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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어, 백구!
2001-02-02

국산 TV 애니메이션 <하얀 마음 백구> 종영

많은 기대 속에 태어났던 국산 TV애니메이션 시리즈 <하얀 마음 백구>가 안방극장에서 석달간의 선전한 끝에 지난 1월12일 막을 내렸다. 99년 10월6일부터 매주 금요일 5시50분 SBS에서 방영됐던 <…백구>는 진도 부근의 섬 조도에 사는 어린 남매와 진돗개 백구의 훈훈한 우정을 그린 13부작 애니메이션. 대전으로 팔려갔다가 7개월 만에 진도의 주인에게 돌아온 진돗개의 실화를 바탕으로, 투견광에게 팔려간 백구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겪는 모험과 아이들의 성장기를 촘촘히 엮은 동화다. 언제부터인가 국산 애니메이션의 방영시간대로 고정되다시피한 금요일 저녁, 높은 시청률을 얻기 힘든 시간대로 꼽히는 ‘비수기’에 방영된 <…백구>는 평균 시청률 10%를 웃도는 인기를 누리다가 종영을 맞았다. 금요일 저녁은 주말이나 월∼목요일에 비해 전체 시청률 자체가 낮고, 각 방송사의 특집 프로그램들이 가장 쉽게 치고 들어오는 시간대라 결방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그나마 방영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은 편이 유리한데, 6시15분에 SBS 창사 1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또다른 국산 애니메이션 시리즈 <트랙 시티>가 편성되면서 <…백구>는 5시50분이란 시간대를 배정받았다. 여러모로 열악한 조건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최하 8% 이상, 최고치일 때는 13.5%를 넘어갔다는 <…백구>의 시청률은 눈에 띄는 선전이 아닐 수 없다.

객관적으로 시청률 수치만 따져봐도 성공적이라 할 만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시청자들의 열띤 반응이다. 방영 전에 문을 연 백구 홈페이지에는 작품을 보기 전부터 기대의 목소리가 높더니, 1화 방영 직후부터 너무 재미있다, 울었다, 국산 애니메이션 중 모처럼 볼 만한 작품이 나왔다는 등 수십건의 감상문이 올라왔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특별방송 때문에 13일로 예정된 2화가 결방되자 당장 불만의 목소리가 올라오고, 꾸준히 게시판과 방명록에 쌓인 글은 약 6천여건에 이른다. 현재까지의 사이트 접속횟수만 해도 무려 60만회가 넘을 정도. 홈페이지뿐 아니라 방송사로 걸려오는 전화공세도 만만치 않다. <…백구>를 담당해온 배숙현 PD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더빙 방영할 때는 항의전화를 많이 받았는데, <…백구>를 방영하면서는 ‘좋은 만화를 편성해줘서 고맙다’는 감사와 격려 전화를 많이 받았다”며, SBS에서 방영한 국산 애니메이션 가운데 이처럼 피드백이 활발하고 열띤 반응을 얻었던 작품은 드물다고 말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최근 인터넷 벤처기업 키드앤키드닷컴에서는 애니메이션을 바탕으로 한 <하얀 마음 백구> 게임을 개발하기까지 했다. 이 게임은 진돗개가 옛 주인을 찾아가는 얘기로 구성되는데, 귀로를 방해하는 적들을 물리치는 싸움에만 치우치지 않고 개를 키우는 교육적인 효과도 있다고 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최악의 조건,그러나 시청자는 열광했다

국산 애니메이션이 이처럼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는 실로 오랜만이다. <…백구>는 애니메이션 전문채널 투니버스 출신인 이정호 PD가 98년에 꾸린 백구 제작팀이 만들고, 유명 완구업체인 손오공 산하 애니메이션 기획사 서울애니메이션이 전액 투자한 작품. 그동안 <영혼기병 라젠카> <레스톨 특수구조대> 등 국산 애니메이션 화제작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평가할 만한 만듦새에도 불구하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이런 점에서 유난히 한국적인 캐릭터와 배경을 내세운 <…백구>의 성공은 이례적이면서도 반가운 소식이다. 22∼24%의 시청률(종종 그날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포켓몬스터> 등 다양한 일본 상품이 여전히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TV 전장에서, 부모를 잃은 남매의 힘겨운 삶과 진돗개 백구의 모험이란 고전적 모티브를 내세운 <…백구>가 주목받게 하는 힘은 어디에 있는 걸까.

