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대행사 Central 상파울루 아트디렉터 Marcelo Siqueira 카피라이터 Omar Caldas
어쩌면 당신처럼 순진무구한 분에게는 갑갑하기 짝이 없는 광고일지 모른다. 그림들이 무슨 선문답 같다. 요렇게 귀여운 멍멍이가 이 소녀랑 무슨 상관이란 말이야? 피자배달원과 섹시한 여인이랑은 또 어떤 관계지? 냉장고 문짝에 꽂혀 있는 크림 스프레이가 도대체 어쨌다는 거야? 침대에 나란히 누워 수다를 떨고 있는 두 처녀는 또 뭐야? 그림를 가만히 보니 광고 한쪽엔 예외없이 허슬러라는 이름이 보이잖아? 그래도 정말 모르겠다는 얘긴가? 설마 허슬러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고 시치미 떼진 않을 테지? 그렇다면 당신하곤 아예 얘기가 안 될지 모른다. 너무나 평범하고 건전하고 반듯하게 살아온 대한민국의 남성에게는 너무 어려운 연상퀴즈일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당신이 아니라 이 그림을 보고 이상야릇한 상상을 하는 사람에게 있다. 적어도 이 광고의 카피는 이렇게 강변하고 있다. “이 이름을 보면 당신은 불결한 걸 생각한다” 하지만 <허슬러>라는 도색잡지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무리가 아니다. <허슬러>가 어떤 잡지던가? 아마 래리 플린트를 몰라도 도색잡지 <허슬러>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플레이보이>, <팬트하우스>와 함께 어깨를 견주는 세계굴지의 성인잡지 아닌가? 그러나 <허슬러>는 이들 두 잡지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저속함으로 발행인인 래리 플린트를 끊임없이 법정에 세웠던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갈피갈피를 들춰보면 난교와 혼교, 수간 따위가 심심찮게 등장하는 하드코어 포르노그라피다. 이런 화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광고에 표현된 암시적인 그림만 봐도 성적 흥분을 느끼기 십상이다. 개는 섹스 토이로, 피자배달원은 근육질의 섹스파트너로, 스프레이는 섹스숍에서 구할 수 있는 국소마취제로, 침대 위의 두 여자는 레즈비언으로 비치는 게 결코 비정상이 아니다.
그 원인은 일상의 모든 사물을 성적코드로 치환해버리는 사람들의 착시현상에 있다. 실제 지각되는 대상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의 눈으로 느낄 때 실제의 대상과 오차가 생기는 것을 착시라고 한다. 그렇다. 이 광고가 독자와 커뮤니케이션하는 기제는 시지각 작용이다. 시지각이란 눈을 통해서 외부세계의 물체나 그 변화를 탐지하는 과정을 말한다. 당신은 어쩌면 이 광고를 통해 그림 이면에 숨어 있는 음란한 영상을 훔쳐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보면 극히 평범한 영상이 성도착의 렌즈에 걸리면 끈적끈적한 섹스스토리로 변질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허슬러> 광고는 이 잡지가 담고 있는 저질, 선정성의 화보와는 달리 ‘착시의 사회학’이라는 아주 고차원적이고 사변적인 논제를 하나 제기하고 있다. 그런 표현코드로 성적인 것을 연상하는 독자를 오히려 성도착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스스로의 품격을 높이는 고단 수를 부리고 있다.
<허슬러>를 창간한 래리 플린트에 관한 이야기는 얼마 전 같은 이름의 영화로 제작되어 한국에서도 개봉된 바 있다. 원래 ‘허슬러’는 래리 플린트가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경영하고 있던 스트립 클럽의 이름이었다. 래리는 클럽의 수입이 신통치 않자 홍보 방법의 일환으로 여자 나체 사진으로 도배를 한 ‘허슬러 뉴스레터’를 배포한다. 여기서 재미를 본 래리는 “<팬트하우스>나 <플레이보이>는 사기다”라는 선언과 함께 이 뉴스레터를 전국 발매용 월간지로 개편한다. 사업감각이 뛰어나고 대담한 래리는 섹스산업의 엄청난 상업성을 간파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성인잡지 <허슬러>가 시작된 계기였다. 그뒤 <허슬러>는 다른 성인잡지와 비교될 수 없는 노골적인 사진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이 잡지는 그를 ‘공공의 이익’에 대한 적으로 끊임없이 법정에 세운다.
래리 플린트의 기나긴 법정투쟁에 빌미를 제공한 것은 공교롭게도 광고였다. 제리 포웰이라는 유명한 목사가 명예훼손죄로 그를 고소한 데서 그의 수난은 정점에 달한다. 제리 포웰은 그 당시 미국에서 레이건 다음으로 존경받는 인물로 매스컴을 풍미하던 인기목사였다. 그런데 래리가 그를 한 주류광고에 이용하면서 ‘나의 첫 고백, 나는 엄마와 잤다’라는 문구를 <허슬러>에 실었던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 재판은 대법원까지 올라가게 되고 그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 개인의 표현의 자유는 타인에게 끼치는 감정적인 피해를 이유로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판결문으로 재판에서 승리하게 된다. 그는 <허슬러>의 판매율을 높이기 위해 광고와 재판이라는 수단을 교묘하게 엮은 것이다. 그런 잡지가 이제는 광고독자의 인식과 한판 싸움을 벌이겠다고 결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개눈엔 뭐만 보이듯이 당신이 섹스광이라면 이 광고를 보고 추잡한 것을 떠올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허슬러> 하면 저질 포르노를 연상하는 사회적 통념을 벗고 고급 정보잡지 혹은 생활잡지로 자신을 자리매김하겠다는 전략이 숨어 있는 광고이다.
이현우/ 제일기획 제작국장·광고 칼럼니스트 2nu@chei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