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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에 연애편지 받는다, 살 만한 거다”
2001-04-24

서울여성영화제에서 만난 누벨바그의 대모, 아녜스 바르다 감독

●‘누벨바그’라는 말이 생겨나기 전인 1954년, 기존의 영화언어를 부숴버린

낯설고 과감한 영화 한편이 세상에 나왔다. 의식과 실제를 오가며 기술하는 파격, 첫 번째 누벨바그영화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을

만든 이는 영화이론가의 커리어도 심지어 영화광의 편력도 없었던 스물다섯살 처녀 아녜스 바르다(73)였다. 훗날 ‘누벨바그의 대모’로 불린

아녜스 바르다는, 46년 동안 <행복> <방랑자> 등 7편의 장편 극영화와

지난해 칸영화제에 소개한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를 비롯한 10여편의 다큐멘터리와 단편영화를 내놓았다. 매 작품에서 시대와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불합리한 성역할과 조건들을 고발하고,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독창적인 화법에 담아낸 아녜스 바르다는,

동세대 누벨바그 감독들에 비해 과소평가돼온 감독이다. 한국에서 <행복>은 TV를 통해, <쿵후 마스터>는 <아무도

모르게>라는 제목의 비디오로 소개되기도 했지만, 극장에서 개봉된 영화는 단 한편도 없다.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아녜스 바르다 회고전을

마련하지 않았다면, 그의 대표작을 스크린에서 만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씨네21>은 서울여성영화제를 찾은 아녜스 바르다

감독을 기자회견과 공동 인터뷰에서 두 차례 만났다. 그는 “나는 영화를 사랑한다”는 글귀가 쓰인 배낭에서 손수 준비한 보도자료를 꺼내 건네며,

자신의 영화를 몇편이나 봤는지 묻고, “자, 이제 우린 친구다”라는 ‘황홀한’ 인사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지성과 열정, 재능과 인간미를

지닌 ‘거장’과의 인터뷰는 두 시간으로는 너무 부족했다.

신작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어떻게 만들게 됐나.

4년 전에 <백한번의 밤들>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제라르 드파르디외, 알랭 들롱, 장 폴 벨몽도, 잔 모로, 지나 롤로브리지다,

미셸 피콜리 등 프랑스 스타들이 총출동했는데, 내 평생 상업적으로 가장 실패한 영화가 됐다. 스타 이미지보다는 그 인간에 다가가려 했기

때문에, 스타 시스템의 효과를 못 본 것이다. 그때 난 내 평소 신념을 재확신했다. ‘진짜 사람’에게 다가가자는 것이다. 시장을 좋아해서

자주 들르는데, 시장이 파하고 청소부가 오기까지 30분여분 사이에 버려진 음식들을 줍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의 동작에서 밀레의 ‘이삭줍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낭비하지 말자는 원칙에 충실한 사람들이기도 하고, 폐품을 활용하는 예술가들이기도 하다.

나 자신도 사람과 만남과 감정을 ‘줍는’ 여자다. 가난하지만, 열려 있고 진실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깊이 개입하게 됐다. 시작할 당시에는

카날플러스 이외에는 제작비 지원이 없었고, 촬영도 9달이나 끌었다. 칸영화제 프로그래머 질 자콥이 소식을 듣고 영화제에 소개하기로 하면서

빨리 마무리했고, 영화제를 통해 70개국에 소개할 수 있었다. 파리의 어떤 극장에는 지금까지 40주를 넘겨 상영하고 있다. 13만 관객이

봤으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일주일 동안 거둔 수익에도 못 미치겠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좋아하고 선물과 편지도 많이 보낸다.

다이아몬드나 캐비어 같은 선물은 없다. (웃음) 하지만 연애편지만큼이나 절절한 팬레터들이 있다. 이 나이에 연애편지를 다 받다니, 희망을

잃지 말고 살아야겠다.

디지털 카메라로 작업했는데, 어떤 경험이었나.

