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새로운 일본 현대 영화를 낳다
닛카츠 하면 일본영화에 대해 약간 아는 사람들은 대개 로망 포르노를 떠올릴 것이다. 1970년대에 시작된 닛카츠 로망 포르노는, 사람들이 폄하하는 에로영화에 작가의 숨결을 불어넣어 도발적이면서도 예술적인 경지를 개척했다. 로망 포르노는 가장 일본적인 그리고 가장 첨예한 영화적 도전이었다. 하지만 닛카츠에 로망 포르노의 시기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지금 일본의 3대 메이저라고 할 도에이, 도호, 쇼치쿠와 비교하면 작은 영화사지만, 한때 닛카츠는 일본 최초의 메이저 영화사로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또 청춘영화와 액션영화에서 가장 혁신적인 흐름들을 만들어낸 독특한 영화사였다.
1912년, 4개의 영화회사가 합병해 일본활동사진주식회사를 발족한다. 이 회사의 약칭인 ‘일활’(日活)의 일본식 발음이 닛카츠이고, 그것이 바로 영화사의 이름이 된다. 이전의 소규모 영화제작사들과 달리 닛카츠는 스튜디오를 갖추고 할리우드식 메이저 영화 시스템을 갖추었다. 도쿄와 교토에 각각 촬영소를 세워 도쿄에서는 신파를, 교토에서는 구극을 제작한 것이다. 이후 신파는 현대극으로, 구극은 시대극으로 불리게 된다. 2차대전 이전까지 닛카츠는 신파와 시대극 영화를 활발하게 제작하는 일본 최대의 영화사 중 하나로 군림했다.
하지만 전후 닛카츠가 제작을 재개한 것은 1954년의 일이다.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며 새 출발한 닛카츠에게는 커다란 장벽이 있었다. 당시 쇼치쿠와 도에이 등 대형 영화사들은 감독과 배우들에게 독점계약을 강요했다. 그리고 기존의 5개 영화사 사이에 맺은 협정 때문에 새로운 영화사는 그들을 전혀 기용할 수가 없었다. 뒤늦게 뛰어든 닛카츠는 새로운 감독과 배우를 공모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행운이었다. 새로운 술은 새로운 부대에, 라는 말처럼 전후의 ‘현대’를 제대로 영화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재능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작은 <태양의 계절>(1956)이었다. 이시하라 신타로의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을 후루카와 다쿠미가 연출한 <태양의 계절>은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기성 사회의 질서에 동조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좇는 ‘태양족’이 탄생했고, 젊은 세대는 그들의 반항과 무질서를 동경했다. 그리고 이시하라 신타로의 동생 이시하라 유지로라는 대스타가 탄생했다. <태양의 계절>에 이어 출연한 나카하라 야스시 감독의 <일그러진 과일>(1956)에서 주연을 맡은 이시하라 유지로는 당시 젊은이들의 이상이 되었다. 이시하라 유지로는 ‘전후 일본인이 눈뜨기 시작한 개인주의의 완벽한 구현자이자 자아의식의 결정체…혼잣말, 문득 흥얼거리는 노래, 목적 없는 방황…세상에 위화감을 가지고, 가족이나 국가라는 공동체에서 추방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댄디즘과 고독’을 지니고 있었다. 이시하라 유지로는 이전의 스타들과 전혀 다른 종류의, 젊은 세대가 공감하고 열광하는 당대의 아이콘이었다. 이시하라 유지로는 이후 태양족의 방탕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1960년대 중반에는 좀 더 부드럽고 편안한 이미지로 변신한다.
무국적 액션영화로 시대 풍미하다 로망 포르노에 기착
영화 제작을 재개한 닛카츠에 모인 젊은 감독들은 과거의 일본영화가 아니라 할리우드와 유럽의 영화에 매혹된 새로운 세대였다. 그들은 할리우드의 필름 누아르와 서부극에 열광하며, 그런 영화들을 일본의 액션영화에 이식하려 도전했다. 당시 액션영화의 전형은 59년에서 62년에 걸쳐 만들어진 사이토 부이치 감독의 <철새> 시리즈에서 찾을 수 있다. 주인공은 기타를 들고 다니며 지방 도시를 떠돌아다니다가 악덕 지주나 야쿠자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약자를 보면 그들을 돕는다. 거친 싸움을 벌이며 악당을 물리치는 주인공은 다시 어디론가 떠나간다. 이것은 <셰인> 같은 서부극의 전형적인 스토리다. 이런 식으로 할리우드의 서부극과 범죄영화는 일본을 배경으로 한 ‘무국적 액션’ 영화로 탈바꿈한다. 일본판 서부극의 무대가 홋카이도나 아소산 같은 외진 시골이라면, 갱영화에서는 고베나 요코하마 등 국제적인 이미지의 무역항이 주로 무대로 쓰였다.