<…백구>는 보기 드문 순토종 애니메이션이다. 산호빛 바다에 둘러싸인 섬마을 조도, 담장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풍경이 그렇고, 정감어린 사투리로 인정을 나누는 사람들이 그렇다. 전교생을 다 모아 봐야 50명이 안 될 것 같은 학교에, 진도에 서는 시장 구경과 자장면 한 그릇에 행복해하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복고풍 정서를 깔고 있는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넉넉함의 온기를 지닌 <…백구>의 무대는 본 적 없대도 푸근하게 느낄 법한 고향처럼 다가온다. 13살 동이와 7살 솔이 남매가 아기 백구를 처음 만나는 것은 이곳의 겨울 숲에 솜털 같은 눈이 내리던 날.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팔려가던 백구는 눈길에 자신을 실은 자전거가 쓰러진 틈을 타 찢어진 상자에서 빠져나오고, 약한 몸으로 눈싸움을 하다가 쓰러진 솔이의 눈앞에 나타난다. 눈처럼 하얀 백구를 하늘의 엄마가 보낸 선물로 여긴 솔이는 백구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이내 주인이 나타나 떠나보낸다. 남매의 아버지가 백구를 되사오면서 한가족이 되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 행복한 만남을 그린 1화 뒤에는 멸치잡이에 나선 아버지가 폭풍우에 휩쓸려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는 비극이 이어진다. 진도의 시장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 다음날 생일을 맞은 아버지는, 아들이 저금통을 털어 사온 모자 선물을 받지 못하고 죽어 사정없이 눈물샘을 자극한다. 앙증맞은 아기 백구가 등장하고 극적인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이 첫 2부는, 애초 기획에는 없었던 이야기다. 투자사인 손오공이 캐릭터 사업용 백구 인형의 모델이 될 만한 아기 백구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한 것이, 결과적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끄는 극적인 도입부를 만들어냈다.

동이랑 솔이랑 백구랑

3화부터는 어엿한 개로 자란 백구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얘기가 전개된다. 동이는 하교 뒤 멸치막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혼자 남는 솔이에게 백구는 가장 좋은 친구다. 어렵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해맑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기가 닥치는 것은 투견광인 이사장이 등장하면서부터. 자신의 투견 블랙의 위용을 과시하러 멧돼지 사냥을 왔다가 위험에 처한 이사장은 백구의 도움을 받는다. 용맹스러운 백구를 자신의 투견감으로 삼고 싶은 이사장은 병약한 솔이의 치료비를 미끼로 남매에게서 백구를 빼앗다시피 한다. 깊은 산 속 투견장으로 끌려간 백구는 이유없이 싸워야 하는 처지에 절망하고, 투견으로 살아온 블랙은 백구를 못마땅해하며 괴롭힌다. 백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솔이의 애틋함, 생활에 지쳐가면서도 병원비 때문에 백구를 팔아야 했던 자신을 책망하는 동이의 무거운 어깨, 투견이 되기를 거부하고 남매에게 돌아오기까지 파란만장한 여정을 거치는 백구의 모험이 <…백구>의 드라마를 끌어간다.

이야기 자체는 새로울 것 없지만, 익숙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백구>의 섬세한 묘사와 사실적인 대사의 힘은 탁월하다. 제작진이 조도와 진도를 수차례 방문하면서 찍은 사진과 비디오 자료를 바탕으로 그려냈다는 섬마을 풍광은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표정을 달리한다. 일출과 일몰의 바닷가, 바닷가를 따라 이어지는 길, 나뭇잎 하나하나 꼼꼼히 그려진 숲 등 자연을 화면에 옮긴 손길은 지극히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짝사랑하는 판석이에게 유독 새침한 솔이, 그런 솔이를 위해 엄마가 끓인 삼계탕을 몰래 훔쳐내는 판석이, 선생님에게 고생을 들키지 않으려 헤진 가방을 가리는 동이 같은 아이들의 모습이나 어렵게 살아가는 남매를 딱히 여겨 틈틈이 계란이며 참외를 쥐어주는 이웃들까지 일상의 세세한 풍경을 잡아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동심을 울린 착하디 착한 사람들

