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전주국제영화제의 가장 흥미진진한 경험중 하나는 특별상영으로 편성된 세 편의 북한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정치적인 금기를 깨는 듯한 일탈의 즐거움은 ‘핑크 다큐의 밤’보다도 크고, 낯선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는 ‘마그렙 특별전’만큼이나 드문 기회다.
<피묻은 약패>(2004)는 ‘독도수호’를 주제로 하는 사극. 왜구가 평화롭던 독도(우산도)를 침략해 대대로 살아온 천무봉의 가족만을 남기고 모든 주민은 살상당해버린다. 위기를 느낀 천무봉은 세 아들인 석조, 석파, 석혜에게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금불상의 위치가 그려진 약패를 세조각으로 나누어 준다. 왜구는 약패를 얻기위해 장군의 직위를 주는 무술대회를 열고, 출전한 두 형제는 큰 형의 행방을 알기위해 왜구와 싸우다가 진정한 독도의 참뜻을 깨우치게 된다. 2시간10분짜리 대작 <피묻은 약패>는 중국식 무협영화의 관습으로 포장되어 있는 작품이다. 클로즈업보다는 주로 롱샷을 이용해 보여지는 대결 장면들에서는, 연기자들이 대역없이 직접 소화해낸 무협 장면들의 쾌감이 또렷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피묻은 약패>는 ‘독도’라는 주제에 대한 민족적 공감을 운운할 텍스트로서는 많이 어설프다. 이 정치적 무협영화를 진정으로 즐긴 관객들은, 영화의 순진무구한 민족주의로부터 어린시절 반공영화들을 다시 보는 듯한 키취적인 재미를 찾은 사람들이다.
<청자의 넋>(2002)은 고려시대 청자를 만드는데 목숨을 건 어느 도공의 이야기다. 고려시대 어느(아마도 금강산으로 보이는) 수려한 산속에는 수많은 도공들이 모여사는 도공마을이 있다. 도공무리의 스승인 설지록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명장 친구를 위해 고려의 색과 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청자를 만드는데 일생을 바친다. 설지록 일가와 도공무리들이 성공적으로 청자를 만든날, 기쁨으로 가득해야 할 날은 비극의 시작이 된다. 벙어리 여인으로 위장해서 도공마을에 들어온 일본여인이 청자의 비밀을 일본으로 빼돌렸던 것. 설지록은 국가의 보물을 일본으로 빼돌렸다는 누명을 쓰고는 아들, 딸과 함께 산속으로 숨어들어간다. <청자의 넋>은 북한영화의 독특한 미학을 보여주는 사극이다. 도공마을을 둘러싼 세트와 수려한 로케이션, 가끔식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가무는 거친 색채속에서도 나름의 완성도를 지닌 미장센을 펼친다.
<어서 오세요>(2001)는 조금 당혹스럽다. 2부작 TV 단막극인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코미디의 외피를 둘러쓰고서 (중상층으로 가정되는) 북한 가족의 일상을 보여준다. 가족의 사랑을 받는 막내딸 은아는 동물원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연구원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고 냄새나는 동물원에서 일하는 막내딸이 영 맘에 들지 않는다. 한편, 은아는 젊은 사육사들을 이끌고 “점점 인기가 떨어지는 동물원을 살리기 위해서는 동물들을 훈련시켜서 서커스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동물원 소장과 대립하게 된다. 결국 은아는 가족과 동물원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게 되는데, 문제는 은아와 사육사들의 순진한 믿음이다. 사육사들은 “동물들에게 야성의 본성을 마음껏 뽐낼 수 있게 하기위해” 동물들을 길들이기 시작하는데, 원숭이에게 옷입는 법과 머리 빗는 법을 강압적으로 가르치는 모습은 (서구와 한국관객의 시선으로 본다면) 과도한 동물학대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낙후된 정치적 공정성을 그런 이유로 탓하는 것은 좀 야속한 처사다. 오히려 <어서 오세요>는 북한과 한국 관객들이 동시에 살아가는 ‘현재’가 문화적으로 얼마나 격렬한 차이를 지니고 있는지를 재확인 할 수 있는 진귀한 텍스트다.
북한영화 특별상영에는 몇가지 아이러니가 숨어있다. 전주영화제는 세 편의 영화를 북한에서 직접 가져올 수는 없었다. 이 영화들은 고성필름이라는 홍콩의 배급사에서 판권을 사온 한상훈 감독이 소장중이었고, 이를 상영하기로 결정한 전주영화제측이 통일부의 승인을 받는데만 23일이 걸렸다. 결국 주체사상을 노골적으로 암시하거나 ‘김정일 수령’의 이름이 등장하는 몇몇 장면들은 묵음 혹은 모자이크 처리되어 상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