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JIFF Daily > 제9회(2008) > 영화제소식
무자비한 염세주의자의 영화 연금술
홍성남(평론가) 2008-05-04

회고전 열리는 헝가리 거장, 벨라 타르의 영화세계

옴니버스 영화 <비전스 오브 유럽>(2004)에 수록된 단편 <프롤로그>에서 벨라 타르는 빵을 얻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이동하는 카메라로 담아냈다. 단 하나의 숏을 가진 이 5분짜리 영화가 일견 단순하거나 평범해 보이면서도 기실 그렇지 않은 것은 여기에 타르 세계의 정수라고 할 만한 것이 꽤 잘 요약되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보듯 타르의 카메라가 잡아내려 하는 것은 우선적으로는 여러 사람들이겠지만 더 나아가 그들과 어울림을 갖는 공기의 표정과 세상의 얼굴이기도 할 것이다. 아울러 흘러가는 시간 역시 주요한 포착의 대상임을 간과할 순 없을 것이다. 그 결과 타르가 빚어내는 숏 안에서 통상적으로 특별한 ‘사건’을 갖지 못한다고 간주되던 순간은 놀랍게도 굉장한 밀도를 가진 스펙터클의 순간으로 바뀌어버린다. <프롤로그>에서 우리는 타르가 행하는 이처럼 비범한 영화적 연금술을 재확인하게 된다.

‘반(反)영화’적 영화를 만든 초창기의 벨라 타르

벨라 타르

앞에서 ‘재확인’이란 단어를 쓴 것은, 우리들 대부분은 타르의 그 이전 영화들을 통해 이미 그가 거둔 미학적 성취를 머릿속에 그려놓았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탄탱고>(1994)와 그 다음 작품인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2001)로부터 많은 관심 있는 관객들은 타르의 세계가 구축된 방식에 대한 단서를 제공받았을 것이다. 물론 이 영화들이 타르의 세계의 많은 부분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그가 도달할 수 있는 고점을 보여주기도 하는 대표작들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세계의 전모에 해당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제 타르의 초기로 돌아가 보면 <사탄탱고>나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만으로 타르의 세계를 헤아렸던 이들은 적잖이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다. <사탄탱고>의 타르가 긴 호흡의 숏으로 ‘경이(wonder)의 영화’를 만드는 형식주의자이자 물리적 세계를 관찰하며 동시에 그 너머를 보고자 하는 형이상학자라면 초기의 타르는 이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타르는 스물 둘이란 아주 이른 나이에 장편 데뷔작 <패밀리 네스트>(1977)를 만들었는데(그는 이 영화를 만들고 난 다음에 영화학교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주택난을 제대로 해결해주지 못하는 시스템 아래에서 부모와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젊은 부부에 대한 영화다. 굳이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이라도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사회적 리얼리스트로 분류될 수 있는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 점이다. 이 영화를 만들 당시 타르는 (꼭 정치적이진 않더라도) 사회적인 감수성을 가지고서 가난한 사람들, 추한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바랐다고 말한 바 있다. 타르의 이런 태도는 <아웃사이더>(1980), <불안한 관계>(1982) 같은 차기작들에도 이어졌다. 이것들은 모두 타르가 마치 황폐한 현실 그 자체를 마주하고 있다는 듯한 거친 태도로 사회의 주변부에 위치한 사람들의 신산한 삶에 카메라를 가져간 영화들이었다. 타르는 이것들이 거짓말을 하는 평범한 ‘영화’와는 다른 진실한 영화이길 원했고 그런 점에서 차라리 ‘반(反)영화’로 불려야 한다고 보았다.

변화, 리얼리즘과 양식화 사이의 변증법

이 초기영화들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타르’의 영화로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은 타르가 라스 폰 트리에와는 정반대의 경로를 걸어왔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폰 트리에가 예컨대 <유로파>(1991)처럼 스타일의 과잉을 보여주는 영화에서 <백치들>(1991) 같은 ‘헐벗은’ 영화로 이동했던 것에 반해 타르는 영화적 치장을 하지 않고서 현실을 맨 얼굴을 보려 하는 영화로부터 그런 현실과 거리를 두면서 형식주의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영화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타르에 대해 비평적 관심을 가지는 평자들은 어쨌든 그의 필모그래피를 세 편의 초기 영화들과 <파멸>(1987)로부터 시작되는 이후 영화들로 양분하는 데에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한다(그리고 그 가운데에 놓인 <가을>(1984)은 형식적 실험에 대한 타르의 관심이 커졌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이행기적’ 작품으로 간주된다). 문제는, 그렇다면 타르의 세계에서 이 두 범주의 영화들이 정확히 나뉘고 대립하기만 하냐면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는 것 같다. <파멸> 이후의 영화들이 비록 초창기의 리얼리즘 영화들과 상이한 외양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것들에서도 리얼리즘의 방식이 완전히 버려진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타르는 사람들과 공간들을, 심지어 기후를 포함한 세계의 공기까지도 지극히 세밀한 터치로 그려낸다. 그러면서도 그는 리얼리즘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그 너머로 나아가려고 한다. 타르 자신의 말을 빌리면 그의 영화들에서 하늘부터 땅까지 모든 것은 그의 창조적 의지에 따라 꼼꼼하게 창조된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타르의 세계를 구축하는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찾아낼 수 있다. 그것은 세계를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태도와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의지 사이의 긴장, 다른 말로 하자면 리얼리즘과 양식화 사이의 변증법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타르는 디테일의 진실함을 기반으로 해서 현실과는 다를 수 있지만 여하튼 통일성을 갖는 세계를 영화 속에 만들어낸다고 하는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의 생각을 현대적으로 재개념화하고 있는 시네아스트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악의 존재가 원을 그리며 앞서가는 타르의 세계

