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일 소니컴퓨터엔터테인먼트(SCE)의 휴대용 게임기 PSP(PlayStation Portable)가 국내에 정식으로 발매됐다. 작년 5월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기존의 휴대용 게임기와는 차원이 다른 성능을 과시했던 PSP는 기본적인 게임 플레이뿐만 아니라 동영상, 음악 감상 등이 가능한 포터블 플레이어로서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다.
실제 PSP는 플레이스테이션(PS) 신화를 창조한 SCE의 구타라기 겐 사장이 ‘21세기의 워크맨’이라고 소개한 것처럼 닌텐도사의 휴대용 게임기보다는, 애플의 아이팟과 경쟁하는 기기로 인식되고 있다. 평소 게임에 관심 없던 사람들도 PSP의 멋진 디자인과 고품질 액정 스크린에 매료되어 구입을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광학 매체인 UMD(Universal Media Disc)를 기본 매체로 사용한 최초의 휴대용 게임기로서 게임 소프트웨어 업체가 아닌 할리우드의 영화사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것도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다. PSP와 동시에 발매된 UMD 비디오는 DVD와는 또 다른 영상 매체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미 TV 광고 등을 통해 다재다능한 기능을 갖춘 만능 기기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PSP지만 게임 기능과 UMD 비디오를 중심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을 짚어보기로 했다.
PSP의 첫인상
PSP를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16:9 비율의 4.3인치 액정 스크린이다. 손바닥 크기보다 조금 큰 본체 면적의 7할을 차지하면서, PSP가 영상기기로서 주안점을 두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키고 있다.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실물로 봤을 때 확실히 ‘크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디자인이다. 휴대용 게임기로서는 상당히 큰 편이지만 그것을 상쇄할 만큼 멋진 디자인을 자랑한다. 액정 뒷면에 UMD 드라이브가 장착됐음에도 불구하고 ‘얇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슬림한 형태이며, 검은색 본체에 흰색 로고만으로 이루어진 심플한 전면부는 ‘소니 스타일’의 세련된 멋을 풍기고 있다. 특히 투명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L, R 버튼은 본체가 주는 고급스러운 느낌을 배가시켜준다. 게임기라기보다는 고가의 PDA를 연상시키고 있다.
만졌을 때의 묵직함도 인상적이다. 배터리를 포함해 약 260g쯤 되는데,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측면도 있지만 오래 들고 다니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편이다.
게임기의 기본은 역시 게임
리뷰를 위해 플레이해본 게임은 두 가지. PSP의 성능을 잘 살린 레이싱 게임 <릿지 레이서>와 고전 캐주얼 게임들을 모아놓은 <남코 뮤지엄>이다. PS1 시절부터 속도감 있는 3D 자동차 액션을 보여줬던 <릿지 레이서>는 PS2까지 총 5편의 게임이 발매된 남코의 인기 시리즈. 간단한 드리프트 기술로 도로를 질주하는 쾌감이 이 게임의 최대 매력이다. 매끈한 경주용차와 섹시한 레이싱 걸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 오프닝 동영상으로도 유명한데, PSP에서도 그러한 전통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고화질의 동영상부터가 일단 만족감을 주며 본 게임의 그래픽도 상당한 수준을 자랑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휴대용 게임기로서 우수한 그래픽이지 PS2의 최신 레이싱 게임들에 비해서는 어딘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물론 PSP의 성능이 PS2에 버금간다는 제작사의 발표로 인해 기대치가 높았던 탓이기도 하다. PSP 초창기 게임으로서는 상당한 수준의 완성도라고 생각되며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타이틀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지적할 부분이 있다면 본 게임에 들어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게임을 작동하고 나서부터 타이틀 화면을 거쳐(로딩하는 시간 동안 ‘방구차’를 즐길 수 있게끔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세팅을 마치는 과정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이는 길거리에서 간단하게 켜고 바로 즐기는 것이 장점인 휴대용 게임기로서는 무척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광학 매체인 UMD를 이용하는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용자를 위한 배려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릿지 레이서>가 야외에서 간단히 즐기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로 볼륨이 큰 게임이라면(물론 <그란투리스모>가 나오기 전의 이야기겠지만), <남코 뮤지엄>은 그야말로 쉽고 간편하게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들을 모아놓은 타이틀이다. 80년대 오락실을 다녀봤던 사람들에게 매우 친숙한 게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수 있는 슈팅 게임 ‘갤러그’를 비롯해 ‘팩맨’, ‘디그더그’, ‘방구차’ 등이 수록되어 있다.
옛날 그래픽 그대로 수록되어 향수를 자극함과 동시에 해당 게임들의 그래픽과 게임 방식을 업그레이드 한 ‘어레인지판’도 함께 포함되어 고리타분하다는 인상을 피하고 있다. 어레인지판의 경우 고전 게임의 아기자기한 맛과 최신 3D 게임의 화려한 그래픽을 적절히 섞어, 게임에 문외한인 사람에게도 권할 만 하다. <릿지 레이서>와 비교해서 완벽한 한글화가 되어있다는 장점도 있다.
