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을 불태울 또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 <스텔스>가 개봉됐다. <분노의 질주> <트리플 엑스>에서 참신한 액션을 보여줬던 롭 코헨 감독이 선택한 소재는 바로 미래형 차세대 전투기. 제목 그대로 스텔스 기능은 기본이고 뛰어난 선회 능력과 막강한 파괴력으로 공중과 지상을 제압하는 전투기들은 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특히 영화 속에서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는 인공지능 전투기 ‘에디’와의 화려한 공중전은 최첨단 디지털 특수효과와 촬영기술에 힘입어 이제껏 보지 못했던 압도적인 액션을 자랑한다.
그런데 차세대 전투기와 인공지능이라니 어딘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이라면 바로 <마크로스 플러스>를 떠올릴 듯한 내용이다. 물론 할리우드에서도 <탑건>을 비롯해 공중전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많았으며, 그런 작품들을 통해 쌓아온 노하우가 <스텔스> 제작에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스텔스> 감상에 앞서 초음속의 제트 액션을 선보인 영화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DVD로 선보인 작품들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탑건> F-14 톰캣 (1986)
공중전을 다룬 영화라면 뭐니뭐니해도 토니 스콧 감독, 톰 크루즈 주연의 <탑건>이다. 당시 신인이었던 톰 크루즈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함과 동시에 전투기 조종사들의 인기를 치솟게 할 정도로 전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한 히트작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조종하는 전투기는 미해군의 주력 전투기 F-14 톰캣. 주날개의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가변익이 특징으로 이를 응용한 기동성과 첨단 전자장비를 통한 장거리 요격능력을 갖추고 있다.
영화 속에서는 소련의 최신 전투기 미그 28이 적기로 등장하는데 실제로 미그 28은 없으며 촬영에는 연습기로 많이 쓰이는 미 공군의 F-5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폭발 장면이나 가짜 미사일이 날아가는 장면 등은 지금 관객의 눈에 다소 어색해보일지 몰라도 긴박감 넘치는 촬영과 편집은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또한 공중전 장면 외에도 젊은 전투기 조종사들의 치열한 사랑과 경쟁을 그리고 있는 점이 단순한 액션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지난 3월 발매된 SE 버전의 DVD는 리마스터링 된 DTS 음향이 최신 영화 못지않은 박력 있는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어, 영화를 보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에너미 라인스> F/A-18 슈퍼호넷 (2001)
미 해군에서 F-14 톰캣을 대체할 주력기로 인정한 F-18. 그 개량형인 F/A-18 슈퍼호넷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전투기이기도 하다. <인디펜던스 데이> <고질라> <언더시즈> 등 여러 액션 영화들에서 활약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비중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영화는 오언 윌슨 주연의 <에너미 라인스>다.
물론 영화 속 F/A-18은 세르비아군의 지대공 미사일을 맞고 추락하는 꼴불견을 연출하고 있지만 그 직전까지의 눈부신 곡예는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스텔스> 이전에 가장 화려한 공중 액션을 보여준다. 또 하나, 조종사들의 비상 탈출 씬은 여러 대의 카메라를 사용한 현란한 영상과 디테일한 묘사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기막힌 장면이다
그런데 이 영화, <스텔스>와 또 다른 유사점이 있다. 바로 전투기에서 탈출한 주인공이 적들의 추격을 피해 적진에서 빠져나간다는 식의 내용인데, <에너미 라인스>에서는 당시 내전으로 한창 떠들썩했던 보스니아가 그 배경이 되고 있다(<스텔스>에 ‘악의 축’ 북한이 나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비교적 최신작답게 DVD의 화질과 음질이 우수하며, 특히 공중전에서 탁월한 서라운드 효과를 자랑한다.
<파이어폭스> 미그 31 파이어폭스 (1982)
냉전시대 소련은 미국에게 있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군사적 우위를 차지한 것은 미국이었으나, 철의 장막 너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는 건 분명 끝없이 경계를 요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기술은 물론이고 지금의 기술로도 만들어질 수 있을지 의문인 가상의 소련 전투기 ‘파이어폭스’ 역시 그러한 두려움의 산물이다. 마하 5 이상의 속도(<스텔스>의 전투기들도 그 정도로 빠르진 않다)에 스텔스 기능, 거기에 조종사가 생각만으로도 조종할 수 있는 파이어폭스는 미, 소 양진영의 군사적 균형을 무너뜨릴 만한 위력을 갖고 있다.
영화는 미국인 조종사가 파이어폭스를 탈취하기 위해 소련에 침투하는 과정을 그린 전반부와 후반부의 탈출 장면으로 구분되는데, 파이어폭스끼리 맞붙은 공중전 장면은 이 영화의 최대 하이라이트. 지금 시점에선 투박해 보이는 아날로그 특수효과로 연출되었지만 상당한 긴박감으로 당시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던 명장면이다. 지금은 명감독으로 인정받고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및 주연을 맡았던 영화로, 빙산 위에서 벌어지는 급유 장면 등 참신한 내용들이 많은 작품이다. 과거 주말의 명화 시간에 자주 방영되었으나 요즘에 와서는 오히려 보기 드문 추억의 영화가 된 것이 조금은 아쉽다. 미국에서는 지난 3월 DVD로 출시됐는데, 국내에서도 조속히 발매되길 희망한다.
