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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시아 영화의 새싹들
최하나 2006-10-12

올해로 2회 맞은 아시아 영화 아카데미, 첫 촬영 현장을 가다

“사운드 레디? 카메라 레디? 액션!” 울룩불룩 솟아난 바위 언덕을 에둘러 끝도 없는 바다가 펼쳐진다. 파도와 목탁의 울림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이곳은 ‘수상법당’이라 불리우는 해동 용궁사. 아담한 정취를 풍기는 대웅전 옆으로, 깎아지른 바위 끝에 위태로이 자리잡은 카메라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인다. 가깝게는 일본에서부터 멀게는 이라크까지, 19개국의 나라에서 찾아온 참가자들. “리틀 빗 레프트, 레프트. 굿.” 어눌하지만 거침없는 영어로 소통하는 이들을 한데 이어주는 것은 AFA, 아시아 영화 아카데미다.

올해로 2회째를 맞는 AFA는 아시아 지역의 예비 영화인들이 기성 감독들과 함께 단편영화 제작, 마스터 클래스, 워크숍 등의 프로그램을 3주간 진행하는 부산 영화제의 영화 교육 프로젝트다. 작년 초대 교장을 맡았던 허우 샤오시엔 감독에 이어 올해는 임권택 감독이 수장의 자리에 올랐고, 다레잔 오미르바예프 감독과 다카마 켄지 촬영감독, 배창호 감독, 박기웅 촬영감독이 지도 교수로 초청됐다. AFA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단편영화 제작이다. A팀과 B팀으로 나뉘어진 24명의 참가자들에게 최종으로 주어진 과제는 팀별로 각각 한편의 단편영화를 완성해내는 것. 이날 첫 촬영에 들어간 양팀은 각자의 로케이션으로 이동했고, 탁 트인 바닷가를 무대로 삼은 것이 바로 B팀이다. 연출, 촬영, 사운드 등 각자의 역할에 골몰한 12명의 팀원들은 가만히 서 있기조차 힘겨운 경사면에서 성큼성큼 능숙한 걸음으로 움직인다.

단편 한편 연출 위해 6명의 프로 감독이 동원

“배우는 조금만 앞으로 나와주세요. 네, 지금이요.” 무전기를 손에 쥔 스탭이 지령을 전달한다. 카메라의 렌즈가 응시하는 것은 바다 건너편 절벽 끝에 서 있는 한 여인. 정확히 말하면, 필리핀에서 찾아온 할머니의 환영이다. B팀의 작품 <소명>은 한국으로 건너온 필리핀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다. 그는 한국에서 정착하기를 원하지만, 어느날 꿈 속에서 가업인 주술사의 길을 계승할 것을 명하는 아버지의 환영을 만나고, 이후 계속해서 기묘한 환각에 시달리게 된다. 시나리오를 쓴 것은 필리핀에서 온 참가자 고줌 크리스토퍼. 마침 이날 촬영분의 연출을 담당하게 된 그는 모니터 앞에 바짝 붙어 줄곧 고민에 빠진 표정이다. 제자를 독려하듯 그의 양 옆에는 B팀을 책임질 2명의 지도교수가 앉아있다. 바로 박기웅 촬영감독과 다레잔 오미르바예프 감독이다.

<소명> 촬영현장

“저기서 뭐하는 거야? 빨리 빠지라 그래!” 야구 모자를 꾹 눌러쓴 다레잔 감독이 다소 느긋하게 앉아 모니터를 응시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박기웅 촬영감독은 적극적으로 현장을 지휘하는 스타일이다. 배우를 둘러싼 스탭들이 화면 밖으로 좀처럼 나가지 않자 그는 이내 벌떡 일어나 한국어로 호통을 친다. 뜻은 이해하지 못해도, 분위기를 감지한 탓일까. 긴장감 때문인지 연출자가 잇달아 실수를 저지른다. 후반 작업시 여인의 모습에 필리핀 전통 주술을 더빙해 넣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촬영을 해야 하는데, 30초도 지나지 않아 컷을 불러버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여유를 두지 않고 촬영을 하면 나중에 편집을 할 수가 없어. 액션을 외치고 나서 최소한 5초 정도는 마음속으로 세고 나서 들어간다고 생각해.” 박 감독이 또박또박 명쾌한 목소리로 가르침을 전한다. 지난 10여일간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쉴새없이 진행해 온 교수와 참가자들이지만, 가장 생생한 학습은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법. 지도교수의 입에서 말 한마디가 흘러나올 때마다 학생들은 귀를 세운다.

