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감독 제임스 D. 스턴 출연 제프 대니얼스 장르 드라마(컬럼비아)
총기소지에 관한 9가지 생각
고요한 새벽 5시. 적막을 깨뜨리는 총소리에 깜짝 놀란 헬렌은(조안 알렌)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 거실로 내려간다. 거기엔 남편 워렌(제프 대니얼스)이 바닥에 쓰러진 누군가를 향해 총구를 겨누며 서 있다. 그런데 피를 흥건히 흘리며 죽어버린 사람은 다름 아닌 남편의 직장동료이자 가장 절친한 친구. 남편은 침입자로 오해한 사고였다고 항변하지만, 헬렌은 남편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제임스 D. 스턴의 <레이즈>의 시작은 마치 필름 누아르영화의 미스터리처럼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러나 이 오프닝 시퀀스 이후 이어지는 장면들은 이 영화가 장르적 서스펜스에 기대기보다는 마치 로버트 알트먼의 그것처럼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삶을 콜라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할 때 뜨는 오프닝 크레딧의 배경으로는 미국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총격사건과 오발사고, 그리고 그 희생자들에 관한 뉴스들을 제시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미국의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 중 하나인 총기소지에 관한 이슈를 9명의 다양한 인간군상을 통해 풍자하는 작품인 셈이다. 성공한 사업가 부부인 워렌과 헬렌. 그러나 워렌은 끊임없이 아내와 친구의 관계를 의심하더니 이내 친구를 유인 살해해 버린다. 그러자 남편에게 질려버린 아내는 그를 떠나 컴퓨터 천재 노턴(게리 시니즈)의 비서로 취직한다. 한편 워렌의 변호사는 외적으로야 잘 나가는 명망가이지만, 사적으로는 동성애 애인의 편집증과 잠깐 즐긴 백인 미성년 소녀(안나 파킨)의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처한 잡다한 문제들의 돌파구 혹은 방어물로서 총기를 소지하고 결국 스스로 비탄의 나락에 빠져든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총기소지는 현대사회에서 생존하는 또 하나의 방어책이거나 종교인 셈이며 동시에 자기파괴적인 문제덩어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꽤 그럴듯한 사회적 문제의식에 비해 그 현실감이나 비판의 냉철함은 왠지 좀 떨어진다. 부분과 전체의 변증법을 꿰뚫는 알트먼의 거장다운 영화전략을 이 영화의 파편화된 구조가 좇아가지 못한다는 점도 있거니와, 각 캐릭터 모두가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희극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신 제프 대니얼스나 게리 시니즈와 같은 우리에겐 낯익은 연기파 배우들이 곳곳에 포진하여 친숙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긴 한다. 그렇다면 감독이 내리는 미국 총기소지에 관한 해법은? 이 영화에서 가장 비중있는 인물로 등장하는 헬렌은 영화의 마지막에 결국 미국을 떠나 1년에 총기사고가 고작 12건에 불과한 노르웨이로 가버린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사운드트랙의 가사,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총을 없애버릴 텐데….”
정지연/ 영화평론가 woodyalle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