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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 #4호 [경쟁] 낙인의 자리, 가족의 의미, <지우러 가는 길> 유재인 감독 인터뷰
조현나 사진 최성열 2025-09-20

시작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윤지(심수빈)의 선택을 궁금하게 만든다. 윤지와 불륜을 하던 담임선생은 윤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돌연 종적을 감춘다. 아이를 낳겠다고 고집하던 윤지는 결국 임신 중지를 결심하고, 그런 윤지의 결심을 깨달은 건 기숙사 룸메이트 경선(이지원)뿐이다. 유재인 감독의 첫 장편 연출작 <지우러 가는 길>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사전제작 과정 및 장편제작연구 과정의 졸업 작품이다. 쫓고 쫓기는 윤지와 경선의 여정은 임신과 출산에 관한 고민을 바탕으로 가족의 의미에 관한 논의로 확장해 나간다.

- 첫 장편 데뷔작으로 파격적인 소재를 택했다. 언제부터 구상하던 이야기인가.

오래 전부터 갖고 있던 소재다. 본래는 더 어린 여자 중학생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윤지라는 아이가 선생님과 사랑해서 임신을 했는데 갑자기 윤지가 사라져 버린다. 반장과 몇 친구들이 각자의 이해관계로 인해 윤지를 찾아 나선다는 구성이다. 이 기획의 트리트먼트로 한국영화아카데미 사전제작 과정에 합격했다. 처음에는 세 친구가 2박 3일간 벌이는 로드무비를 생각했는데 수업을 들으며 많이 수정하고 살을 붙였다.

- 학생의 임신, 임신 중지에 관한 서사를 다루며 고민이 많았을 것 같은데. 이와 같은 소재를 다루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나.

우리나라에선 낙인이 굉장히 강력하게 작용한다. 조금이라도 정상 궤도를 벗어나면 차별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사회에서 낙인찍을 만한 사람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반발심이 있었다. 임신과 출산도 마찬가지다. 자기 선택으로 임신을 중단하는 권리가 지켜져야 하는데 애를 당연히 낳아야 한다, 당연히 지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 또한 또 다른 낙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린 나이에 출산한 이들은 전부 책임지지 못할 선택을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나. 한 개인이 아이를 낳지 않기로 택한다면 그 의견을 존중하고, 반대로 아이를 낳는다면 잘 키울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더불어 그런 선택을 한 사람들 또한 함께 살아갈 이웃으로 제대로 받아들여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 실제 사례를 반영하기도 했는지.

오히려 더 보지 않으려고 경계했다. 실제 누군가에게 일어날 법한 일이지만 그것을 토대로 서사를 만드는 건 부담스러웠다. 그럼에도 낙태법 폐지 운동, 임신 중지 약물 허용 등에 관한 뉴스들은 오랜 시간 지켜봤다. 이 기획은 낙태죄가 있을 때부터 구상해 둔 것인데 5~6년 사이 많은 일이 일어났다. 언젠간 이 영화를 보며 ‘옛날엔 이랬구나’라고 말할 날이 오길 바라본다.

-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인물의 연령대를 바꾸게 된 배경은.

인물의 행동반경을 넓히고 행동의 주도성을 더 크게 쥐주고 싶었다. 외부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고, 고등학생은 자신이 애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기도 한다.

- <지우러 가는 길>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무관심하다. 적극적이고 책임도 질 줄 아는 아이들과 상반된 태도다.

아이들의 주도하에 모든 일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위기를 마주한 상황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이 저항해야 할 기득권 혹은 모든 걸 도와주는 구원자로 나오길 바라지 않았다. 대단한 메시지를 담았다기보다는 최대한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 반면 학생들은 조연일지라도 하나하나 뚜렷이 구별되는 개성을 지녔다.

아이들이 까불며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소녀들의 교실을 만들고 싶다고 늘 생각했다. 게다가 윤지 개인은 고난을 겪고 있지만, 윤지를 둘러싼 환경은 그 고난을 하나도 암시해 주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싶었다.

- 윤지와 경선은 정반대의 영역에 놓인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가 같은 캐릭터들이다.

