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 PD는 2010년 EBS에 입사해 지금까지 어린이 콘텐츠 제작에 매진해왔다. 그의 대표작은 EBS의 장수 프로그램 <딩동댕 유치원>(현 <딩동댕 딩동댕>)이다. 몇년 전 이 유치원에 전에 없이 다양한 어린이들이 전학을 왔다. 다문화가정에서 온 마리,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별이와 휠체어 위에서 생활하는 하늘이가 어린이 시청자들과 처음 만난 것이다. 이후에도 이지현 PD가 기획하는 <딩동댕 유치원>은 노키즈존으로 대표되는 아동 혐오, 그간 방송에서 터부시됐던 유아 성교육 등 어린이를 둘러싼 동시대의 사회문제를 끊임없이 경각했다. 그의 신규 프로그램, <어린 철학자>는 어떨까. 이 아고라엔 6명의 어린이 철학자들이 모인다. 이들은 매회 철학 난제 앞에서 목소리를 드높이며 자신 곁의 가족과 친구를, 그리고 세계의 안녕을 사유한다. 또 한번 새로운 세계로 성큼 나아간 이지현 PD와의 대화를 전한다. <어린 철학자>는 매주 수요일 오전 8시20분, EBS 1TV에서 방송된다.
- 처음 <어린 철학자>를 기획했을 때 방송국 내부의 반응은 어땠나.
다들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는 높게 쳐줬지만, 드라마나 기승전결이 없는 방송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걱정했다. <딩동댕 유치원> 때도 고민했던 지점이다. 다문화가정 어린이와 장애 아동이 등장하는 콘텐츠를 ‘재미있게’ 만드는 일이 프로그램의 의의 못지않게 중요했다. 그래서 <어린 철학자>는 토크의 호흡, 컷의 전환, 자막 활용 방식이 기존의 어린이 방송과 다르다. 예능프로그램에서 접할 수 있는 편집을 차용한 것이다. 방송의 대전제인 철학적 사유를 위해선 긴 호흡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는데, 더이상 ‘본방사수’로 방송을 시청하는 시대가 아닌 이상 짧고 촘촘한 방식의 편집이 더 맞아 보인다. 바라건대 어린이도 성인도 모두 재미있게 시청하면 좋겠다.
- 어린이 패널들이 폐쇄형 질문을 바탕으로 진영을 나누어 논박하기보다 개방형 질문하에 의견을 자유롭게 주고받는다. 토론보다 토의에 가까운 형태인데.
아이들이 대개 그렇다. A를 말하다가도 B를 논하는 친구가 있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B에 동화된다. 아이들이 최대한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한다. 대화의 흐름을 저지할 의도가 없다. <어린 철학자>는 제작진이 아이들에게 사전에 대사를 주거나, 토론 중간에 개입해 흐름을 주도하지 않는다. 제작 의도 그대로 성인 제작진은 세트 뒤에 몸을 숨겨 질문만 던지고, 카메라는 세트 가벽에 구멍을 뚫어 그 속으로만 렌즈를 들이댄다. 언젠가는 골수분자 같은 어린이가 합류해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고수하는 상황도 꿈꾼다. (웃음) 그런 친구들을 섭외하기 위해 화술을 훈련한 어린이가 아닌, 소위 날것의 어린이들을 지금도 계속 찾아 나서고 있다.
-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린이들의 논리에 계속 귀 기울여야 하는 현장일 것 같다.
사실 굉장히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방송을 제작 중이다. 방송을 보면 토론 주제를 전달하는 동화 형식의 애니메이션이 프롤로그에, 토론을 마친 후 동화의 결말이 담긴 애니메이션이 에필로그에 깔린다. 이 두 애니메이션을 따로 작업한다. 어린이 패널이 현장에서 시청 가능한 프롤로그를 먼저 만든 후, 아이들의 토론 결과에 따라 이야기의 결말을 다시 써서 애니메이션팀에 전달한다. 애니메이션팀에선 작업을 두번 하는 꼴이니 제발 녹화 전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정해달라고 애원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어린이들이 친구의 의견을 새겨 자신의 경로를 수정하는 경우가 많다.
- 카메라 뒤에서 토론하는 아이들을 지켜볼 때 느끼는 희열과 보람이 있다면.
어린이의 시야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이 크다. 이를테면 아이들 중 열에 여덟은 성공한 유명 인사의 뇌를 이식받을 기회를 거절했다. 엄마, 아빠와의 소중한 추억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뇌를 교체하는 순간 탄탄대로가 보장된다고 설득해도 일확천금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해서 성공을 일구고 싶다고 답한다. 정말 아름답지 않나.
- 어린이들을 위한 방송을 계속 연출 중이다. 근래 체감하는 한계가 있나.
성인에게는 그래도 목소리를 드높일 창구가 있다. 반면 어린이에겐 스스로의 권리를 대변할 기회도, 이를 지켜주려는 사람도 없다. 장애인, 퀴어, 다문화가정 소수자 정체성이 교차하는 어린이일수록 혐오 앞에 더욱 취약하다. 그래서 <딩동댕 유치원>을 연출할 때부터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운 어린이의 시점으로 세상을 보려고 애썼다. 지난해 재팬프라이즈(일본 공영방송 <NHK>가 주관하는 국제 방송상) 심사를 하며 놀랐다. 공영방송에서 청소년 성소수자의 일상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나 콘돔 손인형이 성교육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정규편성되더라. 한국에서는 아직 장애 아동이 출연하면 비장애인 어린이 배우가 연기한 것 아니냐는 질문이 시청자 게시판에 올라오는데 말이다. 이럴수록 나는 어린이 당사자가 가공 없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고 본다. 어린이가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노출해야 한다. 그렇게 어른으로서 최소한으로 개입한 채 어린이가 주체로 서는 장을 계속 마련해주고 싶다.
- 방송사 내규든 방송법이든 제작 환경이 이러한 연출적 비전을 얼마나 지원해주나.
요즘엔, 더 정확히는 <딩동댕 유치원> 이후로는 나를 많이 믿어준다. 처음엔 왜 노키즈존을, 소아과 진료 대란 이슈를 유아들이 보는 <딩동댕 유치원>에서 이야기하느냐는 말을 들었다. 궁극적으로는 시스템을 바꾸어야 하는 문제를 어린이들까지 알 필요가 있느냐는 말도 나왔고. 한데 나는 어린이만을 위해 방송을 만들지는 않는다. 학부모들이 함께 볼 수 있는 방송, 시스템을 바꿀 힘이 있는 학부모들을 움직일 수 있는 방송을 만들고 싶다. 어른이 변해서 어린이가 살기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보호자들이 아이와 함께 방송을 시청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제발 사회 전반을 이루는 사항에 관해 재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 특히 내가 여중, 여고에 다닐 때 받았던 순결교육에 다름없는 성교육을 받은 분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성교육 콘텐츠도 계속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권리 교육과 경계 교육은 아직 갈 길이 멀다.
- <어린 철학자>는 어디까지 나아가길 바라나.
아직 방영 초기라 여러 반응을 모니터링 중인데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 등지에서 <어린 철학자>의 교육 자료를 요청하는 문의가 종종 온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하는 프로그램은 아닐지 몰라도(웃음) 학부모들이, 또 어른들이 의지를 갖고 찾아 나서는 방송으로 자리할 수 있다는 데 뿌듯함을 느낀다. 유해한 미디어 환경에서도 아이들을 지키려는 분들에게 감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