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영화라면 빼놓지 않고 봐왔던 사람, 특히 ‘건담’ 시리즈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건담~ 건담~ 우주의 보라매~’라는 노래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만화영화 주제가의 대부, 마상원 작곡이 작곡하고 김국환이 부른 노래가 충격적이긴 했지만, MBC에서 10여 년 전 어린이날 특집으로 방영한 <기동전사 건담 0083>(이하 0083)은 국내 방송 사상 최초로 안방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건담’으로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이다.
사실 <0083>(1990)은 역사적인 ‘퍼스트 건담’(<기동전사 건담>(1979))과 그 후속작인 <기동전사 Z건담>(1985) 사이의 내용을 담은 OVA 시리즈로서, 건담의 창조자인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 등 오리지널 스탭들이 빠진 대신 건담 마니아들로 구성된 신진 스탭들이 당시 제작을 맡았던 작품이다. 비록 오리지널 시리즈 이상의 독창성을 갖추진 못했으나, <카우보이 비밥>으로 유명한 와타나베 신이치로와 프라모델 디자인으로도 명성을 떨치는 가토키 하지메 등 걸출한 제작진들 덕분에 13부작 전체가 높은 퀄리티를 보이면서 건담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수작으로 완성되었다.
특히 건담을 탈취한 지온군의 영웅 아나벨 가토의 카리스마가 폭발하는 10편과 연방군의 거대 병기 ‘덴드로비움’의 박력이 압도적인 마지막 2화는 극장 애니메이션 수준의 뛰어난 작화로 지금도 놀라움을 안겨주고 있다. 실제로 <0083>은 ‘지온의 잔광’이라는 부제를 달고 일본에서 극장용으로 재편집되어 상영되었는데, 국내에서 방영된 것은 바로 그 버전이었다. 당시 지나친 편집으로 인해 여주인공 니나의 배신(?)이 너무도 생뚱맞게 느껴졌던 이들도 많았으리라 생각지만 원래의 OVA에서는 충분히 납득할만한 복선이 마련되어 있다.
어찌됐건 제작된 지 15년도 넘은, 이제는 구닥다리로 불릴 법도 한 <0083>이지만 팬들의 꾸준한 지지와 극장판으로 다시 돌아온 <Z건담>의 흥행에 힘입어, 일본에서 리마스터판 DVD로 재출시 되었다. 이전 출시작에 비해 현격히 향상된 영상과 새로이 리믹스한 5.1 사운드가 출시 이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모았는데, 과연 대단한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영상의 경우 디지털 작화의 최신 재패니메이션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원판 셀화의 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디테일이 살아있어 완성도 높은 작화의 매력을 한껏 살리고 있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음향이다. 새로이 사운드를 입힌 주제가부터 심상치 않더니만 작품 전체에 걸쳐 영상을 위협할 정도의 무시무시한 소리를 들려준다. 초반 지상전에서 펼쳐지는 모빌슈츠들의 전투에서는 그야말로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충돌음이 마구 뿜어져 나온다. 빔샤벨끼리 맞부딪치는 파열음과 미사일 등의 폭발소리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박력 만점이다. 음향의 분리도는 과하다 싶을 만큼 정확해서 인물들의 위치에 따라 문 여는 소리,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이 다르게 들려온다. 이 같은 소리의 향연은 우주공간에서의 전투에서 더욱 압도적으로 들려오는데, 모빌슈츠의 파워풀한 부스터음과 빔라이플 공격 등이 하나같이 위력을 담고서 공간을 휘감는다. 이 정도면 리마스터링한 값어치를 충분히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음향을 새로 입히기 위해 과거의 성우들을 다시 불러 목소리를 재녹음한 것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작품에 애착을 가진 팬들로서는 원래의 연기와 조금이라도 다른 것을 쉽게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번 DVD 녹음을 위해 다시 모인 세 주연 성우들의 음성해설(1화)을 들어보면 조금 생각이 바뀌게 될지도 모르겠다. 가토 역의 오츠카 아키오를 비롯해 호리카와 료(코우 역), 사쿠마 레이(니나 역)는 예나 지금이나 실력을 인정받는 일급 성우들이다. 그들은 15년 전보다 한층 객관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녹음에 임했다고 말한다. 당시에는 영상이 완성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목소리만 녹음하다보니 작품에 대한 이해도 또한 낮았으나 지금은 캐릭터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가능했다고 이야기한다.
10화에 수록된 또 다른 음성해설에는 이마니시 타카시 감독과 메카닉 디자이너 이즈부치 유타카, 그리고 <0083> 프라모델을 제작했던 키시야마 히로후미가 작품에 대해 보다 디테일한 정보를 전달해준다. 25분 정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다양한 말들이 오고가는데, 5.1채널 작업에 관한 이야기, ‘덴드로비움’의 탄생 비화, 또 다른 건담 시리즈인 <0080>과 <F-91>의 프라모델에 관한 일화가 줄을 잇는다. 최근 개봉한 <Z건담>과 겹치는 등장인물 이야기, 퍼스트 건담에 대한 오마주 등 건담 팬으로서의 애정이 녹아있는 해설이기도 하다.
나머지 부록으로는 일본 애니메이션 타이틀에 빠지지 않고 존재하는 논 크레디트 오프닝과 엔딩 모음이 있으며, 악역이지만 컬트 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인기 캐릭터 ‘시마’의 과거를 엿볼 수 있는 단편 애니메이션 ‘우주의 부유’가 수록되어 있다. 이 부록들 역시 모두 5.1 채널 음향을 지원한다.
최근 일본에서 출시된 극장판 <Z건담>을 비롯해서 ‘건담’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DVD 중에서 단연 최강의 사운드를 들려주는 타이틀이다. ‘우주의 보라매’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사람, 5.1 채널 환경을 갖춘 건담 팬이라면 놓치지 말아야할 타이틀이라고 권해주고 싶다. 일체의 자막도 수록되지 않은 일본판 DVD라는 것이 아쉬울 따름인데, 시장 여건상 아직까지 ‘우주세기 건담’이 나오고 있지 않는 것이 국내 현실이지만 언젠가 국내판 DVD로 접해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