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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추락에서 구한 운동

봉준호의 여덟 번째 장편, <미키 17>의 서사 전개나 장면 구성이 전작들보다 단선적으로 보인다는 일련의 감상에는 일리가 있다. 미키 반즈(로버트 패틴슨)가 열일곱 번째 미키에 이르기까지의 극적인 과정은 순조롭게 이어져 정리되고, ‘미키 17’과 ‘미키 18’이 마주하는 대국면은 미키 17을 잠시 혼란으로 내몰아도 기존의 서사 흐름을 뒤흔들 만한 파급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멀티플’의 난제에 접근하는 영화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케네스(마크 러펄로)와 일파(토니 콜레트)가 미키 17과 18에 연결된 버튼 중 하나를 선택해 폭발시키면 그만이라고 여기거나 나샤(나오미 애키)가 두 사람을 소유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열광하는 모습처럼 그 시선은 명쾌하고 가뿐하다. 외계 생명체 크리퍼와 맞선 클라이맥스는 대치의 규모에 비해 큰 충돌 없이 해결되고, 독재자들은 파멸하며, 인간 프린팅 기계가 폭파되는 엔딩은 미키 17과 나샤의 사랑으로 완성된다.

이 세계의 역학에는 그다지 모호한 구석이 없다. 봉준호의 세계를 심연에 빠뜨리던 회색지대와 중층적인 층위가 말끔하게 해결된 인상은 이에 기인할 것이다. 한편 우주선이라는 한정된 장소나 그곳을 구획하는 경계, 요컨대 나선계단으로 이어진 지하실과 그 안에서 지옥의 불길을 내뿜는 구멍 ‘사이클로’ 등 봉준호의 시공간을 구성하던 특유의 설계는 장르의 세련된 배경으로 기능하며, 전작들과 비교하자면 은유를 생성하고 정념을 불러내는 일에는 무심해 보인다. 평자들이 정치성과 장르성을 아우르는 봉준호의 굳건한 역량에 여전히 주목하면서도, <미키 17>에 의아함을 표하는 건 이런 요소들 때문일 것이다.

그 의아함은 이해할 만한 것이기도 하지만, <미키 17>을 봉준호의 영화들이 노출하던 모순과 불능의 지평이 장르의 관습 안에서 타협적으로 마모된 작품이라고 단정하고 말기엔 어쩐지 아쉬움이 든다. <미키 17>을 돌아보며, 봉준호의 세계에 활동으로든 흔적으로든 줄곧 자리해왔으나 사사롭게 지나쳤던, 이제야 인상적으로 경험되는 특정 운동성과 그의 영화에서 처음 마주한 인물형이 새삼 긴요하고 다정한 주목을 기다린다고 느낀다. 이 영화의 장르적 성취나 정치적 의미에 대한 감상을 반복하기보다는 <미키 17>로 들어가는 다른 문으로 눈길을 돌려 봉준호의 지난 영화들로 이어지는 이상한 통로를 열어보고 싶다. 이 글의 끝이 어디에 닿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익스펜더블의 비운동성

마치 잠에서 깨듯, 눈밭에서 미키가 눈을 뜬다. 자신의 몸이 반토막 나지 않은 사실을 의아해하는 그의 내적독백이 흐른다. 미키는 지금 살아서 안도하는 대신, 죽지 않은 걸 이상하게 여기고 있다. 그는 구덩이로 추락한 상태다. 동료인 티모(스티븐 연)가 나타나 미키를 내려다보며 묻는다. “아직 안 죽었어?” 그는 미키를 구하지 않고 화염방사기만 챙겨 떠나고, 미키의 몸 위로 이후 ‘크리퍼’로 불릴 미지의 거대한 생명체가 덮친다. 미키는 중얼댄다. “천천히 죽기보다 단숨에 삼켜지는 게 낫지.”

