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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시선으로 뒤틀린 욕망을 말하다

<바이브레이터> <바쿠시, SM 로프 마스터>의 히로키 류이치 감독

<바이브레이터>

<바이브레이터>는 여성영화였다. 불면증과 거식증에 시달리는 프리 라이터 레이는 편의점에서 트럭 운전사를 만난다. 그를 먹고 싶다고, 만지고 싶다고 생각한 레이는 트럭에 올라타고 함께 ‘여행’을 떠난다. 레이는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그는 친절하게 모든 욕망을 받아준다. 레이가 자신의 욕망을 말하고 충족하는 과정을 <바이브레이터>는 내밀하게 보여준다. 레이의 독백이 검은 화면 위 자막으로 뜨고, 책의 문구가 말을 걸고 라디오 소리가 허공을 메운다. 어딘가의 무선통신 주파수가 그들을 찾아낸다. 그런 작고 하찮은 것들에서, 레이는 의미를 찾는다. 먼 곳의 소리가 우연히 트럭 안으로 흘러들어오듯이, 어떤 강압이나 권위적인 질서 없이 모든 것이 평등하게 존재함을 알게 된다. 시각과 청각, 촉각으로 느껴지는 것들을 그대로 화면에 담아낸다. 그 작은 느낌들이 편안하게 느껴지고, 또 여운을 남긴다. 세상의 진짜 의미는 거대한 질서가 아니라, 그 작고 사소한 것들의 작은 울림(진동)인 것이다. 히로키 류이치에게 수많은 상을 안겨준 대표작 <바이브레이터>는 여성의 욕망을 여성적으로 드러낸 영화다.

그런데 다큐멘터리 <바쿠시, SM 로프 마스터>는 또 다르다. 바쿠시(縛師)는 묶는 사람이란 뜻이다. 성적인 흥분을 얻기 위해 결박을 하는 전문가를 일본에서는 바쿠시라고 부른다. 여성을 묶고, 고통을 안겨주면서 성적인 흥분을 얻는 다큐멘터리를 히로키 류이치가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1993년 유바리판타스틱영화제 비디오 부문 그랑프리를 받은 <마왕가>는 어린 시절의 친구를 다시 만나 폭력적이고 에로틱한 세계에 빠져드는 남자의 이야기다. 히로키 류이치는 ‘사이코 에로스’의 세계를 천착하는 감독으로도 알려져 있다. 여성영화 <바이브레이터>와 변태적인 섹스의 세계를 그린 <바쿠시, SM 로프 마스터>의 세계가 공존하는 히로키 류이치는 어떤 감독일까?

1954년생인 히로키 류이치는 아메리칸 뉴시네마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시대의 감독들처럼 일단 핑크영화로 데뷔를 했다. 1982년 데뷔를 한 히로키 류이치는 동성애를 다룬 <우리들의 시대>(1983)로 주목을 받았지만 활동무대는 한동안 핑크영화였다. 1992년 레이싱 영화 <만안 배드 보이 블루>를 만든 뒤 <마왕가> <몽마> <당신과 언제까지라도> 등 ‘사이코 에로스’의 세계를 그린 영화들로 인정받게 된다. 도쿄와 요코하마 등 도시의 공간과 풍경을 독특하게 묘사한 영상으로 ‘도시파’라는 말도 듣게 된다.

히로키 류이치는 청춘소설을 각색한 <800 Two Lap Runners>(1994)로 찬사를 받는다. <800 Two Lap Runners>는 800미터를 달리는 두 소년의 모습에, 전통적인 스포츠영화와는 달리 근성이나 땀 냄새 대신 그들의 마음속에 부는 것 같은 신선한 바람의 향기를 담아냈다. 경기에서 이기는 것보다는, 단지 달리는 쾌감을 만끽하는 젊은이들의 청결감이 한껏 드러난다. 또한 집단 스포츠와는 다른 달린다, 라고 하는 개인의 세계에 몰두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부드러운 생활>

이후 히로키 류이치는 기묘한 사랑을 하는 여성이 나오는 <도쿄 쓰레기 여자>(2000), SM소설가 단 오니로쿠의 단편을 각색한 <부정의 계절>(2000), SM이 가미된 러브 스토리 <이발소 주인의 슬픔>(2002), 3명의 남자와 애인 계약을 한 여자 이야기 <라망>(2005), 두 여성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걸프렌드>(2004), 옴니버스영화 ‘잼 필름스’의 4탄으로 여성을 주제로 한 ‘Female’의 에피소드 <태양이 보이는 장소까지>(2005), <바이브레이터>의 데라시마 시노부와 다시 만난 <부드러운 생활>(2006) 등을 만든다. 과격하고 기이한 사랑 이야기도 들어 있지만, 히로키 류이치의 영화는 언제나 여성을 중심에 두고 있다. 많은 인터뷰에서 ‘여성의 섬세한 감정을 그리는 것이 좋다’, ‘여성이 좋다’라고 반복하는 히로키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히로키 류이치는 무작정 여성을 예찬하지 않는다. 히로키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 소외된 여성들의 욕망을 진지하고 섬세하게 끌어낸다. 히로키가 ‘폭력’에 이끌리는 것은, 그 폭력이 지금 사회의 기본적인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폭력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규격화된 사랑 이외에는 이해할 수 없다. 뒤틀린 욕망도, 욕망이다. 그 뒤틀림을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히로키 류이치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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