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한 / 한국 / 2025년 / 95분 / 경쟁
9.24 B3 12:00 / 9.25 C7 16:30
디지털 시대 이후(2000년대 전후) 영화 제작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영화에 관한 영화’는 피할 수 없는 화두가 되었다. 어쩌면 그 뿌리는 1988년 나이키의 “Just Do It” 캠페인에 있을지도 모른다. 무턱대고 시작하라는 그 구호가 영화라는 매체에도 일종의 집단적 강박으로 스며든 것이다. 이제한 감독 역시 그 집착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2012년부터 독립영화 제작사에서 8년간 일한 그는 2020년 퇴사를 결심하고 직접 카메라를 들었다. 첫 장편 <소피의 세계>(2021)에 이어 <환희의 얼굴>(2024)이 그렇게 탄생했다. 2009년 인도의 고(故) 감독 바빠디띠야 반도빠디아이는 <하우스풀>을 만들었다. 연이은 흥행 참패 끝에 자신의 영화를 걸 극장을 직접 빌려야만 하는 예술영화 감독의 이야기였다. 예술과 자본의 충돌이라는 문제는 이제한의 <다른 이름으로>에서도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보다 형이상학적이고 개념적인 장치로 이야기가 확장된다.
주인공 재현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영화인이다. 남은 시간을 앞두고 그는 동료 지영과 함께 마지막 개인 영화를 찍고자 한다. 위스키와 담배로 생의 감각을 붙들며 무모한 집착을 이어가지만, 아내 수진은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책임한 집착이라며 꾸짖는다. 갈등은 곧 해소되고, 화면에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방금 본 것은 <다른 이름으로>의 첫 번째 단편이었던 셈이다. 이어지는 두 번째 단편 <또 다른 이름으로>는 세 해가 지난 뒤를 그린다. 이번에는 아내 수진이 남편의 미완의 꿈을 완수하려 하고, 지영은 재현의 자전적 시나리오를 위해 닮은꼴 배우를 찾는다. 형이상학적 반전은 지영이 재현의 유령과 대화를 나눈다는 데 있다. 유령은 그녀에게 작업 과정을 일러주는 조언자가 된다. 배우 문인환은 재현과 그의 닮은꼴을 오가며, 다른 셔츠로 갈아입는 행위만으로 정체성을 전환한다. 브레히트식 소격 효과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감독은 관객에게 지적 거리를 유지한 채 영화를 바라보라고 요구한다. 마지막에는 수진을 통해 또 하나의 질문이 던져진다. 거액의 출연료를 요구하는 닮은꼴 배우에게, 수진은 먼저 “당신은 내 남편의 시나리오에서 무엇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그녀는 덧붙인다. “내 돈은 쉽게 번 게 아니고, 차라리 맛있는 음식을 사 먹고, 매주 야구 경기를 보며,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데 쓰고 싶다.” 결국 이 질문은 관객에게 향한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두 단편의 결은 확연히 다르다. 첫 번째 버전은 거칠고 투박하다. 카메라의 시선은 매끄럽지 않고, 지영이 지나치게 튀는 노란 블라우스를 입고 등장하는 순간에는 화면의 균형이 무너져 시선이 쏠린다. 이는 오히려 결말의 희극적 어조를 준비한다. 반면 두 번째 버전은 더 엄숙하고 정교하다. 무대극을 연상시키는 의상 교체, 변주와 도플갱어, 조용한 길과 공원에서 마주치는 인물들, 은근하게 변화하는 감정선은 홍상수 영화의 잔향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관객은 선택 앞에서 갈등하게 된다. 끝없이 볼거리가 쏟아지는 오늘날 현실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하우스풀>의 빈 극장 객석으로 돌아간다. 예술영화 감독들이 줄어든 관객과 마주하는 씁쓸한 현실 속으로. 수진의 질문은 진지하다. 차라리 그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야구 경기를 보며 삶을 만끽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아니면, 인생을 정의할 단 한 번의 표현 충동을 좇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