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묵티 자야순다라 감독의 영화가 10년 만에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주류 영화계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스리랑카, 그 안에서도 가장 변방의 풍경에서 길어 올린 SF <스파이 스타>가 관객이 지녔던 상상력의 영토를 저 멀리까지 확장시킨다. 우주 임무를 마치고 귀환한 과학자 아난디(인디라 티와리)가 마주한 지구는 ‘일바이브’라는 미지의 감염병이 창궐한 낯선 행성이다. 찰나의 순간마다 전파가 세계를 연결하는 초고도 기술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고립과 단절의 감각이 그녀를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신체가 잘려 나가거나 사랑하는 이를 잃는 것과 맞먹는 외로움이라는 고통, 그 진창 속에서 우리를 꺼내줄지도 모를 단 한 사람의 도래를 99분 간 그녀와 함께 기다린다. 바깥 세계가 스리랑카에 기대하는 특정한 이미지를 따르는 대신 기술과 과학이 빚어내는 인간의 가장 깊은 정동을 새로운 미래 서사로 다시 쓰는 비묵티 자야순다라 감독으로부터 그 사유의 시작에 대해 들었다.
- <어둠 속의 흰 빛>(2015) 이후 10년 만의 장편이다. 신종 감염병이 창궐한 지구를 배경으로 한 신작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도록 이끈 최초의 영감은 무엇이었으며, 당시 개인적인 상황과 더 넓은 사회적 시대정신은 어떠했나.
팬데믹 기간에 이야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경험했듯 그 시기 우리는 사람들과 원격으로 소통하기 위해 전적으로 휴대전화와 컴퓨터에 의존해야만 했다. 스스로가 기기들의 노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아이디어의 씨앗이었다. 만약 코로나19가 호흡기를 통해 전파되는 팬데믹이었다면, 미래에는 우리 전자기기를 통해 비슷한 종류의 팬데믹이 퍼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과학과 기술로 정의되는 시대에 산다. 기기는 어디에나 있고, 심지어 인공지능(AI)과 그 이상의 기술로 우리의 지성을 능가한다. 기기는 우리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보조 수단이 되었고 미래에는 더욱 많아질 것이다. 동시에 우리의 몸과 마음은 점점 더 기계와 융합될 것이다.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이 그들만의 팬데믹, 즉 우리 종의 존재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질병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 우주에서 돌아온 주인공은 어쩌면 우주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스리랑카의 외딴 산골짜기의 격리시설로 이동하게 된다. 우주와 자연이라는 배경을 병치하여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것들’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제시하는데, 이 '거리' 또는 '외따로 떨어져 있음'의 상태가 주는 감정적 울림은 무엇이었나.
기기를 더 많이 사용할수록 내면의 외로움은 더 커진다. 기술을 사용해 기억을 다시 방문하고, 끝없이 자신을 즐겁게 하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과도 연결될 수 있는 사회에서 깊은 외로움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 외로움은 거리감을 만든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깨달음으로부터, 관계로부터, 그리고 삶 그 자체로부터의 거리 말이다. 기기는 항상 몸 가까이에 있지만 우리를 외따로 떨어져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과 그 힘, 동물, 숲, 폭풍우가 우리의 존재를 형성했던 시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읶지 않나. 이제 우리는 우주를 정복하고 기술을 발명하지만 우리 자신의 두려움 또한 발명하고 있다. 이 두려움은 자연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서 태어나는 것이며, 그 외따로 떨어져 있음이 바로 우리 시대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 주인공이 기거하는 고급 콘도 공간은 어떻게 구상하고 디자인했나. 미니멀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이 마치 고급 인테리어 디자인 책자에서나 볼 법한 느낌을 준다.
이야기가 자연을 배경으로 하지만 인간이 만든 세계 역시 동등하게 존재하기를 바랐다. 이 콘도는 인간의 힘, 발명, 개입,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위해 만드는 인공적인 공간들을 상징한다. 이는 자연 세계와 인공지능의 세계 모두와 대조를 이룬다. 그래서 세 가지 공간이 있는 셈이다. 인간이 만든 공간, 자연의 공간, 그리고 기술과 AI의 공간이다.
- 일반적으로 공상과학(SF)으로 분류되지 않는 영화 중에서 ‘가장 SF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이 있다면. 그리고 그 작품이 조용하고 시적인 당신의 SF 스타일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특히 그의 영화 <붉은 사막>(1964)을 언급하고 싶다. SF는 아니지만 그 영화가 가진 과학과 미래에 대한 감각이 내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타르코프스키의 <희생>(1995)도 SF는 아니지만 세상의 종말과 파국적 가능성에 대해 깊이 고찰한다. 그리고 데이비드 린치.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나 <블루 벨벳>(1986) 같은 영화들의 기묘함이 SF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들은 우주선이나 미래적인 기계 없이도 SF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나를 형성했다.
- 육체 자체에 대한 관심 또한 흥미롭다. 영화는 여성 주인공의 맨살, 신체적으로 매력적인 남성들이 옷을 벗는 모습을 훔쳐보는 그녀의 시선, 그리고 그녀의 절친한 친구가 트랜스젠더 여성인 점 등을 특징으로 한다. 영화를 통해 관습적인 정의에 저항하는 살과 피부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것이 중요했나.
육체 그 자체, 살과 피부의 아름다움은 내게 중요했다. 하지만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잘려 나간 남자의 손, 재로 변해버린 몸 등, 살과 폭력, 그리고 부패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신체와 그 질감, 그리고 그 변화는 모두 감정을 담고 있다. 영화는 언어가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러한 질감을 포착할 수 있다.
- 영화의 세계에서 주인공의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인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녀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결말을 상상했는가.
그녀의 가장 큰 두려움은 외로움이며 그로 인해 모든 것과 멀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긍정적이고 심지어 유희적으로 끝난다. 비극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소리, 진동, 우주의 주파수를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적들과 맞서고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녀는 비극을 통해서가 아니라 삶 그 자체에 대한 신뢰를 통해 두려움을 극복할 것이다.
- 감독이 반드시 이야기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이야기와, 만들어야만 한다고 느끼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스리랑카 밖의 사람들은 나의 나라에서 아마도 아름다움, 가난, 혹은 경제 위기 같은 것들을 기대하겠지만, 내가 영화를 통해 제안하고 싶은 것은 바로 과학과 미래이다. 영국의 작가 아서 C. 클라크는 스리랑카에서 살면서 글을 썼고, SF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들을 남겼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그에 대한 헌사이다. 나는 과학과 인류에 대한 이야기가 소위 ‘제3세계’에서도 나올 수 있고, 우리 역시 SF의 미래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스리랑카, 아시아, 그리고 흔히 저개발 세계라 불리는 곳의 이야기들을 가져오고 싶다. 인류, 기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보여주는 이야기들 말이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이미지들을 만들고 싶다.
Director’s Box
스리랑카 남부에서 저널리스트이자 비평가로 글의 힘을 연마했던 비묵티 자야순다라는 인도와 프랑스에서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27세에 만든 첫 장편 <버려진 땅>(2005)으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거머쥐며 세계 영화계에 데뷔했고, 이후 베니스(<두 개의 세상>), 로카르노(<하얀 빛 속의 어둠>) 등 세계 영화제의 초청작 목록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며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시네아스트로 성장했다. 초기작들에서는 26년간 스리랑카를 뒤흔든 내전의 상흔을 특유의 추상적이고 시적인 영화 언어로 다뤄왔으며, 복귀작 <스파이 스타>를 통해 기술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적 고독을 탐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