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이었어요. 당시 KBS에선 올림픽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상당히 다양한 나라의 영화들을 특집 시리즈로 선보인 적이 있습니다. 그중 두개가 기억납니다. 하나는 성녀로 추앙받는 소녀에 대한 필리핀영화였고, 다른 하나는 지금 이야기하려는 퀘벡영화 <안느 트리스테>(Anne Trister)였지요. 당시 방영제목은 <안느 트리스터>였을 거예요. 영어에서 중역하다 발생한 실수였겠지요. 이 영화는 1년인가 2년인가 뒤에 EBS 교육방송 일요일 낮 영화시간에 재방송되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재방송을 보았던 모양입니다.
<안느 트리스테>는 아버지가 죽은 뒤 고향 몬트리올로 돌아온 유대인 미술학도 안느 트리스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가 마련해준 창고에 벽화를 그리고 아동심리학자인 친구 알릭스와 사랑에 빠집니다.
특별히 기억해야 할 영화 같지는 않죠? 나른한 일요일 오후에 별 생각없이 영화를 보았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영화일 수도 있었습니다. 영화에 살짝 숨어 있는 프랑스어권 유대인들의 정서는 완전히 닿지 않았고, 더빙 번역은 알릭스를 안느의 ‘언니’로 고쳐서 영화의 동성애적 요소를 지워버렸으니까요(하지만 알릭스와 안느의 키스 신은 용하게도 그냥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그처럼 저와 같은 사람들의 기억에 강하게 각인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구체적인 내용 때문은 아니었어요. 우리가 그 영화를 머리로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린 왠지 모르게 이 침울한 얼굴을 한 유대인 화가의 내면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일단 우린 안느가 그린 그림을 통해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안느가 창고벽에 등사기를 켜놓고 떠다니는 의자들을 그려낼 때(영화는 안느의 벽화가 초안부터 거의 완성단계에 이를 때까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녀를 예술가로서 그냥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안느가 그린 의자들이 그처럼 서글프게 느껴진 것도 그 때문이었겠지요.
안느의 그림들만큼이나 우리를 매혹시켰던 것은 이 영화의 주제가처럼 쓰였던 클로드 메시아의 <왼손으로>라는 노래였습니다. 무엇보다 가사 때문이었어요. 대충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였답니다. “나는 왼손으로 너에게 편지를 써, 왼손은 권력도 원하지 않아….” 늘 공연한 소외감을 느꼈던 당시 제 나이 또래 아이들에게 오른손잡이의 세상에서 서툰 왼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 노래는 굉장히 맘에 와닿았답니다. 나중에 이 노래는 모 만화가의 단편에 그대로 인용되기도 했는데, 전 그분 방 어딘가에 10년 묵은 <안느 트리스테> 비디오 녹화본이 숨겨져 있다고 100%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정말로 오래 전 일입니다. 전 이제 이 영화의 감독 레아 풀과 그녀의 다른 작품들에 대해 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 영화를 본다면 감상적인 기억을 극복할 자신이 있습니다. 문제는 영화를 구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죠. 그 결과 <안느 트리스테>는 여전히 제 기억 구석에 감상적인 ‘추억의 영화’로 남고 말았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것도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에 대한 10년 전의 감상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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