사이토 부이치, 마스다 도시오, 구리하라 고레요시, 이노우에 우메쓰구 등이 적극적으로 무국적 액션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들의 영화는 서부극, 네오리얼리즘, 누벨바그 등 서구의 영화 스타일을 자유롭게 끌어들여 기묘한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이들의 영화는 일본을 무대로 하면서도, 일본 같지가 않았다. 이 세계에서 벗어난 것 같은, 그러면서도 당시 일본인의 정서를 담은 무국적 액션영화는 젊은이들에게 대단한 열풍을 일으켰다. 또 무국적 액션영화는 홍콩과 합작하고, 한국에서 리메이크되면서 아시아 지역에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야쿠자의 세계를 다룬 도에이의 임협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닛카츠 역시 변화한다. 63년에 시작된 다카하시 히데키의 <남자의 문장> 시리즈와 와타리 데쓰야의 <무뢰. 전과> 시리즈 등은 무국적 액션의 어딘가 무정부적이며 몽상적인 느낌과 다르게 리얼하고 처절한 일본식 싸움을 보여주었다. 이런 흐름은 닛카츠 임협영화의 축으로 자리 잡았고 뉴 액션이라 불리며 사와다 유키히로, 후지타 도시야 등 신인 감독의 등용문이 되었다.
그러나 젊은 감독들의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내며 승승장구하던 닛카츠는 큰 실수를 저지른다. <육체의 문>(1964), <문신일대>(1965), <도쿄 방랑자>(1966) 등 문제작을 만들어내며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던 스즈키 세이준이 67년 <살인의 낙인>을 만들자 닛카츠는 그를 해고해버린다. 흥행이 안 되는 이상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감독의 전작인 <도쿄 방랑자>는 여전히 의리의 존재를 믿는 고리타분한 킬러의 방랑을 야쿠자영화의 틀에서 벗어나 뮤지컬,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의 기법을 활용하며 형언하기 어려운 감흥을 이끌어내는 영화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서열 3위인 킬러가 살인청부를 맡으면서 겪는 심적인 혼란과 분열을 그린 <살인의 낙인>은 <도쿄 방랑자>에서 더 나가버린다. 한마디로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영화였는데, 닛카츠는 그런 걸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닛카츠의 단견은, 일본 영화계의 침체를 예고하는 전조이기도 했다.
주변부 장르물에서 탁월한 성과 내며 저력 발휘해
일본 영화계 전체가 극심한 불황에 빠져들면서 닛카츠는 1969년에 촬영소를 매각하고, 1971년에는 제작 중지에 이른다. 도산 위기에 처한 닛카츠는 노동조합이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극약 처방을 쓴다. 고정 관객이 있는 핑크 영화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60년대에 성행했던 싸구려 핑크영화보다 서너 배의 제작비를 들이고, 닛카츠의 우수한 스탭과 촬영기재, 세트를 이용하여 고품격 에로영화를 만들겠다는 전략이었다. ‘로망 포르노’라는 브랜드 이름을 짓고 제작에 들어가지만, 기존의 유명 감독들은 핑크 영화 제작에 동조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로망 포르노는 조감독이나 시나리오작가 등 젊은 인재의 등용문이 되었고, 성공을 거둔 닛카츠는 메이저 중에서 유일하게 저예산이지만 한주에 한편꼴의 대량생산체제를 유지했다. 구마시로 다쓰미, 다나카 노보루, 소네 추세이 등 로망 포르노의 거장이 탄생했고 이케다 도시하루, 나카하라 슌, 구로사와 나오스케, 가네코 슈스케, 이시이 다카시, 네기시 요시타로 등 지금 일본영화를 이끄는 중견 감독들이 성장하는 기반이 된다. 한편 닛카츠는 <하얀 손가락의 장난>(1972), <들고양이 롯코> 시리즈(1970-1971), <오호!! 꽃의 응원단> 시리즈(1976-1977) 등 청춘영화로도 작은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80년대 들어 비디오의 보급으로 AV(Adult Video)가 등장하면서 로망 포르노가 사양길에 접어들자 닛카츠는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롯포니카’라는 회사명으로 본격적인 영화 제작에 나섰다가 실패한 닛카츠는 지지부진한 세월을 보낸다. 결국 닛카츠가 다시 힘을 얻은 것은 일본영화 전체가 부활한 21세기였다. 지금 닛카츠는 청춘영화와 액션영화 등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였던 장르영화들을 꾸준히 만들면서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영화화에도 힘을 쏟는다. 얼마 전에도 타쓰노코 프로덕션의 애니메이션 <얏타맨> <독수리 오형제> 등을 실사화한다는 발표도 있었다. 메이저로 출발한 닛카츠는 그러나 전후 새로운 일본영화를 만들면서도 다시 메이저가 되지는 못했다. 대신에 소수지만 확고한 관객이 존재하는 주변부 장르에서 탁월한 성과물들을 만들어냈다. 위기의 순간마다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여 새로운 일본영화의 흐름을 만들어냈던 닛카츠의 저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