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월요일 밤 10시55분
뜨거운 여름 수박장수 아저씨가 건네는 삼각뿔모양의 ‘맛보기’수박 한쪽. 드라마도 이 수박과 같아서, 사돈의 팔촌이 애낳은 소식까지 시시콜콜하게 보여주는 연속극보다 가끔은 삶의 단면만을 감질나게 잘라 비추는 단막극이 더 매력적일 때가 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하기 직전까지, 범상치 않은 어젯밤 꿈이야기,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그쪽’씨와 ‘이봐요’양. 기껏해야 한, 두명의 주인공들이 나와 그들의 하루나 한달, 혹은 기억의 한때를 보여주는 게 고작이지만 단막극은 가끔 16부작 미니시리즈보다 더 찡한 감동을 주기도 하고, 50부작 대하드라마보다 더 강한 울림을 남기기도 한다.
▣4년 만에 부활한 SBS 단막극
그러나 이런 단막극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TV만 하루 온종일 보는 ‘테순이, 테돌이’가 아닌 다음에야 맘에 드는 단막극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혹 챙겨봐야지 하는 마음이 있어도 잠시 딴일을 하다보면 어느새 끝나 있기도 하고, 특별한 날 우연히 보지 않으면 웬만해선 재방송도 잘 안 해준다. 사실 그런 게 단막극이다. 아무리 예술합네 기를 쓰고 만들어도 볼 사람은 보고 못 볼 사람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 혼신을 다해 연기해도 연말 연기대상엔 후보로도 못 오르고 제대로 된 CF 하나 안 들어오는 것. 몇날며칠 홍보해도 30% 시청률은 꿈도 못 꾸는, 그런 게 단막극이다.
그런데 SBS는 무슨 배짱인지, 2001년 1월부터, 그것도 MBC 초특급막강 성인시트콤 <세친구>가 방영되는 월요일 밤 11시, <오픈드라마- 남과 여>(기획 구본근 연출 김종혁, 손홍조, 김진근, 고경희, 이용석, 조남국, 한정환)라는 새로운 드라마를 편성했다. 제목만 듣고는 금방 감이 잡히지 않는 이 드라마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다룬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회마다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종의 단막극이다. 이 말을 다시 풀자면 97년 7월, 창대하게 시작했으나 7개월 만에 미비하게 끝난 이후 SBS 단막극이 4년 만에 부활했다는 뜻이 된다. 하고 많은 드라마 포맷 중에 단막극이 부활한 것이 무슨 큰일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리고 공영방송을 부르짖지도 않고 어느 각도로 봐도 ‘상업방송국’임이 분명한 SBS가 자선사업도 아니고 한물간 단막극이란 포맷을 무덤 속에서 다시 끌어내온 사연은 무엇일까.
▣날 때부터 천덕꾸러기는 아니었다
사실 대한민국 방송사에서 단막극이 날 때부터 천덕꾸러기는 아니었다. 1980년 12월, 김동리의 <을화>를 시작으로 한 KBS 이 현대사에 길이 남는 소설들을 원작으로 하여 ‘TV로 읽는 소설’시대를 열었다면 83년부터 시작된 MBC <베스트셀러극장>은 그보다 현대적인 문학작품들을 영상화하며 기존의 홈드라마에서 탈피해 좀더 세련된 영상과 간결하면서 함축적인 대사 등으로 젊은이들과 식자들에게 어필했다. 말 그대로 <베스트셀러극장>이 ‘예술’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이름있는 영화판 감독들이 TV로 모여들고, 파격적인 제작비지원과 필름으로 찍어 한회한회가 그야말로 영화 같은 드라마를 지향하던 시절이었다. 이후 황인뢰 등와 같은 스타PD를 배출해내기도 했던 <베스트셀러극장>은 때로는 참신한 신인배우를 만날 수 있는 기회로, 데뷔기회를 찾던 드라마 작가 지망생들에겐 입문의 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타 드라마보다 훨등히 높은 제작비에 연속성이 없어 고정시청률 유지가 힘들고, 늘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피를 수혈해야만 그 싱싱함이 유지될 수 있는 단막극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87년 이 막을 내리는 데 이어 89년에는 <베스트셀러극장> 역시 6년간의 여정을 끝냈다. 