디지털 카메라는 새로운 기술인 동시에 사람에게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이기도 하다. 인터뷰하고 촬영하는 대상이 겁을 덜 먹는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직접성과 즉흥성, 현장성을 제공한 미니 카메라의 쓰임새였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차를 타고 가다가 TV를 던져 부품을 꺼내는 사람을

발견하고, 얼른 내려 그 장면을 촬영한 적이 있다. 각 가정에 성스러운 제단처럼 모셔져 있는 TV가 깨지는 걸 보고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잠깐 동안 일어난 일이라, 미니 디지털 카메라가 없었다면 기록할 수 없었을 거다. 디지털 카메라는 관조와 명상 등 지극히 내밀하고

개인적인 것을 담아내는 데도 효과적이다. 그 흥미로운 가능성을 개발하는 데 관심이 많다.

나이가 들면 대개 세상과 사람에 무감해지게 마련인데, 당신은 그 반대인 듯 보인다.

나이를 먹을수록 가벼워진다. 보고해야 한다거나 판단받는다는 두려움이 없어서다. 21세기가 되자 세상이 시끄러웠고, 나도

21세기에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생각했다. 2000년에 노년의 첫 발자국을 내디디는 만큼 지금 프랑스의 상황을 점검하고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자고 생각했다. 초연하고자 해도 노년은 다가와 있다.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었다. 촬영하는 동안

일부러 염색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싫어했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나이를 읽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손이다. 손은 거짓말을 못한다. 그래서

내 손을 크게 클로즈업해서 보여줬는데, 그건 영화인의 시선으로 잡은 하나의 이미지였다. 찍는 사람에서 피사체로 입장이 뒤바뀌는 경험, 오른손으로

왼손을 찍는 일기 같은 측면의 기록을 원했다. 주름진 손을 보여주며 ‘이제 끝이다’라는 내레이션을 하는데, 이 문장 하나에 집착해선 안

된다. 머리와 손은 ‘다 끝났다’고 말하지만, 어쨌거나 영화를 찍으러 나가보자는 말이 그 뒤에 이어지니까. 그건 나 자신의 이중성일 수

있다. 나의 무거움, 사회적 의식과 삶에 대한 사랑, 가벼운 취향이 사이좋게 공존한다.

영화감독이 되기 전에 사진작가로 활동했다. 그런 이력과 정체성이 영화 속에 어떻게 반영됐다고 생각하나.

사진을 먼저 시작했기 때문에 이미지와 영상 감각을 깨우칠 수 있었고, 기술적인 측면에서 많은 도움이 됐다. 하지만 영화를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건 나의 언어, 문장, 단어간의 침묵, 분위기, 인상이다. 기계의 움직임이 삶의 움직임에 적응하는 과정이랄까. 음악과의 관계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진을 하면서 많이 배웠지만 그림과 책에서 더 많은 걸 배웠다. 연극도 많이 봤는데, 특히 극의 구조나 뼈대, 그 엄격함을

배웠다. 나는 무질서하고 꿈꾸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연극에서 배운 구조의 엄격함이 나의 판타지와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할까.

누벨바그 감독들은 대개 이론가 출신인데, 당신의 이력과 배경은 상당히 다르다. 어떤 계기로 감독이 됐나.

나는 영화에 대해 잘 몰랐다. 처음 영화를 만들던 25살까지 본 영화가 10편이나 될까. 시네마테크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요즘 젊은 영화광들을 보면, 어떻게 그 많은 영화들을 알고 봤는지 신기하다. 나는 이론가는 아니었지만 생각은 있었다. 책처럼 읽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조이스의 작품을 좋아했고,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자동기술법, 막 시작된 누보로망에 관심이 많았다. 현대문학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세상과 관계를 맺었다고 할까. 50년대 영화 중에 누벨바그가 칭송한 것들도 부정한 것들도 제대로 못 봤다. 하지만 내 첫 작품은, 작업

자체가 매우 이론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나는 포크너의 <야성의 종려>(The Wild Palms)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탈옥수와 남녀 커플의 이야기가 챕터마다 교차되면서 진행되는데, 처음엔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홀수 챕터와 짝수 챕터를 나눠서 읽었다. 다시

순서대로 읽었을 때 작가가 원한 효과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엉킴과 어우러짐. 분리돼 있으면서도 하나로 어우러져 나오는 이야기들. 나는 첫

영화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에서 한 커플과 어촌이야기를 병행시키기로 했다. 관객에게 혼란과 불편함을 주고 싶었고,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동시성을 느끼길 바랐다. 추상적인 시도였는지도 모르지. 포크너와 다른 점은, 두 이야기를 한 공간에서 이뤄냈다는 것이다.