<브로큰 애로우> B-3 폭격기 (1996)
할리우드 영화들 중 실제 스텔스 전투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는 드문 편이다. 아무래도 현역으로 활약하는 F-117이나 B-2 스텔스기가 공중전이 아닌 지상 정밀 폭격용으로 만들어진 기체이기 때문에 화끈한 공중전에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브로큰 애로우> 초반에 주인공들이 탄 B-3 폭격기는 B-2를 모델로 한 가상의 스텔스기. 이는 실제 스텔스기들의 외관이나 내부 구조나 극비로 되어있기 때문에 영화 제작진이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화 속의 스텔스기 역시 공중전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조종사들의 치열한 심리전과 육탄전이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게다가 단순한 전투기도 아닌 핵무기를 탑재한 폭격기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펼쳐지는 주도권 싸움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러나 결국 영화의 중심은 스텔스기에서 핵폭탄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으로 넘어간다. 예고편 외에 별다른 부록이 없는 단출한 DVD이지만 초반 스텔스기의 추락장면과 핵폭발 장면의 사운드가 우수하다.
<에어리어 88> 냉전시대 거의 모든 전투기들 (1985)
할리우드 보다 앞서 전투기들의 공중전에 주목한 일본 애니메이션계는 1982년 제작된 <마크로스>에서부터 최근의 <전투요정 유키카제>에 이르기까지 그들만의 독보적인 화면 연출을 이용한 수작들을 선보여 왔다. 신타니 카오루의 원작 만화를 <독수리 오형제>의 토리우미 히사유키가 감독한 <에어리어 88>은 지금까지도 명작 OVA로 손꼽히며 최고의 공중 액션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다.
작품의 배경은 중동에 위치한 가상의 국가 아스란. 그곳에서 발생한 내전은 국경을 넘어 외부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미소 양진영의 개입은 사막의 전장을 최신 무기들의 시험장으로 만든다. 이러한 작품 설정으로 인해 <에어리어 88>에는 구식 제트기에서부터 최신예기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전투기들이 한꺼번에 등장하여 경합을 펼치는, 현실 세계에선 거의 불가능한 장면이 펼쳐진다. 솜씨 좋은 애니메이터들이 손수 그려낸 감각적인 연출은 기막힌 볼거리를 제공하는데, 특히 기관총에 맞아 부서지는 조종석 등의 디테일한 묘사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명장면이다.
F-14 톰캣, A-10 썬더볼트 등 각종 전투기들이 등장하지만 <에어리어 88>의 팬들에게 있어 가장 인기 있는 기체는 단연 F-20 타이거샤크다. 현실 세계에서는 널리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전투기지만 작품 속에서는 주인공 카자마 신이 조종함으로써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국내 출시된 DVD는 ‘지옥의 외인부대’라는 이름으로 과거 인기리에 방영됐던 우리말 더빙을 수록하고 있으며, 등장하는 여러 전투기들에 대한 데이터 등 흥미로운 부록들을 담고 있다.
혹시 <스텔스>의 원작 아냐? <마크로스 플러스> YF-19, YF-21 그리고 X-9 (1994)
최신예 전투기들을 시험 조종하는 조종사들. 그들 사이에 갈등을 조장하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전투기. 분명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에겐 낯익은 소재다. 바로 OVA 작품 <마크로스 플러스>에서 이미 다뤘던 내용이기 때문. 실제로 외국 팬들 사이에서도 유사성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사안이나 <스텔스>에서의 인공지능 '에디'는 <마크로스>보다 훨씬 이전에 만들어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HAL 9000'를 모델로 하고 있어, 표절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할리우드와 일본 애니메이션계가 예전부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특히 <스텔스> 감독 롭 코헨이 또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 <카이트>를 영화화할 예정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스텔스>가 제작되기까지 <마크로스 플러스>가 어느 정도는 기여했을 거라 짐작된다.
<카우보이 비밥>으로 이름을 날린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의 연출작 <마크로스 플러스>는 TV 애니메이션으로 시작된 명작 <마크로스> 시리즈의 하나로 만들어진 OVA(오리지널 비디오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과거 <마크로스>에서는 F-14 톰캣을 모델로 한 전투 로봇 발키리가 활약했으나, <마크로스 플러스>에서는 실제 미 공군의 차세대 전투기 디자인과 흡사한 YF-19와 YF-21가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 적으로 등장하는 X-9 전투기는 ‘고스트’라는 명칭의 인공지능이 탑재된 고성능 기체. <스텔스>와 마찬가지로 모종의 사건에 의해 폭주하고 두 주인공들은 이를 막으려 출격한다.
이 작품의 최대 볼거리 역시 화려한 공중 액션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데, 특히 다량의 미사일이 제각기 궤적을 그리며 전투기를 추적하는 ‘유도 미사일 장면’은 <마크로스> 시리즈의 전매특허로서 애니메이션 팬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연출이다. 국내에서도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작품이지만 팬들의 바람과는 달리 DVD는 아직까지 국내 출시가 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