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놔, 비다. 비. 침침하게 가라앉은 하늘은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비가 내린 거리를 추적추적 밟고 '충무로 영화제'의 간판 밑으로 들어가니 어귀에서부터 단단한 기강이 느껴졌다. 번잡한 구청의 낭하에서 영화제의 직원들은 젖은 와이셔츠 차림으로, 혹은 시커멓게 된 청바지 차림으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기자를 맞으러 온 팀장마저 귀에서 핸드폰을 떼지 못했다. 거 참, 우려가 무색하게도 잊고 있었다. 이들은 천재지변에 굴하지 않는 전천후의 강호들이란 걸.
편집팀/ 9월 1일 오후 3시 첫 관문으로 지하 1층에 있는 편집팀의 문지방을 넘었다. 구석에서는 커다란 팬과 에어컨이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추위와 공포를 체감하기 딱 좋은 그 자리에서 으스스한 명구가 눈에 들어왔다. “공포의 기술 구단! 영사 사고여, 지옥행 급행 열차를 타라!” 구호는 그렇다 쳐도 바깥에 날씨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 날씨에 냉방이라니. 오히려 사건사고 제로를 목표로 편집팀이 지옥행 열차에 몸을 실은 분위기였다. 당일 예상 강우량 20밀리미터 예상온도 18도. 그러나 몸을 사리지 않고 전의를 불태우는 편집팀의 체감온도는 정말 지옥을 웃돌았다. 보수를 위해 필름에 칼을 대는 이들의 손은 <가위손>보다 차가웠으며 눈빛은 <엑소시스트>의 신들린 여자보다 살벌했다. 비장한 전의에 다리마저 후들거렸다.
자막팀/9월 1일 오후 4시 그러나 편집팀의 공포는 어디까지나 예고편이었다. 자막팀의 작업현장은 풍경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브라운관이 벽면을 빽빽이 메운 가운데 저마다 커다란 헤드폰을 귀에 얹고 있었다. 각 브라운관의 위쪽에는 시간이 1/100초 단위까지 표시되어 있었다. 그 짧은 찰나조차 놓치지 않을 셈인지 기자의 목청 높인 인사에도 움쩍 않았다. VHS와 DVD의 헤드가 돌아가는 소리만 적적하니 방을 채웠다. 본래 강자는 말이 없는 법. 수신호처럼 눈빛을 주고받더니 화장기 없는 여성 하나가 헤드폰을 벗고 기자를 향해 앉는다. “화장 안했는데. 찍으면 안돼요.” 이들은 밤낮을 잊었고 때로는 식사를 잊었으며 더러는 화장조차 잊었다. 도대체 얼마나 일이 고되길래, 싶어 물었더니 “스파팅(문제를 찾는 작업)만 한 편당 10시간 이상 걸려요. 길면 하루를 넘길 때도 있다” 고 덤덤하게 말한다. 일이 고된 만큼 크레딧 자막의 위치는 감독, 번역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기술팀과 마찬가지로 곡기조차 잊어가며 자막을 작업한 대가다. 화면에 이름이 오르면 기쁘지 않냐고 물었더니 “내가 좋아하는 영화와 함께한다는 점”이 더 행복하단다. 공명심을 잊은 이들에게는 작업의 강도가 높을수록 보람은 배로 빛났다.
프로그램팀/9월 1일 오후 5시 색색의 포스트잇으로 빼곡히 채운 한쪽 벽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의 색마다 영화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있다. <매그놀리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디어 헌터>… 놀랍게도 옥상에 있는 허름한 사무실에서 펼쳐진 풍경이었다. 백 수 십 편이 넘는 충무로 영화제의 영화들 한 편 한 편의 상영 여부며 기획취지가 전부 바로 이곳 사무실에서 결정된다. 프로그램팀은 벽을 커다란 스케치북 삼아 영화제의 밑그림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 이미 서너 편의 영화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작업들이 마감된 상태였지만 방방곡곡에서 전화가 걸려왔고 수화기 너머로 “계약"이며 “퍼블리셔”하는 단어들이 오갔다. 아직도 할일이 많은가 물었더니 길게 숨을 들이쉬고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특히 토드 헤인즈의 영화인 <세이프>의 경우 당일에야 영화의 프린트가 도착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도착한 프린트를 다시 자막팀과 기술팀에 전달하여 확인하는 과정까지 시간에 포함해야했기 때문에 정말 아슬아슬했단다. 질문이 끝나자 프로그램팀은 양파즙과 비타민 음료를 연료 삼으며 다시금 일로 돌아갔다. 영화제가 시작하고 막을 내리는 그 순간까지 쉴 수 없는 건 어느 부서나 마찬가지였다.
티켓팀/ 9월2일 오전11시 개막 전날 티켓팀이 관객맞이에 나섰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명동CGV 앞 안내 부스를 찾았더니 준비가 한창이다. 한쪽에서는 발권시스템의 오류를 점검하고, 오늘은 어떤 준비를 해야하는지, 머리를 맞대고 있다. 왜 이렇게 빨리 준비하냐고 묻자 티켓팀 자원봉사자 정현희씨는 “오전에 찾는 손님들이 꽤 된다”며 질문에 답할 시간도 없다는 듯 서두른다. 게다가 총 2명으로 구성된 이곳 티켓팀은 영화제 직전에 꾸려졌던 다른 자원활동가팀과는 달리 지난 8월25일부터 팀을 조직해 사전예매분을 판매해 왔다. 오늘과 내일은 사람이 많이 올 것을 대비해 이틀 간만 두 명이 더 충원된다고. 개막 전인데도 직접 방문해 티켓을 예매해 간 사람들이 적잖이 있을 정도니 이들이 치룰 전쟁이 얼마나 격렬할 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취재에 나선 30여분 동안만 5명의 예비관객이 티켓을 구입하겠다고 부스로 들어왔다. 기자랍시고 처들어왔는 데, 어쩔 수 없는 불청객이다. 여기저기 놓인 티켓 더미에 치이고, 발권기에 발이 걸리고, 분주한 자원활동가 틈에서 어리버리 하다보니 정신이 없다. 영화제 관객들의 첫 인상이나 다름없는 티켓팀은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영화제를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사업팀/ 9월2일 오후6시 오후 6시 서울광장. 인기가수들이 무대 위에서 목청과 관절을 가다듬고 있다. 한쪽에서는 전야제 실무담당자인 사업팀의 권기원 차장이 무대 주변을 갈짓자로 방황한다. 조명 위치는 제대로 설치됐는지, 무대영상은 순서대로 나오고 있는지, 스피커에는 이상이 없는지, 그가 확인해야 할 건 전야제의 A부터 Z까지인 듯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전야제의 기본 컨셉은 “대중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무대, 영화는 곧 축제”다.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영화제의 화려한 서막을 알리고 싶다고 한다. 이번 전야제는 약 석달 전부터 야심차게 준비됐고, 서울광장에 대형무대를 설치하는데만 48시간이 걸렸다. 전날 새벽까지 내린 비가 그동안의 공에 비웃음을 날려버릴 수도 있었으나, 다행히 하늘은 맑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보며 이렇게 방긋이 웃는 얼굴도 간만에 본다. 그를 비롯한 영화제 사업팀은 전야제를 비롯 ‘남산공감’의 무대를 맡아 충무로를 축제의 난장으로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