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에서 시작된 슈퍼히어로는 재미있는 구경거리지만 아시아 각국의 공간에 등장시키기에 이질적인 요소들이 많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아시아의 각국들은 고유의 전통, 종교, 문화를 바탕으로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를 결합한 다양한 토종 슈퍼히어로들을 탄생시킨다. 가장 적극적으로 히어로를 탄생시킨 국가는 일본이었고, 이들은 기계문명과 결합한 다양한 슈퍼히어로들을 만화와 영화를 통해 생산해냈다. 그에 못지않게 필리핀에서도 다양한 슈퍼히어로가 만들어졌고, 이 중 한 캐릭터는 인도네시아의 영화에 등장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말레이시아, 인도에서도 슈퍼히어로가 탄생되었다. 반면, 중국, 대만, 홍콩처럼 슈퍼히어로에 무관심하거나 거부하는 국가도 있다. 이들 국가는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유교권의 영향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슈퍼히어로의 등장
1950년대 후반, 일본에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가장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미국의 <슈퍼맨>시리즈였다. 이에 영향을 받아 이듬해 신토호에서 <슈퍼 자이언트:외계에서 온 강철맨>가 제작되었다. 이는 슈퍼맨의 조악한 모방에 불과했지만, 큰 인기를 끌어 이후 시리즈로까지 제작됐다. <슈퍼 자이언트>의 성공은 일본 제작자들에게 슈퍼히어로 장르의 시장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로봇 히어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테즈카 오사무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우주소년 아톰>, 외계인과 싸우는 거대한 <울트라맨>이 대표적이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과 한국 등 아시아의 주변국가가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유교의 영향권에 놓여있었던 것에 비해, 세계대전을 거치고 원자폭탄의 피해를 직접 몸으로 체험한 일본에게 기술 문명은 공포와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기술 문명이 야기한 충격은 그들의 땅과 육체에 직접 새겨진 지워지지 않는 상처이면서 동시에 전후의 삶 속에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던 셈이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의 슈퍼히어로 물은 일정한 마니아층의 관객을 형성하면서 장르영화의 자리를 탄탄하게 구축해나갔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의 슈퍼히어로들
유교의 영향력이 한국, 중국, 대만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치지 못했던 필리핀에서는 자국의 사회,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토종 슈퍼히어로들이 일찍부터 등장했다. 1950년대의 필리핀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이미 <진흙맨>, <화산의 아들>등 토종 슈퍼히어로가 등장한다. 1947년 잡지에서 처음 모습을 보인 <다르나>는 1951년에 영화화되었다. 다르나는 할리우드 원더우먼의 아시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원더우먼처럼 하늘을 날고, 눈에서 레이저 광선을 발사하며, 팔찌를 이용해서 총알을 막아낸다. 단, 그녀는 신체의 노출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을 의식하여 삼각형의 팬티는 착용하되 허리띠에서 배 부분을 가리는 천을 늘어뜨려서 복부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한편, 할리우드의 슈퍼히어로들이 방사능 노출에 의한 돌연변이로 탄생했다면 필리핀의 슈퍼히어로는 우연히 손에 넣게 된 물건으로 변신마법에 의해 탄생되는 식이다. 이것은 필리핀 어린이들의 리얼리티의 범주 안에서 허용되는 범위임을 의미한다. 이처럼 필리핀의 슈퍼히어로 속 주인공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인물로 영화의 주 관객층인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준다.
인도네시아 영화는 슈퍼히어로 장르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늦은 편이었다. 최초의 인도네시아 슈퍼히어로 작품은 1974년의 <라마 슈퍼맨 인도네시아>이었다. 이것은 만화가 원작이 아니라 영화를 위해 창조된 캐릭터다. 6년 후, 필리핀의 <다르나>의 흥행에서 영감을 얻은 <기적의 다르나> 가 제작되었고, 이듬해 <번개의 아들 군달라>가 개봉되었다. 절대 악과의 투쟁을 부르짖는 여타의 슈퍼히어로들과는 달리 인도네시아 슈퍼히어로가 싸우는 적은 친구의 가족을 괴롭히는 악령이거나 소년들을 유혹하는 마약상, 폭탄 제조 방법을 노리는 악의 무리다. 인도네시아의 슈퍼히어로는 필리핀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악과 싸운다.
2006년 인도 영화사 흥행 1위를 차지한 <끄리쉬>는 끄리쉬를 주인공으로 삼은 본격 슈퍼히어로 영화다. 끄리쉬는 총명하고, 초능력을 가지고 있고,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춤과 노래에도 능하다. 그는 할리우드 슈퍼히어로의 흔적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장르적 특징을 발리우드의 경계 안에서 그럴싸하게 조합해낸다. <끄리쉬>는 거대자본의 투자와 싱가포르 로케이션 촬영 등 실험적인 시도로 인도 영화 시장에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을 펼쳐보였다. 속편인 <끄리쉬2>가 내년 개봉을 목표로 현재 촬영 중이다.
태국과 말레이시아의 변종 슈퍼히어로
태국의 대표 슈퍼히어로 물 <머큐리맨>(2007)은 다소 엉뚱하다. 고대 티베트의 부적때문에 슈퍼히어로가 된 방콕의 소방관 출신 주인공 샤른은 아프가니스탄의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알리를 상대한다. 오사마 빈 알리의 야심은 티베트의 부적을 이용해서 미국을 공격하는 것.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테러리스트와 싸우는 태국의 슈퍼히어로 머큐리맨은 슈퍼히어로가 민족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물음조차 가뿐히 뛰어넘어버리는 아시아의 변종 슈퍼히어로인 셈이다.
<치착맨>은 다른 슈퍼히어로에 비해 우연적으로 탄생하였다. 게다가 사고로 치착맨이 된 하이리에게 슈퍼히어로는 재앙일 뿐이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자신의 변화를 털어놓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약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유일한 희망으로 여겼던 교수의 음모가 드러나고 치착맨은 자신의 몸의 변화가 가지고 있는 슈퍼히어로의 잠재성을 깨닫게 된다.
아시아에서 제작된 대부분의 슈퍼히어로들은 촌스럽다. 이들은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처럼 화려한 도시를 배경으로 종횡무진하지도 않고, 현란한 카메라 테크닉이나 감각적인 편집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할리우드식 쾌감을 선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시아 슈퍼히어로들은 각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감춰진 욕망, 갈등, 고민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즉, 아시아 각국의 역사성과 문화에서 파생되는 섬세한 면면과 각 문화 사이의 작동을 관찰할 수 있는 점에서 아시아 슈퍼히어로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