“단편영화 한편의 연출을 위해 6명의 프로 감독이 동원되는 경우가 또 어디 있겠나. 이 정도로 모든 것이 갖춰진 여건에서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은 영화를 공부하는 모든 이들에게 정말 큰 행운이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B팀에서 프로덕션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는 얀 스탠은 AFA가 ‘놓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에게 AFA는 “많은 경험은 없지만, 잠재력을 가진 이들이 그 능력을 펼칠 수 있는 돋움대”와도 같다. 아침부터 자정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스케줄에 진이 빠질 법도 하건만,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지치기보다 즐거워 보이는 것은 그 같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컷! 오케이~!” 감독의 사인이 떨어짐과 동시에, 4시간여에 걸친 오전 촬영이 어느새 막을 내린다. “내 팀 데리고 하는 것보다 10배는 더 힘들어.” 자리를 털고 일어난 박 감독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지만 “첫날이라 아무래도 많이 헤매는 것 같다”는 말에는 100% 동의하지 못한다는 표정이다. “시간을 봐. 정확하잖아. 정말 스케줄대로 딱 맞춰서 끝낸거야”라며 살짝 미소 짓는 그의 표정에서 팀원들을 향한 은근한 애정이 묻어난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창문에 행인들 반사되지 않는지 확인해 주세요!”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 자리한 레스토랑 <일 마레>에서는 A팀의 촬영이 한창 진행중이다. 좌석에 앉아 유리창 밖을 응시하는 여자는 스푼을 들어 커피를 휘젓기도 하고, 턱을 괴기도 하면서 저 먼 곳 어딘가를 향해 눈길을 던진다. A팀이 제작중인 작품은 <토끼들은 모두 다 춤출 수 있어>.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여자가 연인과 헤어지고 홀로 방황한다는 간략한 줄거리의 이야기로, 내러티브에 의존하기보다는 행간의 미묘한 정서를 담아내는 것이 중요한 작품이다.

<토끼들은 모두 다 춤출 수 있어> 촬영현장

“시선을 이쪽으로 둬야지.” 현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배창호 감독의 존재다. 유리창을 손으로 짚어가며 여배우에게 시선의 방향을 꼼꼼하게 지시하던 배 감독은 이윽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 배우 옆에 앉는다. “그때는 참 공허했었지, 하는 느낌 있잖아. 그런 기분을 가지고 한번 가봐.” 연인을 대하듯 배우에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배 감독과 콤비를 이루는 것은 A팀의 또 다른 지도교수인 다카마 겐지 촬영감독. 카메라 옆에 바짝 붙어 촬영을 지휘하다가도 어느샌가 노출계를 목에 걸고 현장을 누비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고개를 너무 많이 든 것 같다.” “시선 방향에 누군가가 앉아있는 게 좋겠다.” 배 감독과 켄지 감독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참가자들 역시 콘티를 손에 쥔 채 분주히 의견을 주고받는다. 여자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하는 것은 색색깔의 풍선들. 시나리오 상에는 풍선 장수가 실수로 풍선들을 놓치는 설정으로 되어있지만, “그냥 놓친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어색하다”는 한 참가자의 말이 도화선이 되어 토론이 벌어졌다. 풍선에 달린 끈을 미리 살짝 끊어놓아야 한다, 아이를 동원해 풍선을 날려 보내자, 선풍기를 이용해야한다 등 온갖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온다. “첫 촬영이라고 어제까지만 해도 팀원들이 긴장을 많이 했는데, 다들 잘 해주는 것 같다. 사실 너무 애써서 잘하려 하기보다는 편안한 마음을 갖는 게 좋다.” 배창호 감독은 이번 프로젝트가 어디까지나 “배우는 과정”임을 강조한다. “나는 의견을 제시해 줄 뿐이고 결정하는 것은 학생들의 몫이다. 팀워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유창한 영어와 한국어를 오가며 현장의 활력을 돋우는 재미교포 박우기, 분위기가 경직될 때마다 능청스레 농담을 던지는 카자흐스탄 참가자 아르누 등 팀원들은 한눈에도 허물이 없다. “영화라는 하나의 목표가 있기 때문에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런 자리가 아니라면 평생 어디서도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지만, 이젠 커뮤니케이션의 갭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다.” 연출부에서 콘티를 맡은 니가는 “우리 팀의 작품은 감정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 다국적의 친구들이 모여 작업하는데 딱 알맞다”며 칭찬을 늘어놓는다. 그의 옆에서 장난치듯 야유를 보내는 것은 이라크 출신으로, 베를린 영화제 수상 경력을 가진 자노. “솔직히 모든 이들의 감정에 호소할 만큼의 보편성은 부족한 것 같다”며 잠시 쓴소리를 토해내던 그는 곧이어 AFA에 대한 애정을 슬며시 털어놓는다. “참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믿을 수 없이 행복했다. 진짜 프로의 세계라는 것을 하루하루 배워가는 중이다. 프로그램이 모두 끝날 때쯤엔 자신감과 확신을 갖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풍선이 하늘로 날아가고 OK사인이 떨어지자, 팀원들 사이에선 기다렸다는 듯 박수가 터져 나온다. <소명>, 그리고 <토끼들은 모두 다 춤출 수 있어>. 참가자들의 이름으로 제작될 두 편의 단편영화는 이후로도 며칠간의 촬영과 편집, 후반 작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첫 촬영은 단지 첫 발을 내딛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현장을 달구어놓은 그들의 열정은 이미 하나의 결실을 이루어낸 것이 아닐까. 24명의 참가자들이 빚어낼 두 작품은 영화제 폐막 하루 전인 10월19일 해운대 메가박스의 스크린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사진 김승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