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을 배경으로 한 ‘의학 드라마’(이하 의드)의 스펙트럼은 넓고도 다양하다. 병원 내 권력투쟁과 의료 시스템의 부조리를 사실적으로 그린 <하얀거탑>(MBC)과 <라이프>(JTBC), 사명감과 인간미를 갖춘 의사들의 성장담을 따뜻하게 풀어낸 <낭만닥터 김사부>(SBS), ‘영웅’으로서의 의사의 활약을 보여준 <중증외상센터>(넷플릭스)까지. 의드라는 장르는 “우리에게는 어떤 병원과 어떤 의사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통과하게 한다. 그렇기에 의드에는 긴장감, 윤리성, 현실성 사이의 균형감이 필요하다.
이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서 <슬기로운 의사생활>(이하 <슬의생>)은 가장 판타지적인 병원을 보여주었다. 율제병원 ‘99즈’를 중심으로 의료진과 환자가 신뢰를 바탕으로 라포르를 형성하고, 서로를 회복시키는 세계. <슬의생>은 일정한 현실감을 유지하면서도 따뜻하고 이상적인 서사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만큼 병원과 의사를 둘러싼 현실이 미화되었다는 비판도 함께 따라붙었다. 이 드라마의 스핀오프인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이하 <슬전생>)은 <슬의생>의 빛과 그림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작품이다.
<슬전생>은 율제병원의 분원인 종로 율제병원 산부인과를 배경으로 1년차 전공의들의 일상을 중심에 두고 펼쳐진다. 여기에 사돈지간이자 병원 선후배 사이인 오이영(고윤정)과 구도원(정준원)의 연애 서사, 다양한 환자들의 사연이 더해졌다. 특히 “죄송합니다”로 시작해 “죄송합니다”로 끝나는 1년차 전공의들의 고군분투가 흥미를 유발한다. 이들은 환자 앞에 서는 것도, 의학적 판단을 내리는 것도 모두 처음인 사람들이다. 실수를 반복하며 천천히 성장하는 이들의 모습은 직장 초년생들의 분투를 그린 드라마 <미생>을 떠올리게 한다. 다만 <미생>이 개인의 성장과 구조의 문제를 연결했다면, <슬전생>은 위로와 유쾌함에 방점을 두며 현실성과는 거리를 둔 점이 다르다.
바로 이 점이 <슬전생>의 한계이기도 하다. <슬의생>이 “이런 병원과 이런 의사가 필요하다”라는 메시지를 비교적 입체적인 서사를 통해 전달했다면, <슬전생>은 전공의들과 환자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연결하지 못한 채 갈등과 감동과 교훈을 단순 반복한다. 더 큰 문제는 환자들의 절박한 이야기가 종종 주인공들의 성장을 위한 배경 장치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환자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다 초음파를 잘 보게 된 자신을 뿌듯해하는 전공의 엄재일(강유석)처럼 말이다.
병원은 단순한 직장이 아니다. 생명과 죽음이 실시간으로 교차하는 공간이다. 환자는 누군가의 성장 서사를 빛내기 위한 조연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절박하고 존엄한 존재다. 특히 배경이 된 산부인과는 생명의 ‘처음’이 시작되는, 절박성이 극대화되는 곳이다. 그러나 <슬전생>에서 환자의 이야기는 독립적 서사로 제시되기보다는 전공의들이 무엇을 배우고 성장하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성장 서사를 중심에 둔 구조가 병원이라는 공간의 본질적 긴장감을 흐리는 셈이다.
드라마 속 서사적 미화는 현실과 만나는 순간, 더 뚜렷한 간극을 드러낸다. 2024년 2월, 윤석열 정부의 의대 증원 계획에 반대한 의사들의 집단행동으로 의료 시스템은 큰 혼란을 겪었다. <슬전생>의 방영도 이 시기와 겹치며 기약 없이 연기되었다. 결국 1년이 지난 후 공개되었지만, 여전히 ‘미운털’이 빠지지 않은 상태다. 의료 공백과 진료 지연으로 현실 병원과 의사에 대한 불신이 커진 시점에서 <슬전생>이 보여주는 병원은 너무도 이상적이다. 현실에서는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을 찾지만 진료를 받지 못한 채 병원과 병원을 전전하는 사례가 빈번하고, 어렵게 의사를 만나더라도 ‘3분 진료’로 끝나는 일이 허다한데 율제병원은 정반대다. 게다가 현실에서는 소위 ‘돈이 되는’ 과에 의사들이 쏠리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데 율제병원 산부인과는 이런 현실과 무관하다. 물론 선하고 유능한 캐릭터들을 통해 우리가 바라는 병원과 의사를 보여주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의 병원이 안고 있는 구조적 한계를 외면한 채 ‘좋은 의사’ 개인의 이야기만 반복한다면 이는 오히려 의료 현실을 비가시화하는 판타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슬전생>을 보다 보면 질문이 생긴다. 좋은 의드의 조건은 무엇일까? 의드의 쓸모는 무엇일까? 병원은 일상성과 위기가 공존하고, 인간성과 시스템이 충돌하는 공간이다. 의드는 재미를 전제로 하되 이 복합적인 공간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며 현실을 비추고 사회적 지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제목에 쓰인 “슬기롭다”는 말은 단지 따뜻함이 아니라 냉철한 자각과 성찰까지 포함한다. <슬전생>은 따뜻한 이야기로 잠깐의 현실 도피적 위로를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병원을 사회 초년생의 성장 무대로만 소비하거나, 현실과의 괴리를 자각하지 못한 채 이상만을 그린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과연 “슬기로운” 이야기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단지 ‘예쁜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check point
의사가 주인공인 드라마지만 환자들의 사연도 드라마의 한축이다. “인생 1일차”가 쉽게 시작되는 게 아님을, 여성의 몸과 출산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깊고도 다양한지 등에 관해 환자들의 사연을 통해 돌아보게 한다. 목숨이 위험했던 출산을 겨우 끝낸 아내에게 둘째 아이를 빨리 가지자는 남편을 향해 아내 대신 이영이 욕할 때 나도 함께 욕했다. 내 맘 그 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