 아무나 그 손을 붙잡고 무작정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떤 아이들은 성공했지만 실패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온 아이들이 못 들어간 아이들을 만나 본 영화 얘기를 들려줬다. 물론 그 줄거리를 다 기억하지 못하기에 멋대로 꾸며내서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면 그걸 들은 애들이 또 다른 애들에게 들려주게 됐는데 그러다보면 전혀 다른 영화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각자 자기만의 영화를 만드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당시 베트남 극장에서는 인도영화가 많이 상영됐다. 노래하고 춤추는 뮤지컬적 요소가 많았는데 아이들은 그 캐릭터들처럼 노래하고 춤추는 아이들로 변했다. 그리고 <고질라>를 보고서는 곧 도시가 고질라에 의해 점령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먹을 것을 숨겨서 지낸 적도 있었다. 그 무렵 우리 집 옆에 촬영기자재를 파는 상점이 생겼는데 그 상점 주인이 우리들을 특별히 예뻐해서 카메라를 쓸 수 있는 기회를 선사했다. 그래서 우리끼리 춤추고 노래하는 광경을 카메라로 찍곤 했다. 우리가 그렇게 노는 걸 보더니 그 상점의 주인아저씨가 8밀리 카메라로 동영상 촬영도 해보도록 권했다. 내 생애 첫 영화를 그렇게 찍게 됐다.
그러다 1967년 홍콩으로 이사를 가면서 생활과 환경 모든 게 변했다. 참 답답하고 무료한 사춘기였는데, 하루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내린 적이 있다. 사이공에서 봤던 영화 장면과 흡사한 영화가 극장 간판으로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영화를 보러 들어가면 내 유년기의 즐거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티켓을 끊었다. 그렇게 그 날 아침 봤던 영화는 나에게 정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바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였다. 그 뒤로 본격적으로 내 미래에 대해 생각해야 했고, 나는 내 유년기의 기억처럼 늘 즐거운 시간 안에 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고 있는데 또 그 극장 앞을 지나게 됐다. 난 친구에게 말했다. “영화를 찍어야겠어.” 하지만 당시 홍콩에는 영화학교라는 게 없었다. 그러다 정말 행운으로 나를 받아주겠다는 학교가 있어서 미국으로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
하지만 난 정말 형편이 좋지 않았기에, 뉴욕의 한 현상실에서 일하며 잡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옆에는 편집실이 있었는데 편집기사님의 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을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그 분의 조수가 돼 있었다(웃음). 편집실은 모든 필름들이 모이는 곳이라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게 많았다. 그러다 문득 “어, 나 아직 졸업 안했는데?”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다시 학교로 돌아갔는데 이미 그 느낌이 달라져 있었다. 진정한 영화공부는 외부세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의 경험이 나중에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 TVB방송국에서 일할 때 많은 도움이 됐다.
내가 처음 한국에 온 것은 1977년쯤 드라마 촬영을 위해서였다. 당시는 중국과 자유로운 왕래가 없을 때라 눈 장면 촬영을 위해 대부분 한국으로 향할 때였다. 그런데 배우가 ‘무술감독이 누구냐?’고 물었다. 사실 난 드라마를 찍을 때도 무술감독이 필요한 줄 몰랐다. 그래서 난 ‘내가 무술감독’이라고 말했고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연출했다. 그러다 홍콩으로 돌아갔는데 워낙 시간이 없었고 편집기사도 어떻게 맞춰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래서 난 예전 경험을 살려 직접 편집을 했고 누군가 계속 그걸 지켜봤다. 난 주로 혼자 남아 밤에 일했는데 그도 마찬가지였던 거다. 함께 밤새던 그 친구가 바로 정소동이었고 그 인연으로 좋은 친구가 됐다. 그렇게 나는 무술감독도 아니면서 내 감각으로 최선을 다해 액션장면을 만들었는데 ‘다른 무협영화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느낌을 준다’는 얘기를 꽤 들어서(웃음) 기분이 좋았다. 그게 난 내 유년기의 기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늘 어렸을 적 극장에서 봤던 그 영화들의 쾌감을 다시 살려내고 싶다. 나는 무슨 영화를 만들려하는가, 하는 대답이 모두 거기 있다. 내가 영화를 찍는 근본적인 동력은 바로 그 어려서의 기억이 나에게 계속 영감을 불어넣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오래도록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