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되기까지
스무살 언저리에 김진한(33) 감독은 ‘길’에서 맴돌았다. 87년 대구의 한 사회단체에서 걸개그림을 도맡아 그렸던 그는 수시로 짱돌과 꽃병도 들어야 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대학 캠퍼스라는 ‘퇴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시대는 뭉크를 흠모했던 우울한 소년을 그렇게 만들었다. “카메라로 세상을 바꿀 수 있겠다고, 그걸 업으로 삼겠다”고 생각한 건 강제징집 당한 군대에서 처음 했다. 제대한 뒤 10만원이 채 안 되는 돈을 챙겨 무작정 상경했지만, 서울 어디에도 영화를 가르쳐주는 곳은 없었다. 홍익대 부근 선술집에서 신세타령하다 영화제작소 ‘현실’ 멤버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찌 시작했을지 모를 정도로 갑갑한 시절이었다. 그러다 ‘현실’ 작업실에 테이프 빌리러 자주 들락거리던 이현승 감독을 만나게 됐고, 92년 <그대안의 블루> 연출부로 일을 시작했다. 처음 만들었던 단편 <경멸>이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뿐 아니라 해외 단편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부터 여러 곳에서 조감독 제의가 왔지만 그는 사양했다. “서른에 감독이 되려면, 똑같은 일을 여러 번 할 여유가 없었다”고 말하는 김진한 감독은 같은 해 김성수 감독의 <비명도시>에서 여균동 감독과 공동으로 기획을 맡았고, <런어웨이> 등에서는 아트디렉터로 활동했다.
<정크맨>(가제)의 시나리오를 가다듬고 있는 지금, 그는 짬짬이 강의하러 가면 “왜 상업영화를 하느냐”는 말을 곧잘 듣는다. 단편 <햇빛 자르는 아이>에서 강렬한 색감을 맛봤던 이들이라면 우려섞인 불만을 할 만하다. 하지만 그 자신은 영화의 ‘미학적인 부분’이 아니라 ‘삶의 통속성’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고다르보다 장이모를, 베르톨루치보다 코언 형제를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클레르몽-페랑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영화제용 영화 아니냐’는 비아냥을 동료들로부터 듣기도 했지만 <햇빛 자르는 아이>는 “장편데뷔하기 전 함께할 스탭들과 미리 호흡을 맞춰본다”는 뜻이 컸다. 최성원 조명감독 등 실력있는 충무로 스탭들을 끌어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데뷔작 <정크맨>은 그의 말대로 지난 10년간 현장에서 몸으로 익혔던 모든 것을 풀어놓는 기회다.
▒어떤 영화를 만들것인가
<정크맨>은 “희생과 구원에 관한” SF영화다. 오염된 지구를 구하기 위해선 갓난아기를 제물로 바쳐서라도 종을 만들어야 하는 한 주물장이 가족의 이야기다. 여기에 기형인간들을 제거하고 건강한 신인류만을 달로 이주시켜려는 지배층과 이들에 맞서 극좌 환경단체가 싸움을 벌이는 이야기도 끼어 있다. 명확한 갈등구조와 드라마가 있지만, 정작 감독이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은 ‘사운드’다. 귀에 아른거리는 신비로운 종소리의 울림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햇빛 자르는 아이>가 “영상으로 영화적인 시간을 만들어내려는 시도”였다면, <정크맨>을 끌고 가는 건 ‘소리’인 셈이다. 본격적으로 장편 시나리오를 준비한 건 99년 9월이지만, 91년 처음 썼던 단편 시나리오가 기초가 됐다. 현재 예상하는 제작비 수준은 30억원가량으로 컴퓨터그래픽보다는 세트부터 배경까지 손으로 빚어낸 결과물로만 채울 생각이다. 제작비 마련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 대비해 그는 아예 디지털 카메라를 활용한 저예산 장편영화로 만든다는 복안도 있다. 어두운 실내 장면까지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황량한 도시의 느낌을 전해주기는 디지털이라는 매체가 적합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결과물에 대해서 책임지려면, 철저하게 프로덕션 전 과정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김진한 감독은 강성규 프로듀서와 제작도 공동으로 맡고 있다. <정크맨>은 2월 중순이 되면 투자사를 비롯해서 캐스팅 등 대강의 윤곽이 그려질 예정이다.
▒<정크맨>은 어떤 영화
그리 머지않은 미래의 지구는 회생불가능할 정도로 오염되고 파괴된 상태다. 지배계층은 기형인간들을 말살시키고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인류를 복제해서 달나라의 신도시로 이주시키려는 신인류 정책을 세운다. 이에 지구를 소생시키고자 하는 지구권리군은 테러를 통해 맞선다. 한편 에밀레 신화의 신종을 만들어 현실의 인간들을 구원하려는 정크맨 가족이 있다. 정크맨은 청동과 여자를 구해오라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길을 떠나고, 우연히 위기에 처한 사라를 구한다. 사라는 정크맨의 아이를 갖게 되지만 자신의 아이가 희생물로 바쳐질 운명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제의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려는 정크맨의 아버지와 아이를 보호하려는 사라, 둘 사이에서 정크맨은 갈등한다. 여기에 주물소의 깨끗한 물을 탈취하려는 이들, 대통령의 딸인 사라를 납치해 지배계층과 협상하려는 이들이 사건에 끼어든다.
이영진 기자 ant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