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곽재용 감독의 소식이 뜸해졌다. <엽기적인 그녀> <클래식> 이후에도 그는 꾸준히 멜로영화를 만들어왔지만, 예전만큼의 주목을 받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곽재용 감독은 이에 연연하지 않은 채 <싸이보그, 그녀>로 부천영화제를 찾았다. 영화제 폐막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한국 감독이 쓴 한국 시나리오로 일본의 스탭과 배우가 참여해 만든 최초의 작품이다. 이미 일본에서 100억 이상의 수입을 올린 <싸이보그, 그녀>의 속사정을 알아보는 <스코프 인 장르> 포럼이 7월23일 오전 11시 경기예고 음악 감상실에서 열렸다. 권용민 프로그래머의 사회로 진행된 이 자리에는 곽재용 감독과 제작을 맡은 지영준 마루온필름 대표가 참석했다. 함께 하기로 한 일본측 제작자 야마모토 마타이치로 프로듀서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국에 오지 못했다.
권용민 프로그래머(이하 권): 합작영화를 추진한 사례는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대부분 성사되지 못했거나, 성사된다 해도 성공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싸이보그 그녀>가 일본에서 100억원 이상의 흥행수입을 올리며 선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곽재용 감독(이하 곽): 합작영화를 만들면 완성되기까지 정말 많은 일을 함께 겪어야 하기 때문에 서로간의 신뢰가 필수적이다. <싸이보그, 그녀>의 제작을 맡은 프로듀서 야마모토 마타이치로를 만난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그를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처음 봤다. 우리는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석했었는데, 당시 심사의 기준을 놓고 위원들간에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둘은 의견이 잘 맞고, 비슷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알게 되어 <클래식>과 <엽기적인 그녀>를 보여드렸는데 눈물까지 흘리며 좋아하시더라. 프로젝트 얘기는 그 다음이었다. 그렇게 서로가 충분한 믿음을 가지고 일을 하면 어느 나라와도 합작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권: 하지만 신뢰만으로 영화가 만들어지는 건 아닐 텐데. 곽: 물론 시작과정에서 문제도 많았다. 일단 일본에도 감독이 많은데 왜 굳이 한국 감독을 쓰냐는 지적이 일본 내에서 많았다고 들었다. 일본의 영화제작위원회와 접촉하며 <싸이보그, 그녀>를 위해 몇 년을 기다렸다. 그런데 허락이 떨어지니 갑자기 한류 열기가 식더라. 제작비가 8억엔에서 7억5천만엔으로 줄었다. 큰 배급회사도 손을 뗐다. 그래서 재미있는 장면인데도 촬영을 포기하고, 규모가 큰 촬영은 조금씩 수정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충돌이 있었겠나. 형제같은 사이가 아니었다면 성공적으로 일을 끝내지 못했을 거다.
권: 언어의 문제가 있었을 텐데, 일본 스탭이나 연기자들과는 어떻게 소통했나. 곽: 솔직히 언어에 대한 장벽은 전혀 못 느꼈다. 통역이 잘 해주기도 했고,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쓴다고 해도 말하고자 하는 바가 충분히 전달이 잘 되는 것 같다. 배우들에게는 직접 녹음한 음악CD를 한 장씩 나눠줬다. 내가 이 장면에서 원하는 건 이 음악의 감정이라고 그들에게 설명했다. 또 일본 사람들은 다들 혼자서 밥을 먹는 편인데, 나는 한국식으로 다 같이 모여서 먹도록 하고 친구처럼 대했다.
권: 지용준 대표에게 묻는다. 왜 하필 일본과의 합작인가. 지용준 대표(이하 지): 일단 일본은 아시아국가 중 가장 넓고 투명한 시장을 가지고 있다. 또 DVD 등의 부가판권시장이 크다. 일본의 평균 제작비는 25억에서 50억 정도 하는데, 한국은 이미 그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됐다. 그런데 시장의 상황은 한국이 더 열악하다. 인건비가 상당히 많이 올랐고, 부가 판권시장은 완전히 무너져 스타배우를 쓰지 않으면 수익을 내기 힘든 구조다. 자본이 풍부하고 전문화된 인력도 많으면서 제작비는 덜 드는 일본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권: 제작하면서 일본 측과의 마찰은 없었나. 지: 무엇보다도 문화의 차이가 크더라. 곽 감독이 쓴 시나리오에서 할머니가 꼬마아이를 맞아주는 대목이 있었다. 그때 대사가 "얘, 너 학교가서 혼나고 오지는 않았니?"라는 지극히 평범한 대사였는데, 일본측 프로듀서는 이걸 보더니 당장 빼라고 했다. 일본에서는 방과 후에 가족이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거다. 또 일본에는 옥탑방이 없기 때문에 시나리오에서 옥탑방 부분을 뺐고, 친구들과 생일을 맞이하며 짓궂은 장난을 치는 부분도 뺐다. 일본에서는 생일날 그런 장난 안 친다더라. 이처럼 한국 시나리오를 일본에 맞게 수정하면서 문화적 차이를 줄여나가는 과정이 가장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