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여성, 일본에서 변사체로 발견!” 1981년, 대만의 어느 날이었다. 당시 43세였던 차이양밍 감독은 아침식탁에서 펼쳐든 조간신문의 헤드라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기사가 전한 사건의 전모는 이러했다. 대만에서 만난 일본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는 사랑과 돈을 좇아 일본으로 향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은 그녀가 가진 부푼 꿈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자신에게 사랑을 맹세했던 남자는 어느 순간 돌변해 그녀를 야쿠자에게 팔아버렸다. 호스티스로 일하게 된 그녀는 술시중은 물론이고, 매춘까지 나가야했다. 온갖 수모를 당한 그녀는 결국 절망의 끝에서 탈출을 감행했지만 야쿠자에게 발각됐고 그 결과는 비정한 죽음이었다. 1979년 사회사실영화인 <잘못된 첫걸음>을 성공시킨 후 차기작을 고심하던 차이양밍은 이 경악스러운 사건에 분노했다. 70년대 초반만 해도 좀도둑 정도가 가끔 나타날 뿐 여러모로 순박했던 대만사회는 경제의 부흥과 함께 망가지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서 흉흉한 범죄가 판을 쳤고 인신매매가 기승을 부렸다. 그러다보니 한때 무협과 멜로영화로 양분됐던 대만의 영화계도 범죄를 다루는 영화들을 양산해내기 시작했다. 성공을 꿈꾸며 일본으로 갔다가 상처를 안고 돌아오는 여자들은 비단 기사의 피해자만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대만사람들에게 꿈의 땅이었고, 그 때문에 거리 곳곳에는 일본에 가면 멋진 직업을 얻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광고들이 즐비했다. 차이양밍은 일본이 꿈의 땅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리고 일본으로 간 여성들의 현실은 어떤 것인지 영화를 통해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저 선정적인 사건으로 치부하기엔 그는 아직 젊었다.
대만여성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려는 의도를 품었지만, 이미 26편의 영화를 연출한 당대의 흥행감독인 차이양밍은 영화의 재미를 저버릴 수 없었다. 사실 그에게 흥행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대만관객은 귀여웠다. 아직 문화적인 수혜에 젖지 못했던 그들은 웬만한 영화에 쉽게 만족하곤 했었다. 강한 메시지와 더불어 자극적인 재미들을 줄 수 있다면 흥행은 당연했다. 차이양밍은 사건을 취재한 기자를 만나는 등 각종 자료를 수집하던 중 우연히 피해자의 친구를 만나게 됐다. 미모의 여성이었던 그녀는 세계무술대회에 참가할 정도로 무술실력이 뛰어난 여자였다. 차이양밍은 그녀로부터 한 일본인을 통해 친구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려 했었지만, 결국 아무런 복수도 이루지 못한 채 귀국해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이 여자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고자 했다. 캐릭터가 정해지자, 차이양밍의 머릿속에서 한편의 영화가 완성됐다. 친구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해 야쿠자의 세계에 뛰어든 여자경찰. 그녀는 야쿠자의 다음 목표가 친구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렵사리 동생을 구해냈지만, 은거지로 들이닥친 야쿠자들은 다시 동생을 뺏어간다. 이 과정에서 한쪽 눈을 잃게 된 주인공은 여성무술인들을 찾아가 동맹을 부탁하고 하얀 비키니를 입은 그녀들은 복수를 다짐한다. 친구를 죽인 남자를, 아니 여성을 업신여기는 남자들을 향한 복수극. <하얀 비키니의 복수>의 원제<The Woman Revenger>란 제목은 그렇게 탄생했다.
