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저벨 칼란다/타지키스탄, 미국, 카타르/2025/66분/경쟁
9.18 BH 17:00 / 9.19 B2 17:00 / 9.23 L9 2:30
<또 다른 탄생>(원제: Tavalodi Digar)은 66분 러닝타임의 타지키스탄 장편으로, 이저벨 칼란다가 각본, 제작, 연출, 공동 주연까지 도맡았다. 2024년 첫선을 보인 이 영화는 8살 소녀 파라스투의 시선을 따라 서정시처럼 잔잔하고 쓸쓸하게 펼쳐진다. 외딴 바다흐샨 산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파라스투는 순진하면서도 예민한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넓고 예리한 파라스투의 눈은 고요와 슬픔이 가득한 세계를 담아낸다. 고독한 어머니, 죽음을 앞둔 병든 할아버지, 그리고 집 안을 감도는 설명할 수 없는 부재의 기운까지. 어느 밤, 엄마 곁에 몸을 웅크린 파라스투는 묻는다. “사람 이 슬픔 때문에 죽을 수도 있나요?” 어머니는 답한다. “슬픔 때문에 사람은 사라져 갈 수 있단다.” 소녀가 다시 묻는다. “사라져 간다는 게 뭔가요?” “인생의 맛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는 거야.” 엄마는 허튼소리 말라며 파라스투를 재우려 한다.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를 어떻게든 구하고 싶은 마음에, 파라스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빠를 찾아 나선다. 친구 굴리스톤과 함께한 여정에서 두 소녀는 험난한 풍경을 지나며 현자와 파리(페르시아 신화 속 요정), 유령처럼 흐르는 강, 세상의 잊힌 구석에 숨은 무덤들을 마주한다. 둘의 모험은 어린 시절의 한없는 믿음과 관계에 대한 갈망을 담은 시적인 은유로 거듭난다.
의도적으로 더딘 호흡과 명상적인 리듬을 택한 이 작품은 어린 시절의 상실, 때 이른 성숙, 갈망과 슬픔, 그리고 정서적 뿌리에 대한 탐색을 담는다. 아빠를 찾아 나선 소녀의 절박한 여정은 곧 할아버지의 영적 쇠락과 어머니의 숨겨진 슬픔과 맞닿는다. 칼란다의 연출은 차분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시적으로 정교하게 구성된 화면들로 시각적 직물을 엮어낸다. 영화는 오롯이 파라스투의 시선을 통해 전개되며, 현실적 기반 위에 초현실적이고 꿈 같은 감각을 섞어낸다. 세 차례 반복되는 중요한 장면(도입부 한 번, 후반부 두 번)에서 칼란다의 카메라는 멀리서 어머니를 바라보는 파라스투를 오래 도록 담는다. 이 장면들은 단순한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넘어, 사랑하지만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여성의 내면을 상상하려는 시도의 창이 된다.
영화의 제목 〈또 다른 탄생〉 (Tavalodi Digar) 은 이란 시인 포루그 파로흐자드의 대표작에서 차용했다. 영화 속에서는 그녀의 시 두 편이 낭송되며, 마지막 장면에는 “포루그 파로흐자드를 기리며”라는 헌사가 등장한다. 1964년 발표된 파로흐자드의 ‘또 다른 탄생’은 존재론적 갈망과 페미니즘적 각성을 시적으로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된다. 여기서 ‘탄생’은 단순한 육체적 삶을 뜻하지 않고, 슬픔과 상실을 겪은 뒤 맞이하는 영적 갱신, 내면의 재탄생을 의미한다. 칼란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를 아름답게 담아낸다. 말보다 침묵이 더 큰 울림을 담아내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