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철학적인 SF. 이 문장을 “가장 현학적인”으로 해석해도 좋고, “가장 사유적인”으로 해석해도 좋다. 올해 부천영화제의 특별전으로 묶여서 소개되는 여섯편의 작품은 50~60년대 누벨바그 거장들의 우주적인 사색이다. 현실 정치의 담론으로 들끓던 공화국 프랑스를 풍자하고 당대의 사회를 사색하기 위해서 SF만큼 쓸모있는 장르도 드물었을 것이다. 당대의 할리우드 SF영화들이 냉전과 핵의 공포를 초보적인 특수효과를 이용한 대중영화로 반영해낸 데 반해, 누벨바그 작가들은 쓸만한 아이디어와 프랑스인 특유의 배배꼬인 풍자를 곁들인 일종의 사색영화로서 SF 장르를 곱씹어냈다. 이는 60년대 뉴웨이브 SF 운동 이후로 현대의 수많은 SF 작가와 평론가들이 SF를 Science Fiction(과학소설)이 아니라 Speculative Fiction(사변소설)이라 일컬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도 일치하는 면이 있다. 부천에서 소개되는 여섯편의 프랑스 SF 영화는, 그러므로 훌륭한 SF(Speculative fiction)영화들이라 할 만 하다. 유토피아에의 낭만적인 환상은 여기에 없다. 고다르와 트뤼포, 알랭 레네와 루이 말, 크리스 마커스와 조르주 프랑주는 공히 디스토피아의 낭만적인 망상을 슬그머니 공격한다.
‘레미 코숑의 이상한 모험’이라는 부제를 달고있는 <알파빌>은 고다르가 바라본 흑백의 디스토피아다. 고다르가 그려낸 알파빌의 모습은 조지 오웰의 <1984>와 덜 위협적인 <메트로폴리스>를 섞어놓은 듯한 전체주의 사회로, 강력한 컴퓨터 알파60이 주민들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관객이 보게되는 알파빌의 광경은 흑백으로 찍어낸 당대의 파리이자 필름 누아르의 근사한 무대이며, 60년대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설정된 현재적 디스토피아다. SF역사상 가장 시적인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의 원작을 영화화한 프랑수아 트뤼포의 <화씨 451>은 보다 적극적으로 SF의 전통에 스스로를 귀속하는 작품이다. 책이 금지된 미래사회, 주인공 몽타그의 직업은 불법적으로 나도는 책을 적발해서 태우는 ‘방화수’로, 결국은 책 읽는 소녀와 사랑에 빠진 뒤 독서가들이 숨어서 살아가는 ‘북 피플의 도시’로 탈출을 시도한다. <화씨 451>를 트뤼포의 최고 걸작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의외로 낭만적인 디스토피아 영화가 (<400번의 구타>를 제한다면) 트뤼포의 영화 중 가장 아름다운 엔딩을 가진 영화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사랑해 사랑해>는 지난 1968년 칸영화제에 출품됐으나 고다르를 위시한 혁명세대의 시위로 인해 상영기회를 놓쳐버린 알랭 레네의 걸작이다. 자살에 실패한 작가 클로드는 과학자들의 제의로 타임머신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1년전으로 되돌아가 헤어진 연인을 만나는 등 자신의 과거를 탐색해 나가던 클로드는 타임머신의 고장으로 인해 엉클어진 시간대로 떨어지고, 과거는 순서가 뒤바뀐 채 클로드를 급습한다. 알랭 레네는 순서 없는 시간을 경험하는 클로드를 통해 기억이란 무엇인가, 기억속에서 살아있는 존재란 무엇인가를 사유한다. 간략하고 구미당기게 표현하자면? <이터널 선샤인>의 누벨바그 원전이라고 일컬으면 좋을 것이다.
루이 말의 <블랙문>은 불가해한 판타지다. 인간들은 남녀로 나뉘어 전쟁을 거듭하고, 헤매이던 주인공 릴리는 유니콘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내용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루이 말이 보여주는 세계는 아포칼립스의 한 가운데 놓여진 초현실주의자의 상상이다. 벌거벗은 아이들은 사랑 노래를 흐느끼고, 주인공은 설명되어지지 않는 세계를 그저 미궁처럼 헤매이고 돈다. 누벨바그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고 설명한다면 딱 어울릴만한 영화다. 그와 동시에 (테리 길리엄의 <12 몽키스>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크리스 마커의 <환송대>는 천재 시인이 정지된 스틸로 시를 만든다면 이런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싶은 작품이다. 3차 대전으로 황폐해진 파리에서 사람들은 전쟁전의 과거로 한 남자를 보내 식량을 구해오려 한다. 인류의 운명을 짊어지고 과거로 도착한 남자는, 결국 옛 연인과 젊은 자신의 앞에서 죽는다. 시적인 나레이션과 몽환적인 이미지가 결합되어있는 <환송대>는 시간과 공간, 사랑과 정치에 대한 은유로 가득하다. 진정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