현재 PSP용으로 정식 발매된 게임들은 아직 10개가 채 되지 않는다. <모두의 골프> <진 삼국무쌍> 등의 기대작들이 대기 중이지만 경쟁 게임기인 닌텐도 DS에 비해서도 할 만한 게임들이 부족한 편이다. 하지만 우수한 그래픽 성능을 바탕으로 해외 유수의 게임 제작사들이 대작들을 선보일 채비를 하고 있으며 국내 제작사들도 참여 의사를 밝힌 바 있다.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최근 발표된 소니의 차세대 게임기 PS3와도 연동된다는 점이다. 2006년부터 선보일 예정인 PS3는 기존의 게임기들과는 차원이 다른 성능을 갖추었다고 하는데, SCE 관계자는 PSP와 무선 랜으로 연결하여 새로운 체험을 가능케 할 것이라고 밝혔다. 예를 들어 집안에 있는 PS3 게임을 야외에서 PSP로 즐길 수도 있다고 하니 상상만 해도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UMD로 보는 영화
1.8기가바이트의 UMD 용량은 휴대용 게임기로는 사실 터무니없는 볼륨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닌텐도의 가정용 게임기 게임큐브가 사용하는 미니 DVD(1.5기가바이트)를 능가한다. 그런 UMD의 방대한 볼륨을 적극 사용할 수 있는 분야는 다름 아닌 동영상 재생이다. 물론 하드드라이브를 장착한 기존의 포터블 플레이어들이 동영상 감상에 더 좋은 환경일 수도 있으나, 휴대용 DVD 플레이어를 제외한 대부분이 불법 영상물을 재생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PSP는 불법 복제가 사실상 힘든 UMD를 통해 할리우드의 영화 컨텐츠들을 확보한 긍정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이는 PSP의 제작사인 SCE와 같은 소니 계열사인 소니픽쳐스와의 밀접한 관계가 큰 역할을 했으리라고 여겨지는데, 해외에서나 국내에서나 소니픽쳐스의 영화들이 UMD 비디오로 집중적으로 소개되는 현실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또한 PSP의 고화질 액정 스크린은 영화 감상에 적합한 16:9 화면비로 이뤄져 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체감 크기도 상당한 편이어서 포터블 플레이어 중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다. 그럼 실제 체험해본 UMD 비디오는 어떨까.
현재 정식 발매된 타이틀은 총 네 작품. <스파이더맨 2>는 PSP에 기본적으로 딸려오는 번들 소프트웨어로 제공되며, <트리플 엑스> <헬보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가 개별적으로 판매되는 타이틀들이다. 네 작품 모두 이미 국내에 소개된 작품들로 DVD로도 발매됐던 영화들이다. 신선도는 떨어지지만 재미까지 뒤떨어지는 영화들은 아니다. 그 중 <원스 어폰 어 타임...>은 유일하게 필자가 DVD로 보지 못했던 작품. 지하철에서부터 포장마차에 이르기까지 시내 곳곳을 누비며 영화 감상을 하는 독특한 경험을 했다. UMD 비디오의 광고에는 ‘DVD 수준의 화질’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그 이상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선명한 화질이 인상적이다. 빠른 움직임이나 화면전환이 있을 경우 가끔 잔상이 눈에 띄긴 하지만 액정 디스플레이 기기라는 점을 감안할 때 크게 눈에 거슬리는 수준은 아니다.
음질의 경우 본체의 작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예상했던대로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어폰이나 외부 스피커로 듣는 것을 기본으로 설계된 듯 하다. 음질은 깨끗한 편이며 외부 리시버에 연결 해봤을 때 DVD에 비해서 박력은 부족하지만 2채널 음향으로서는 꽤 괜찮은 수준으로 들렸다.
참고로 UMD 비디오의 영상은 MPEG-4 AVC 방식으로 압축되었으며, 음향은 표준 돌비 디지털이 아닌 독자적인 ATRAC3plus 방식으로 수록됐다. 지하철에서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인데, UMD 비디오에 기본적으로 지원되는 한글 자막 외에 영어 자막을 설정해놓고 감상을 하면 영어회화 공부에도 썩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현재 국내 발매된 UMD 타이틀이나 발매 예정작들은 모두 소니픽쳐스의 타이틀들이다. 해외에서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는 PSP 보급으로 인해 20세기폭스, 유니버설, 브에나비스타 등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들과 반다이 등 일본 애니메이션 전문 업체들이 UMD 비디오 타이틀을 선보인다고 밝혔다. 국내에서도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대하지만 PSP의 활발한 보급만큼이나 불법 동영상의 난립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게임, 영화 그리고 또
PSP는 PC, 디지털카메라, 디지털 캠코더 등에 범용으로 쓰이는 소니의 메모리스틱을 저장매체로 한 만큼, 그 활용도 또한 다양하다. MP3 재생은 기본이고 이미지 뷰어 기능 및 별도의 동영상 재생도 가능하다. 심지어 타사의 게임기로 나왔던 고전 게임들을 구동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도 아마추어 개발자들을 통해 개발이 진행 중이다. 특히 KT의 넷스팟을 통한 독자적인 무선랜 서비스는 해외에서도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기능. VOD 영화, 드라마, 교육방송 등 동영상과 스트리밍 음악, e-book 등의 서비스가 제공되는데, 아직까지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 사용자들의 평가다. 그럼에도 단순한 게임기가 아닌 멀티미디어 기기로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이렇듯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 PSP지만 아직까지 선뜻 손이 안가는 제품이라는 인상도 주고 있다. 게이머가 아닌 일반 소비자에게는 부담스러운 가격에서부터 발매되자마자 여러 언론들이 보도한 불량화소 문제, 그리고 현재 부족한 정식 발매 소프트웨어 등이 그렇다. 그럼에도 직접 만져본 PSP는 손에 착 달라붙는 매력적인 기기이자 손에서 떼고 싶지 않은 명품과도 같았다. 아직까지 관심만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직접 체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분명 좋은 제품이며 아무쪼록 많이 보급되어 양질의 소프트웨어가 쏟아져 나오기만을 기대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