이후 KBS는 <드라마게임>에 이어 <테마드라마> 등으로 단막극의 생명을 이어갔고 MBC는 91년 <베스트극장>으로 과거의 영광을 찾으려 했지만 몇몇 수작들을 제외하고는 ‘예전만 못하다’는 평을 듣기 일쑤였다. 이중 <여자를 말한다>는 단순히 펑퍼짐한 단막극의 범위를 ‘여성 문제’라는 소범위로 좁혀 단막극이 나갈 수 있는 제3의 방향을 제시하는 듯했으나 오래지 않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그러던 중 97년은 단막극에서는 제2의 도약기였다. 아트홀에서의 사전시사회를 여는 등 ‘영화 같은 드라마’를 표방하며 시작한 SBS 는 기존 단막극에 비해 개인에 대한 탐구나 두 인물의 관계에 대한 좀더 깊은 접근을 시도했다. 또한 10년 만에 부활한 KBS의 <신TV문학관>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작비(편당 1억원에서 3억원)와 우수한 제작인력을 영입하여 더 양질의 단막극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도약’은 안타까운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이들의 쇠락은 더욱 빨리 다가와 는 시청률 저조 등을 이유를 7개월 만에 문을 닫았고 <신TV문학관>은 <길위의 날들>(극본 김옥영 연출 김홍종)이 이탈리아방송대상을 수상하는 경사를 뒤로 한 채 단 5편을 제작하고 사라졌다. 2001년 현재 <베스트극장>은 그나마 과거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고 지난해 봄부터 다시 시작된 은 ‘양보다 질’기치 아래 비정기적으로 편성, 한해를 통틀어 단지 3편이 방송되었다. 이는 정규적인 프로그램 형태라고는 볼 수 없고 결국 KBS 단막극의 명맥유지는 <드라마시티>나 <부부클리닉-사랑과전쟁> 등이 대신해 주고 있다.▣실험과 훈련, 그 시작을 기대하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 시작하는 SBS <…남과 여>까지 방송사들이 계속해서 단막극을 선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좀더 양질의 드라마를 보고 싶어하는 시청자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면 너무 속보이는 핑계다. 현실적으로는 제작진의 요구가 크다. 방송사는 해마다 신입사원을 뽑고, 새로운 연출부는 늘어나는 데 비해 굵직굵직한 시리즈물은 안전한 중견PD나 (외주제작비율을 맞추자면) 유명 외주PD들 차지기 일쑤다. 그러다보니 조연출들이 한창 제작의욕이 불탈 시기에 입봉기회도 놓치고 밤새 스케줄표만 짜다가 늙어버린다는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제작진에서는 단막을 편성해서 한시라도 빨리 입봉의 기회를 주자는 요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또한 단막극의 편성은 방송사가 제작인력을 모두 쥐고 있는 현 시스템이 떠안아야 되는 양질의 제작 인프라 육성의 의무를 대신해 주기도 한다. PD들에겐 시리즈물에서는 시청률 부담으로 해보지 못했던 다양한 연출시도나 실험을 해볼 수 있는 학습장으로, 촬영스탭들에겐 보통 스튜디오 원, 투, 스리의 고정된 샷에서 탈피해 야외의 빛과 앵글을 주무를 수 있는 연마장으로 단막만큼 좋은 훈련장은 없다. 신인작가들에겐 등용문이지만 과다한 작업량과 무리한 방영 연장 등에 소모품처럼 탈진하는 기성작가들에게도 단막은 좋은 재충전의 기회다. 또한 가뜩이나 주연급 배우들을 영화판에 뺏긴 방송사가 쏟아져 나오는 신인연기자들을 테스트하고 훈련시키는 데도 단막은 10부가 넘어가는 시리즈물보다 부담이 덜하다. 이러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지적한 대로 단막은 늘 높은 제작비, 낮은 시청률, 소재고갈, 제작인력난에 허덕이고 있다. 시청률과 경제성이 제1의 미덕인 방송사에서 무조건 ‘단막극은 필요하다’는 당위성만을 주장하거나 편성의 더 넓고 거시안적 아량만을 기대한다면 무리가 있다. 단지 몸에 좋다고 먹기 싫은 쓴약을 억지로 삼킬 시청자들은 없다. 문제는 단순히 ‘단막극’이 아니라 ‘어떤 단막극’이냐에 대한 고민일 것이다. SBS의 새 단막극 <…남과 여>의 운명 역시 그 고민의 선도에 달렸다.
