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댄스영화제가 이래저래 침체된 가운데 신이 난 곳은 바로 올해 새로운 야망을 불태우기 시작한 안티-선댄스의 원조 슬램댄스영화제. 올해부터 슬램댄스는 선댄스영화제 메인관인 이집션 극장 건너편의 트레져마운틴호텔에서 메인스트리트에서 차로 5분가량 떨어진 실버마인이라는 널찍한 옛 은광터로 둥지를 옮겼다.
일단 새로운 슬램댄스영화제가 열린 실버마인이란 곳은 장소자체가 명물이다. 은을 채취하던 광산기슭의 공장내부를 거의 실내 놀이공원을 연상시키는 자유분방하면서도 인테리어가 빛나는 공간으로 개조한 것이다. 곳곳에 소파와 컴퓨터, 각종 조형물들을 늘어놓고 심지어 마사지센터까지 설치해 한번 찾은 관객은 이른바 ‘죽때리면서’ 계속 영화보고 시간을 보내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새로 마련한 200석 남짓 주상영관도 예전에 비하면 일취월장. 선댄스쪽의 보이지 않는 방해공작(?)인지 파크시티의 운수회사들이 도통 협조를 해주질 않아 10인승 밴 한대로 셔틀버스를 대신 할 수밖에 없는 악조건 속에서도 일주일 동안 거의 1만여명이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올해 슬램댄스를 돋보이게 했던 것은 참신한 프로그래밍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개막작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마크 레빈의 <브루클린 바빌론>의 월드 프리미어를 감행한 것을 비롯, 미국독립영화뿐 아니라 아시아, 유럽쪽으로 문호를 넓히는 선댄스와의 차별화전략이 주효. 이렇듯 내용면에서도 야심찬 행보를 내딛은 슬램댄스가 내세운 올해의 카드는 바로 한국영화. “올해 슬램댄스는 김치페스티벌이다”라고 책자에 소개하고 있을 정도였다. 일찌감치 분위기를 띄운 덕분인지,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와 김태용, 민규동 감독의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는 최고의 인기상영작으로 손꼽혔는데, 특히 <플란다스의 개>에 대한 반응이 가히 폭발적. 관객이 시종일관 발을 구르며 헤드뱅잉까지 하며 폭소를 터뜨렸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역시 “한국판 <천상의 피조물>”이라거나, 소피아 코폴라의 화제작 <처녀자살소동>들과 자주 비유되며 아주 좋은 반응을 얻었다.
결국 27일 열린 경쟁부문 시상식에서는 <플란다스의 개>가 편집상,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가 촬영상을 수상,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대상을 차지한 몬티스 매컬럼의 <하이브리드>는 평생 옥수수 품종개발에 집착했던 자신의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시적인 영상과 독특한 애니메이션이 잘 어우러진 작품으로, 무려 6년 동안의 제작기간을 거쳤다고 해 화제가 되었다.이제 슬램댄스는 단순한 안티선댄스라는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틈새를 찾아나가려는 움직임을 본격화,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데, 4년 전부터 ‘길거리 스크리닝’이라고 하여 칸영화제, 스톡흘름영화제, 독일각지 영화제를 돌며 자체적으로 제작한 단편들을 상영, 국제 홍보도 게을리하지 않는 모습.
그뿐 아니라 슬램댄스는 미국배급에 있어서도 상당히 무시 못할 플랫폼으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매년 2∼3작품씩은 미국 전역에 배급돼 왔는데, 여지껏 가장 성공적이었던 작품이 1998년 상영되어 폭스 서치라이트에서 배급한 . 이 때문인지 초창기엔 10편 정도 수급하기도 어렵던 상황이 이젠 전세계에서 200여편씩 출품신청이 쇄도한다고 한다. 외국영화로서는 지난해 부천영화제에서 인기를 모았던 독일영화 <투발루> 역시 슬램댄스를 통해 미국 및 세계배급의 가능성을 열었던 사례. 아직은 낙천적으로만 보이는 영화게릴라들의 소박한 잔치도 점점 그릇을 키우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