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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 #5호 [경쟁] 여행과 나날
김소미 2025-09-21

미야케 쇼 / 일본 / 2025년 / 88분 / 경쟁

9.24 L7 20:00

한국인 ‘이’(심은경)는 일본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살아간다. 흰 종이 위에 손글씨로 지문을 써내려가는 이의 목소리는 담담하면서도 헤어나기 어려운 근심을 품은 듯 들린다. 한글로 쓰인 일기장의 고백을 내레이션 삼아, 우리는 이내 비 내리는 여름 해변에서 만난 두 청춘 남녀의 한철 로맨스를 따라가게 된다. 미야케 쇼가 쓰게 요시하루의 만화 <해변의 서경>을 각색해,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섬마을 10대 버전같은 극중극을 만들어냈다. 우울과 방황조차 생동하는 젊은 남녀의 여름 이야기를 통과한 뒤에도 작가의 혼란은 쉬이 잦아들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은사의 죽음까지 마주한 이는 카메라 하나만 챙겨 든 채 눈 덮인 시골 마을로의 여행을 떠난다. 이또한 쓰게 요시하루의 <눈집의 벤씨>를 각색한 것으로, 무뚝뚝하지만 정 많은 민박의 주인 벤조(쓰쓰미 신이치)가 뜻밖에도 젊은 여성 작가와 우정을 나누는 대상으로 등장한다. 이가 쓴 허구의 ‘나날’, 그리고 액자 바깥의 ‘여행’이 한 쌍을 이루는 것이다.

미야케 쇼는 농인 복서의 일상을 그린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필두로 영화 속 이의 표현과 같이 “언어가 오히려 쫓아내기 쉬운 것들”에 숨결을 불어넣는 연출자다. <여행과 나날>에선 원작 만화라는 재료를 독창적으로 배합해 작가가 쓰는 이야기, 그리고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이루는 경계를 그 무대로 삼는다. 여름과 겨울, 해변과 설원, 쓰기와 보기가 이루는 중층은 말이라는 틀에 질식해가는 이에게 감각적 충만함을 선사한다. 먹고 마시는 일, 작은 범죄로 이어지는 충동과 모험, 호기심과 중얼거림도 여정을 뒤따른다. 때로는 단순함이야말로 가장 깊고 아름다운 것이 된다.

인물의 내밀한 정서를 영화의 장소에 용해하는 미야케 쇼 감독의 필치는 더욱 완연해졌다. <여행과 나날>의 박스형 화면비 속 풍경은 일상의 미세한 동요와 정적인 신비를 제각기 공평히 품는다. 미야케 쇼 감독이 지금까지 보여준 작업 가운데 단연 서정적이고 정제된 쇼트가 돋보이는데, 중요한 것은 이 성취가 기계적 야심의 발현이 아니라 이미지를 대하는 진실함, 그리고 필모그래피를 통한 제련의 결과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정중동(靜中動)의 생기에 관하여, 이토록 정교한 온기를 전하는 아시아영화의 성취를 보는 기쁨이 <여행과 나날>에 있다. 기차와 파도의 소리, 한겨울의 입김, 터널을 빠져나온 뒤 우리를 휘감는 눈부신 설경 속에서 시간과 함께 소생하는 배우 심은경의 얼굴 또한 영혼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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