여기서 다시 한 번 초기의 타르로 돌아가 본다면 그는 출발 지점에서부터 세상의 무자비한 힘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다뤘다. <패밀리 네스트>에서 슬쩍 드러나듯 그들은 시스템의 무능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가난한 주변인들을 다룬 나중 영화들까지로 시야를 넓혀보면 타르 영화 속 인물들의 비참함은 사회적 조건과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이쯤에서 헝가리의 영화학자 안드라스 발린트 코바치(언젠가 보드웰은 타르에 대한 가장 뛰어난 글은 이 사람이 썼던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의 언급을 듣는 것은 유용한 일일 것이다. 그는 타르의 영화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일궈놓은 전통이라는 맥락 안에서 논의하면서 아무도 안토니오니의 영화가 부유한 자들의 문제를 다룬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처럼 타르의 영화 역시 가난한 자들의 경제적 비참함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순 없다고 했다. 타르가 굳이 자신의 인물들을 저 낮은 곳에서 찾아낸 것은, 세상에 만연한 절망을 더 이상 가라앉을 수 없는 지점에서 보여주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을>의 서두에서 인용된 푸슈킨의 문장에 인용하자면 타르의 세계는 ‘악(惡)의 존재가 원을 그리며 앞서 가는 미지의 땅’으로 묘사할 수 있다. 타르의 인물들이 절망과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그런 무자비한 세상에 던져진 존재들이고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그런 이유로 비극적인 존재들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파멸>의 카러, <사탄탱고>의 의사,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의 야노스가 결국에는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게 된다는 것은 주목을 요한다. 파멸의 시간이 도래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세상에서 어쩌면 그런 행위야말로 추악한 세계를 그들로부터 소멸시킬 유일한 방도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눈으로만 보는 영화가 아닌 ‘감촉의 영화’

긴 호흡의 숏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타르를 논의하면서 자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테오 앙겔로풀로스, 그리고 미클로스 얀초)를 함께 언급하곤 한다. 하지만 타르 자신은 그런 비교가 그리 적절하지 못한 것이라고 본다. 타르코프스키는 신을 믿었고 그래서 항상 희망을 가졌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타르를 가리켜 ‘신성함을 벗어버린 타르코프스키’라고 묘사하기도 했는데, 무자비한 염세주의자로서 타르의 그런 면모는 <사탄탱고>의 여섯 번째 장(章)에 나오는 술집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요컨대 여기서 시간의 육중한 무게를 견뎌낸다는 것은 ‘지옥의 시간’을 통과하는 것과 동의어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 타르는 ‘모든 것이 왜 이처럼 고통거리를 밝히는 슬픈 탐사자(探査者)’(<사탄탱고>에서 이리미아스가 자신에게 하는 이 말을 고스란히 타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의 면모를 세상에 표정을 각인함으로써도 발휘한다. 그침이 없이 계속해서 내리는 비, 진흙 투성이의 황량한 땅, 그 위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서 있는 집과 대체로 어두워 보이는 그 내부, 허름한 술집 같은 요소들로 이뤄진 타르의 세계는 파멸과 타락의 기운을 나지막이 내보이는 곳인 것이다. 사실 타르가 이뤄낸 가장 큰 미학적 성취는 단지 사람의 얼굴만이 아니라 다른 물체, 공간, 빛, 그리고 시간에게도 표정과 물성(物性)을 부여해 ‘감촉의 영화’를 만들어낸 데 있을 것이다. 타르의 영화가 사고를 요하는 영화이기 이전에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는 영화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타르는 눈과 귀를 활용할 우리를 파트너로 초대한다. 이제 우리에겐 이 황홀한 초대에 정성스레 응대할 일이 남았다.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