섬마을 사람들의 드라마 사이사이 한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을 인서트로 집어넣는가 하면, 투견시합을 앞둔 개들을 링 위의 선수를 소개하듯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보여주고, 쓰러진 아이의 시선으로 사물을 담거나 원경과 근경을 적절히 치고 빠지는 앵글까지 탄력있는 연출도 <…백구>의 화면에 감성의 생기를 불어넣는다. <스피드왕 번개>에서 이미 역동적인 화면 연출을 보여준 바 있는 성백엽 감독은 투견장, 백구와 블랙의 싸움에서 드러나는 액션과 드라마의 서정을 적절히 조율한 듯 보인다. 맑고 가벼운 타이틀곡과 드라마를 세심하게 뒷받침하는 서정적인 피아노와 현악 선율, 처연한 느낌의 엔딩곡까지 감수성을 증폭시키는 음악도, O.S.T가 언제 나오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받을 만큼 어울리게 쓰였다.

죽도록 공격당하면서도 싸울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투견을 거부하는 백구처럼 순수하고 선량하기 그지없는 인물들, 선악의 갈등, 이별과 기다림이 주는 눈물의 신파처럼 어느 정도의 전형성을 띠고 있긴 하지만, 그때문에 과소평가하기에 <…백구>는 미덕이 더 많은 작품이다. 보는 이들의 가슴을 두드린 것도 제목 그대로 ‘하얀 마음’, 각박한 현실에서 잊혀진 동심의 속살을 드러내는 그 선의가 아닐까. “진돗개에 대한 느낌이 기획의 출발”이었다는 이정호 PD는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그러한 제작의도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 같다. <…백구>의 마지막 방영이 끝난 12일 저녁에 “아이가 벌써 다음 <…백구>를 기다린다”는 시청자의 전화를 받았다는 배 PD는, "4년간 일하면서 그런 전화는 처음”이었다며 “우리가 살아가는 거리, 우리가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의 정서로 정공법의 승부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사실일 지 모르나,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백구>에 대한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다는 이PD는 “만드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고 말한다. 원래 극장용 장편으로 기획됐던 <…백구>는 데모가 후한 평가를 받았음에도 투자자가 나서지 않아 3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TV시리즈로 해 보자는 손오공의 제안을 받아 기획 방향을 바꾸고, 실제작에 들어가기까지만도 1년쯤 걸렸고, 애니메이션업계 안팎의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포기하라는 만류를 받았다. 애니메이션은 작품이 인기를 끌고, 그 작품에 관련된 캐릭터 및 팬시상품, 게임 등 관련 사업으로 수익을 내는 ‘원소스 멀티유즈’를 통해 수익구조를 만들어내는데, <…백구>의 경우는 작품이 잘 된다해도 사업가능성이 부족하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로봇 애니메이션처럼 로봇 완구를 만들거나 소녀 애니메이션처럼 캐릭터 및 팬시상품으로 시장에서 승부를 보기에는 캐릭터의 흡인력이 충분치 않다는 얘기다.

절반의 성공,갈길이 멀다

실제 1,2화에 등장한 아기 백구는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이를 모델로 한 백구 인형은 그만한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애니메이션은 작품과 사업, 마케팅의 3박자가 맞아야 한다”는 이PD는, “그런 점에서 <…백구>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말한다. 돈을 번다는 것 자체로도 중요하겠지만, 다음 작품의 투자기반을 마련한다는 점에서도 수익구조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프리프로덕션 비용이 많이 들었다는 <…백구>의 총제작비는 약 13억 5천만원. 국내 TV물로서는 적잖은 규모다. <…백구>의 가능성에 투자하고 판권을 산 손오공으로서는, 우선 게임이 좋은 호응을 얻고 있으니 팬시 상품이든, OST 음반사업이든, 가능한 수익 모델을 고민해 볼 여지가 있다.

‘절반의 성공’이라 할 지라도 <…백구>가 척박한 국내 애니메이션의 토양에 남긴 양분은 적지 않다. TV 애니메이션의 완성도를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은 물론, 한국적인 소재와 정서로 국산 애니메이션에 대한 시청자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역설적이지만 캐릭터 사업을 위한 캐릭터에 치우치지 않은 ‘절반의 실패’를 감수하고 서정적인 드라마를 만드는 데 공을 들임으로써 이야기의 폭을 넓혀간 것은 주목할 만한 성과다. <…백구> 시리즈는 2월15일경 7편의 비디오로 출시될 예정. 또 한뼘 성숙한 국산 애니메이션을 보고싶다면,한번 눈여겨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