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직업 군인을 꿈꾸었던(그는 육사를 중퇴했다) 감독은 한 군인의 죽음을 그 사건이 발생한지 6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금 조명하고 있다. 김훈 중위는 6년 전 판문점에서 의문사를 당한 채 지금껏 자살이냐 타살이냐의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영화 속에서 양쪽 진영은 각자의 신념에 따라 팽팽하게 자기주장을 펼치지만 결국 영화는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 주지 않은 채 끝을 맺는다. 더불어 영화는 철저한 수직적 권력구조로 이루어진 군대라는 조직의 고질적인 병폐를 보여준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작업은 그 환부를 도려내는 것임을 감독은 잘 알고 있다. 또한 그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수술이라는, 그래서 자신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사실도 그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사회적으로 큰 방향을 불러오리라는 기대도 별로 하지 않았으리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그것도 자신이 등을 돌린 군대라는 조직에 자발적으로 카메라를 들고서 왜 이 까마득한 진실에 매혹된 것일까? 바로 이 지점에서 감독의 자아는 미세하게 영화를 관통한다. 비록 카메라에 단 한 번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김훈 중위의 죽음을 둘러싼 논쟁을 가만히 지켜 볼 뿐이지만 감독은 좀 ‘다르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킨다. 감독은 자신의 목소리만으로 죽은 김훈 중위를 연기한다. 그래서 김훈 중위가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를 현재의 심정을 내레이션으로 읊조리며 영화의 시작을 열고 끝을 맺는다. 이렇게 잠시나마 감독은 김훈 중위가 되어 말이 없는 죽은 자에 육신을 빌려주는 영매가 된다. 그것은 곧 김훈 중위의 한을 풀어주는 씻김굿이며 동시에 한때 군인이었던 자신의 오랜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의식 행위이다. 그렇게 영화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엮어내며 부패한 세상을 억울하게 마감한 자를 위로하고 그 세상을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가 지닌 상처를 보듬어 준다.
김훈 중위의 죽음은 영화를 찍기 이전에 군인이었던 감독의 상징적 죽음이라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그 표현이야 어찌되었든 감독의 무의식적 욕망은 김훈 중위의 죽음을 둘러싼 논쟁을 영상으로 담아내는 객관적 과정 속에서 군인으로서의 자신을 반추하는 은밀한 작업을 수행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제6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선발한 관객평론가 5명은 <씨네21> 데일리에 리뷰를 쓰고 <한국 영화의 흐름> 작품(장편) 중에서 ‘관객평론가상’ 수상작을 선정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