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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자, 웃자, 웃자
이영진 2008-09-09

1960년대 희극영화 인기몰이

‘찬바람 불면 조심하라.’ 연예계에서는 11월을 흉흉한 달로 꼽는다. 1965년의 늦가을도 흉흉했다. 특히 ‘희극트리오’라 불렸던 서영춘, 구봉서, 김희갑 등이 잇따라 사고를 당했다. 구봉서는 10월26일 정창화 감독의 <광야의 결사대> 촬영 중 팔다리 골절상을 입었다. 촬영 당시 터진 수류탄 뇌관을 피하기 위해 급히 다이빙을 했는데 그곳이 그만 12m 낭떠러지였다. 무려 전치 6개월의 진단이 나왔다. 김희갑은 11월8일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 당시 본인 소유의 자가용 윌리스 왜건을 타고 서울역 앞 로터리를 지나던 중 ‘츄럭’과 충돌, 안면 상해를 입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피를 흘리는 바람에 김희갑은 실명한 줄 알았다고 한다. “봉변 제3호는 살살이 서영춘군.” 말이 씨가 된다고, 시민회관에서 만담을 진행 중이던 서영춘은 볼일 보러 화장실에 갔다가 불량배들로부터 “쇼 출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인두로 지짐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

웃음 제조기 3인방이 이처럼 사고를 당하고, 또 언론들이 큼지막한 특급기사로 다룬 데는 다 이유가 있다. 1965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희극은 천시 받는 처지였다. 148편의 영화가 제작됐던 1963년의 경우, 희극물도 19편이나 만들어졌으나 82편이나 만들어졌던 멜로에는 한참 못 미쳤다. “원래 희극영화는 멜로드라마와 달리 10만명 이상이 개봉극장에서 동원된 예가 거의 없었고, 한국 관객의 취향은 희극보다도 비극에 더욱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한국영화전사> 이영일, 소도) 그런데 1960년대 중반 김기풍 감독의 <여자가 더 좋아>가 터져나오면서 ‘폭소’ 기류가 부상했다. 여장을 하고서 결혼한 옛 애인의 집으로 침투해 식모로 일한다는 줄거리의 이 영화는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무려 17만6천명의 관객을 불러들였다. 여장 남자라는 사실이 들통나자 남자가 치마를 걷어쥐고 브래지어를 붙잡고서 줄행랑 치는 마지막 장면은 특히 인구에 회자됐는데, 이 영화로 “쇼 무대에서는 베테랑이지만 영화 출연 경험이라고는 한컷 출연이 전부였던” 서영춘은 “전파와 은막을 동시에 석권하는” 일약 스타의 자리에 올라선다. 이를 기점으로 충무로에서는 일대 희극 붐이 이는데, <출세해서 남주나>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 <총각김치> <주책바가지> 등이 쏟아져 나온다. 수준 이하의 저속한 난센스 영화라는 손가락질이 있었지만, 대중은 아낌없이 주머니를 털었다. 전쟁이 끝난 지 벌써 10여년, 굶어죽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의 웃음일까. 아니면 “인간을 월부로 사는” 아이로니컬한 세상이 도래한 것에 대한 조소일까. 1960년대 중반 충무로에서 터져나온 폭소는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