처음 트리트먼트 단계에서 구상했던, 윤지를 찾아가는 세 명의 친구를 전부 합쳐서 만든 게 경선이다. 다만 경선이 어떻게든 어른들을 구워삶아 원하는 바를 쟁취하는 아이라면 윤지는 자존심이 강해서 남에게 절대 부탁하지 않고 스스로 얻어내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경선에게 윤지가 더 눈에 띌 거라고 생각했다. 말한 대로 두 사람이 지닌 결핍이 같고, 그렇기에 모든 걸 혼자 해결하려는 윤지의 마음을 경선이 잘 헤아리고 있기 때문이다. 경선이가 윤지로 하여금 더 씩씩하게 상황을 해쳐 나갈 수 있도록 길잡이를 해주는 역을 담당한다.

- 반복해 드러나는 민영과 윤지의 대립도 흥미롭게 그려진다.

민영은 너무 어려워서 가장 마지막에 완성했다. 윤지와 민영 사이의 시기, 질투,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묘한 우월감 같은 것을 건드려주는 존재이길 바랐는데 어디에서 민영을 퇴장시켜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그래서 수정을 많이 거쳤고 배우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결과적으로 민영은 자신의 삶을 완벽히 가꾼 인물, 그래서 남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 결국 자신의 결혼 생활, 자아까지도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는 인물로 완성했다. 현재의 버전이 가장 현실에 발붙이고 있는 캐릭터라고 느낀다.

- 민영 역에 장선 배우, 윤지 역에 신수빈 배우, 경선 역에 이지원 배우를 캐스팅했다.

민영 역을 캐스팅할 시절, 내가 이 캐릭터에 아직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역할을 잘 소화해 줄 배우가 오길 바랐다. 장선 배우는 관객으로서도 믿음이 있었고 다른 작품의 스태프로 일할 때 현장에서 좋은 기억이 남았다. 이지원 배우는 기획안을 쓰는 단계에서부터 떠오른 배우다. 지원 배우 특유의 똘망똘망하고 귀여운 톤을 선호한다. 프로덕션 단계에서 캐스팅 제의를 했는데 호의적으로 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줘서 빠르게 확정했다. 경선과 윤지는 외모와 목소리 등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길 바랐는데 그런 면에서 심수빈 배우가 적격이었다. 심수빈 배우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지옥만세>의 임오정 감독을 통해서였다. 대학 출강을 할 때 본 괜찮은 친구가 있다며 프로필 사진을 보내줬다. 그런데 사진 외에 자료가 없을 때라 자연히 잊고 지냈는데, 장선 배우를 캐스팅하기 위해 눈컴퍼니에 시나리오를 보냈을 때, 회사에 심수빈이라는 신인이 있다며 만나보겠냐고 연락을 줬다. 미팅 때의 느낌이 상당히 좋았. 결국 만날 사람을 만나게 된 거다.

- <지우러 가는 길>이란 제목은 중의적으로 읽힌 여지가 있다.

처음 제목을 떠올린 건 <지우러 가는 길>을 로드 무비로 기획했을 때다. 여러모로 구성 요소와 서사가 바뀌면서 ‘제목을 바꿔도 좋겠는데’란 생각이 들었는데 결국 더 좋은 제목이 떠오르지 않았다. 임신 중지에 관한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인생에서 나를 나아가지 못하게 붙잡는 과거의 것을 지우고 앞으로 나아가면 좋겠다는 의미가 담겼다.

유재인

다큐멘터리 <해피해피쿠킹타임>부터 단편 <어떤이> <쓰는 일> <과화만사성> 등 유재인 감독은 1~2년에 한 편씩 왕성하게 결과물을 내놓는 연출자다. 구체적인 사건과 현실에서 시작해 등장인물들의 삶을 치열하게 파헤치는 연출력이 돋보인다. 미대를 졸업했고 설치 미술가로 활동한 이력 덕에 유재인 감독에겐 미장센에 심혈을 기울이는 감독일 것이란 기대감이 종종 가닿지만, 실제로 그는 “이미지보단 스토리텔링의 영역”에 훨씬 공을 들인다. 그러나 앞으로 “이미지 중심의 영화로도 영역을 더 넓혀가고 싶다”는 유재인 감독이 밟아나갈 길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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