<행복>의 영상은 잔잔하고 아름답지만, 그 내용이 매우 충격적이다. 당시 어떤 생각에서 그 영화를 만들었나.

그 나이, 그 시대에 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다. 나는 행복과 사랑에 대한 그 시대의 경직된 사고를 깨부수고 싶었다. 단순노동을

하는 평범한 남자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다가 우체국에서 만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얘기를, 굉장히 현란한 여름 과일 같은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그 과일 속에 벌레 하나가 들어가 있어서,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보는 동안 불편했다면 그 벌레 때문이었을 것이다. 막스

오퓔스의 <쾌락>이라는 영화 마지막에 ‘행복은 즐겁지 않다’는 대사가 나온다. <행복>에도 그런 정서를 담고 싶었다.

‘불행도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뜻도 된다.

남편의 외도로 아내가 자살한 뒤 새 아내를 맞아 꾸린 가정이 낙원처럼 묘사된다. 행복은 소유를 버리는 데서 온다는 이야기일까.

<행복>은 두 가지 생각으로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남자가 외도를 할 때는 아내와 전혀 다른 유형의 여자에게

매료된다. 블론드 아내라면 흑발 애인이라는 식으로. 나는 아내와 같은 타입의 여자에게 애정을 느끼는 과정을 묘사해 혼란을 주고자 했다.

또 하나는 ‘행복은 더하기할 수 있다’는 남편의 생각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창조해낸 인물들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걸 원치 않는다.

남편은 부인과 애인 둘 다 사랑하길 원하고, 천사 같은 부인은 행복하다면 그렇게 하라고 한다. 부인이 잠에서 깨어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떻게 물에 빠졌는지 나도 모른다. 자살하려던 게 아니라 실수로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진 건지도 모른다. 나뭇가지를 잡으려는 손의 이미지

때문에 부인의 입장이 더욱 애매해지는데, 그것은 자살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남편의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두 번째 아내가 된 애인은, ‘행복하고

불행하다’고 말한다. 아주 잔인하게 표현하자면, 모든 인간은 유니크한 동시에 대체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래서일까. 남자들은 이 영화를 좋아했고,

여자들은 잔인하다고 욕했다. 35년 전의 일이다. 개봉 당시 한 일간지에서 “여기 행복을 영화로 만든 여자가 있다”고 소개한 기억이 난다.

그걸 보고 남편(자크 드미)이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고 의아해하면서, “나도 당신 닮은 다른 여자를 사랑해도 되냐”고 묻기에, 나같은

여자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해 줬다. 남편은 내 영화 중에서 <행복>을 가장 싫어했다. 나의 윤리관에 문제가 있다며 공격하기도

했다. 그가 가장 좋아한 영화는 <방랑자>였다.

<방랑자> 이야기를 해 보자. 모나는 극도로 이기적이고 자폐적이면서, 자유롭고 아름다운, 영화 사상 가장 독특한 여성 캐릭터다.

어떻게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냈나.

나는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되고 싶진 않다. 현실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인물을 만들되, 그 자체로 신비로움을 간직하길 원한다. 평소

길과 역에서 자는 집없는 아이들이 궁금했다. 운행이 끝난 역과 홈리스 수용소에 자주 들러 그들과 얘기했고, 차에 히치하이크족들을 많이 태웠다.

그렇게 축적된 정보로 인물을 만들었는데, 사연을 만들고 심리를 파고드는 건 흥미롭지 않았다. 인물이 만들어지는 순간, 영화는 시작되고 사건이

시작된다. 왜, 어떻게에 포커스를 맞추려 하지 않았고, 길거리를 떠도는 여자의 삶의 외양을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스쳐지나간 사람들이

그녀를 불쌍한 떠돌이, 자유로운 방랑자, 창녀 같은 파편적인 인상들로 기억하고 묘사하게 했다. 나는 퍼즐로 하나의 상을 만드는 게 좋다.