강한 메시지와 자극적 재미가 흥행 코드
차이양밍은 이 영화에서 야쿠자들의 세계를 밀도있게 묘사하고 싶었다. 특히 극중에서 일본경찰과 야쿠자가 밀약을 맺는 장면과 주인공이 야쿠자에게 눈을 찔리는 장면은 그의 야심이라 할만했다. 이어 여주인공을 맡을 배우를 찾던 그는 자신의 무협영화에서 조연을 맡아오던 양혜산을 주연으로 발탁했다. 그녀라면 이 영화의 잔혹한 액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양혜산은 영화에 등장하는 에로틱한 장면들을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절대 벗을 수 없다고 감독에게 일갈했다. 결국 차이양밍은 그녀의 대역을 찾아다녔고, 양혜산은 자신의 대역을 선정하는 것에까지 관여하려 들었다. 몸매는 날씬한 지, 피부는 좋은지, 가슴은 예쁜지. 그녀로서는 자신은 벗지 않을지언정, 관객들의 기대를 무너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영화계의 경쟁자였던 륙소분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예쁜 가슴과 대담한 연기로 단번에 주연급으로 성장한 여배우였으며, 륙의봉과 륙일산도 언제든지 벗을 준비가 되어 있는 배우였다. 당시 일컬어지던 ‘삼륙일양’(세명의 륙씨와 한명의 양씨)의 체제에서 그녀는 도태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감독의 마음 한편에는 속 썩이는 배우보다도 다른 걸림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검열이었다. 당시 대만정부는 “영화가 관객을 너무 긴장시킨다”거나, “자극시킨다”는 이유만으로도 필름들을 잘라냈다. 야쿠자 사회의 비정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던 차이양밍에게도 검열은 가위를 들이댈게 분명했다. 정부에서 원하는 것은 ‘극장의 교실화’였다. 어떤 식으로든 관객에게 이로운 메시지를 전달해야만 한다는 점이 당시 영화감독들의 아픔이었다. 결국 그는 검열관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제스처를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삽입하기로 결정했다. 복수를 끝낸 여자주인공이 경찰에 의해 수갑이 채워진다는 설정이었다. 당시 대만은 소소한 싸움에도 경찰들이 출동하던 시기였다. 이유가 어쨌든 간에 살해를 한 자는 범죄자로 낙인이 찍혀야 했던 것이다. 한편, 일본에서 올 로케이션 촬영을 하겠다는 야심도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던 의도였지만, 어디서 찍든 간섭이 심할 뿐만 아니라 체류비용이 막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급사 측에서는 이 영화의 개봉날짜를 약 2달 앞으로 박아버렸다. 배급사가 정한 날짜는 어길 수 없는 것이었다.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어떻게든 개봉 전날까지는 후반작업을 다 끝내야 했다. 긴박한 일정으로 영화를 만드는 건 대만의 영화감독이라면 누구나 습관적으로 겪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담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여러가지를 계산했을 때, 일본에서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은 딱 한달 뿐이었다.
검열 및 삭제에도, '교육적 메시지'로 평단 호응도 얻어
여러 우여곡절 끝에 영화는 완성됐다. 배급사와 약속했던 1981년 3월 29일, <하얀 비키니의 복수>는 극장에 걸렸고 대만 전역에서 약 60만명에 달하는 흥행을 거두었다. 전작인 <잘못된 첫걸음>이 약 12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던 것에 비하면 만족스럽지 않은 흥행이었지만, 입장료가 50원이었던 당시 약 4천만원에 달하는 수입을 올렸으니 무시하지 못할 성공이었다. 언론의 평가도 꽤 호의적이었다. 다른 블랙무비들이 잔인함과 선정성을 비판받은 것과 달리, <하얀 비키니의 복수>는 영화가 가진 메시지를 높게 평가받았다. 하지만 극중에서 양혜산이 복수를 감행하는 몇 장면이 검열에 의해 사라진 건 아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잘못된 첫걸음>에 이어 <하얀 비키니의 복수>를 흥행시킨 차이양밍으로서는 대만 영화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회였다. <하얀 비키니의 복수>는 홍콩, 일본, 한국에도 수출됐고 여러 제작사들이 그에게 영화를 만들자고 제의해왔다. 성공가도에 놓인 그의 눈에 비친 대만 영화계는 능력있는 자만이 행복을 거머쥐던 대만사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완성도와 작품성을 떠나 영화는 어떻게든 흥행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흥행을 시킨 감독만이 영화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6편의 영화를 연출한 차이양밍은 1990년 <형제>를 끝으로 메가폰을 놓았다. 그리고 18년이 지난 지금, 차이양밍에게 <하얀 비키니의 복수>는 비정한 사회에 조금이나마 발언하고 싶던 젊은 날의 추억인 동시에 가격대비 효과적인 흥행을 노리던 저개발시대의 기억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