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 대만 / 2025년 / 124분 / 경쟁
9.22 B2 12:30 / 9.24 CX 09:00
대만-홍콩 스타 서기의 장편 데뷔작 <소녀>는 종종 숨이 막힐 만큼 관객을 압도한다. 답답하고 억압적인 공기가 영화 전반을 휘감으며, 폭력과 학대의 순환, 세대를 거쳐 가정 속에서 형태를 바꾸며 되풀이되는 양상을 집요하게 탐구한다. 배경은 1980년대 후반, 대만의 항구 도시 기륭이다. 주인공은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소녀 샤오리(바이샤오잉). 친구들 사이에서도 좀처럼 목소리를 내지 않는, 웃음이라곤 찾아기 힘든 아이이다. 이는 어머니 촨(가수 9m88)으로부터 이어받은 상처의 유산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촨의 고통은 고스란히 딸의 현실을 어둡게 물들인다.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 치앙(구택)은 반복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어머니는 그 분노를 다시 샤오리에게 쏟아낸다.
정반대의 성향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법. 발랄하고 사교적인 전학생 리리(린핀퉁)는 소극적인 샤오리와 금세 친구가 된다. 리리 역시 불완전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순응하기보다 반항하는 법을 익혔다. 그녀는 샤오리를 이끌어 수업을 빼먹고, 화장을 하고, 비디오방을 드나들며 담배를 피운다. 리리는 샤오리 안에 억눌려 있던 욕망과 색채, 이루지 못한 꿈을 몸소 구현하는 존재다. 샤오리가 드물게 미소를 짓는 순간도 바로 그녀와 함께일 때다.
잔혹한 성장담 <소녀>는 서기가 존경하는 대만 감독 허우샤오셴의 작품들에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사건 중심으로 전개되기보다는 인물들의 내면과 관계를 탐구하는 데 더 무게를 둔다. 갈등이 폭발하는 전쟁터 같은 집, 악몽 같은 사춘기의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서기는 냉정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추악한 현실을 보여주지만, 화면에는 강렬한 현장감과 촘촘한 디테일이 배어 있다. 특히 여성 관객에게 뼛속까지 파고드는 가정폭력 장면들이 그렇다. 만취한 아버지가 집안 물건을 부수고 어머니를 때리자, 샤오리는 자신이 잠드는 곳인 옷장 안으로 몸을 숨긴다.
막스 황과 투슈오펑의 미술, 그리고 여정평의 촬영은, 빽빽이 들어찬 협소한 아파트를 통해 공포와 파멸, 불길한 기운을 세밀하게 쌓아 올린다. 배우들의 연기도 탁월하다. 바이샤오잉은 공허하고 읽기 힘든 표정, 무심한 말투로 샤오리를 완벽하게 체현한다. 리리의 쾌활함은 샤오리의 공허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두 소녀가 나란히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리리가 물고기 모양 구름에 경이로움을 느낄 때 샤오리는 “구름은 그냥 구름일 뿐”이라며 그 순간을 밀어낸다. 결국 우리가 세상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은 스스로 안에 품은 것이다. 고난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평온할 때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샤오리처럼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그 아름다움을 박탈당한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영영 찾지 못할지 모른다. <소녀>는 삶의 본질적 어두움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거칠고 생생하며 지독히 길게 이어지는 이 영화는 결코 편안한 관람을 허락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