그것도 몇 조각이 모자라는 퍼즐을 좋아한다. 모나의 고독은 수수께끼다. 어떤 도움도 나눔도 거부하는 여자의 이야기이다보니, 영화 자체도

친절할 수가 없었다. 주인공의 죽음이라는 결말을 안고 출발하는, 지독한 영화다. 와 비교해보자.

끌레오라는 여자가 두려움을 안고 파리 시내를 배회하면서 대화와 나눔을 찾는다. 똑같이 배회하면서도, 모나는 거부하고 닫는다. <방랑자>는

상업적으로 꽤 성공했는데,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 차갑고 엄격하게 만든 영화인데 말이다. 영화는, 내가 느끼는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그런 다큐멘터리 이미지 속의 현실, 그리고 픽션 속의 감정을 같이 놓고자 했다. 그런 의도가 <방랑자> 속에 녹아 있다. 픽션인데,

다큐의 질감이 느껴지도록.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다큐이면서도, 등장인물들이 픽션 캐릭터들처럼 감동을 준다. 다큐에서 픽션으로,

픽션에서 다큐로, 변환되고 섞이는 관계 속에, 영화에 대한 나의 접근 방식이 있다.

남편인 자크 드미 감독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나.

언제 어디에서든 남편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반갑고 또 기쁘다. 나는 감독으로서의 드미에 대한 영화를 모두 세편 찍었다. 감독이 되고 싶어했던

어린 시절의 자크 드미에 관한 영화를 남편 생전에 만들었는데, 그는 언제나 어린 시절을 즐겁게 회상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가 영화화됐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했다. 그의 사후에 작품과 작품세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두편 찍었다. 그의 60년대 영화들의 네거필름을

복구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쉘부르의 우산>이다.

영화에서, 일상에서, 최근 당신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인가.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에 지금 나의 관심사가 모두 담겨져 있다. 정치, 철학, 사회문제처럼 한 인간으로 감당하기 힘든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게 다가가 동지의식과 연대감을 확인하는 일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나는 심각하고 진중한 스타일이 아니다. 겉으로 그런 듯이

보이는 영화 속에도, 영화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가 느끼는 쾌락이 녹아들게 한다. 사람들은 돈을 내고 영화를 본다. 인생의 즐거움, 작은

낙으로서의 영화 구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한다.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여성으로서 느끼는 문제의식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여성영화인이라고 해서 여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물론 여성이라는 성적 정체성을 인식하고 있고, 여성의 우정과 연대감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여성이 처한 사회적 조건과 지위를 위해 싸우고 있는 여성들도 많이 만났다. 하지만 여성운동을 위한 투쟁적 다큐멘터리를 만들

생각은 없다. 모든 여성예술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여성의 조건과 지위 개선에 공헌하고 있는 거니까. 50년대 프랑스에는 작가영화인으로서의

여성이 거의 없었다. 누벨바그 그룹에서 나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테크닉을 먼저 습득하고, 영역을 넓히는 데 여성영화인으로서 공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후배들도 예술가가 되려 하지 말고 먼저 테크닉을 습득하고 소유하고, 다양한 포지션에서 활동하길 바란다. 지금 프랑스에는

여성감독이 100명이 넘는데,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는 여성감독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젊은 여성감독들에게, 예비 여성감독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난 본래 충고하는 성격이 아니다. 다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호기심을 많이 갖고 모든 사물에 대해 마음을 열라는 것이다. 모든 감정에,

남자에, 아이에, 여행에, 이웃에, 테크놀로지에 겁내지 말아라.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없다. 주의할 것은, 남자들이 하는 것 같은 영화를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러시아 친구가 하나 있는데 자기도 남자처럼 할 수 있다면서, 전쟁영화를 찍겠다고 덤볐다. 전쟁을 좋아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으면서, 여자는 전쟁영화 못 찍는다는 남자들의 선입견을 깬다고 오기로 시작한 거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좋아하지도 않는

걸 하면서 무엇을 증명하려는 것인가. 남자들에게 뭘 증명해 보일 필요는 없다. 그저 좋아하는 영화를 하면 된다.글 박은영 기자

사진 정진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