백은하 기자 lucie@hani.co.kr
▶<오픈드라마- 남과 여> 김종혁 PD 인터뷰
▷"사람들이 '단막지왕'이라 부른다."
<오픈드라마- 남과 여>의 1화부터 4화까지를 연출하는 첫 번째 주자 김종혁 PD. SBS 공채 2기로 입사해 70분 드라마 <사랑한 후에>로 입봉한 김종혁 PD는 70분 드라마 <수취인없음> <토큰박스> <유치원버스를 기다리는 아빠>, TV영화 러브스토리 <메시지> <오픈 엔디드> <미스 힙합 미스터 락> 등을 연출했다.
-단막극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4화까지 모두 연결고리가 있다.
=원래 4부작으로 준비하고 있던 시놉이었다. 4명의 주인공이 교차하지만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완결된 구조를 가지고 있고, 어차피 남녀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 <…남과 여>와 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참여하게 되었다. 5화부터는 다른 PD들이 준비하고 있는데 말 그대로 ‘단막’이 될 것 같다.
-어떤 시도를 해보고 싶었고,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나.
=형식면에선 지금까지 시청률 때문에 늘 엉켜버리게 마련인 시점과 관점을 고정시켜보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 하려는 이야기가 누구의 입을 통해 표현되고 있는가가 흔들리면 드라마 전체가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이야기엔 어린 여자에게 끌리는 30대 중반의 남자, 사랑에 미쳐서 자신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는 어린 여자, 유부녀가 된 옛사랑에 집착하는 남자, 실연하고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는 여자 이렇게 4명이 나온다. 사랑이란 것이 늘 상처를 주고받고 해도 또다시 누군가를 만나지 않나. 비록 또다른 상처를 가져온다고 할지라도. 결국 하고 싶었던 건 그 얘기인 것 같다. 사랑은 다시 온다는 것.
-TV드라마답지 않게 주인공들이 잠자리를 같이하는 장면이 빠지지 않더라.
= ‘너무 야하다’ ‘가족들이 보기 민망하다’는 말도 하더라. 하지만 그간 방송드라마에서 의도적으로 무시되어오고, 절대적으로 보호돼온 ‘성’이라는 부분에 대해 이번 드라마를 터닝포인트로 삼아 본격적으로 다뤄보고 싶었다. 초등학생들도 아니고 손만 잡는다고 사랑에 빠진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밤 11시대라 큰 부담도 없었고 성인 ‘남과 여’의 이야기에서 성적인 끌림이 터부가 된다면 핵심이 빠진 이야기 같아서 싫었다.
-그간 단막극들의 행로를 보건데 <…남과 여>는 생명력이 있다고 보나.
=사실 단막극은 사장된 포맷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이미 시청자들의 시청패턴이 16부작이나 50부작의 연속드라마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패턴을 바꾸기란 일종의 모험이다. 제작진들도 구태의연한 단순재상산에 익숙해서 세상의 변화를 잘 못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드라마의 형태나 내용 자체에서 변신의 의지를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하느냐가 관건이다. 또한 캐스팅 퀄리티를 유지하는 것이 드라마 퀼리티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 같다.
-입봉 이후 쭉 단막극만 해왔다. 단막극에 특별한 애정이 있나.
=사람들이 ‘단막지왕’이라고 부를 지경이다. 단막을 좋아하고 필요성도 느낀다. 연속극에 비해 PD의 연출영역이 보장될 뿐 아니라 자기색을 표현하기에도 좋은 기회다. 또한 전체 극을 컨트롤하고 조망할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 같다. 후배들에게도 되도록이면 단막극으로 입봉하라고 권하고 싶다. 대본의 장점과 단점을 가려낼 기회도 되고, 기승전결에 대한 감을 익히기에도 좋다. 방송사가 단순히 송출이 아니라 콘텐츠를 생산해내는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 한, 단막극은 필요한 포맷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회사에서 미니시리즈나 연속극을 안 시켜주니까 단막만 한 거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