<미키 17>의 프롤로그가 알려주는 바는 이런 것들이다. 미키 17은 죽어도 미키 18로 살아날 것이다. 다시 태어날 그에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죽는 순간의 고통은 존재한다. 다가올 죽음 앞에 홀로 놓인 상황이므로, 미키 17의 입장에서라면 충분히 서스펜스가 느껴질 상황이다. 그러나 이 대목을 감싸는 기운은 서스펜스보다는 태평함에 가깝다. 이 감흥은 우선, 미키가 어차피 살아난다는 서사의 전제에서 비롯되지만 무엇보다도 구덩이에 떨어진 미키의 리액션에 근거한다. 미키 17은 그저 누운 채로 죽음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는 티모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크리퍼의 등장에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미키 17에게는 추락에 저항하며 지상으로 오르려는 움직임이 전무하다. 내면을 설명하는 그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 톤은 감정으로 동요하지 않는다. 죽음이 닥칠 예정인 구덩이의 분위기는 위태롭기보다는 안온하게 그를 둘러싼다. 달리 말해 이 도입부의 연출은 서스펜스의 구축에 실패했다기보다는 미키의 운명에서 서스펜스란 불가능하지 않겠냐는 반문을 새겨두려는 것 같다. 거듭 죽는, 혹은 거듭 살아나는 익스펜더블의 기계적이고 무감한 자동성은 유일무이한 사태와 심리와 행동이 절묘하게 만나 긴장의 시간을 조성하는 서스펜스의 리듬과 공존하기 어렵다는 듯이 말이다.

확실히 미키 17, 나아가 미키들은 봉준호의 세계에서 그간 만나본 적 없는 유형이다. 요약하자면 그는 추락에 개의치 않는 인물이다. 잘 알려져 있듯 시각적 이미지로든, 정치적 은유로든 수직의 형상에 사로잡힌 봉준호의 전작들에서 추락은 상승의 전력을 예비한다. 그것은 죽음과 싸우는 생존의 간절한 자세이거나(<괴물>), 지하를 벗어나려는 계급 상승의 저돌적인 망상(<기생충>)이다. 이 영화들에서 인물들은 철저하게 한계지어진 자신의 지평을 확장하거나 그 조건에서 달리 이행해보려는 몸부림을 멈추지 않는다. 그 몸부림은 예외 없이 무참한 좌절에 이르고 말지만, 그 고투의 행로가 봉준호 세계의 시각적 형식과 뼈아픈 질문을 낳으며 부조리와 유머의 활동적 근원이 된다. 봉준호의 영화는 물리적, 계급적, 심리적인 추락을 잠재한 세계질서의 불가피한 속성과 이에 충돌하거나 거스르려는 운동성 양자 사이에서 약동하곤 한다. 그러나 <미키 17>의 프롤로그에서 추락은 기필코 반작용으로 연쇄되는 운동이 아니라, 수용할 상태이자 굳이 도약을 욕망하지 않는 운동으로 보인다. 추락은 죽음을 수긍한다. 어차피 다시 살아날 테니 추락에 반하는 움직임은 소모적이다. 미키 17은 영화 처음부터 행동의 무용함을 내면화한 존재로 등장한다.

이후 영화가 제시하는 미키의 과거 일화들이나 두명의 미키가 출현하는 장면들은 이 도입부의 기조를 강화한다. 요컨대 미키 12에서 16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간략하게 나열하는 몽타주 시퀀스에서 미키의 몸은 백신 개발을 위해 쓰이는데, 그 시간은 실패를 연속하던 실험이 마침내 성공하는 과정을 그린다. 미키가 연신 피를 토하다 죽고 사이클로 에 내던져진 후, 새로 프린팅되어 실험에 투입되는 모습이 반복되는 장면에서, 연구원들은 그를 불구덩이에 투하하기 직전 그가 완전히 죽지 않았음을 발견하고 당황한다. 그때 미키가 심드렁하게 “괜찮아유”라고 말하고 그는 다시 사이클로 속으로 가볍게 던져진다. 미키의 처지를 희화화한 이 장면을 ‘비인간적인’ 제도에 대한 논평으로 읽는 건 과도한 해석일 것이다. 다만, 이 대목은 시퀀스의 유려한 흐름에 제동을 걸지 않고 그야말로 ‘유려하게’ 흡수되는 몸의 패배적인 긍정주의를 전달한다.

미키 18이 케네스를 죽이려고 총을 쥘 때, 티모를 제거하려고 사이클로에 처넣을 때, 그 행동을 막는 자는 미키 17이다. 미키 17이 구하려는 것은, 혹은 지키려는 가치는 무엇일까. 미키 18이 미키 17의 저항적인 버전이라고 단순화하긴 어렵지만, 미키 18의 출현으로 인해 미키 17이 외부의 폭력성만이 아니라 자기 안의 폭력성 을 감지하지 못하거나 회피한 존재라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그에게는 폭력에 대한 자의식이 없다. 미키 17의 ‘평화’적인 면모는 미키 18의 공격성보다 실상 기만적이다. 미키 17이 없애야 할 유일한 대상이 있다면, 그건 케네스도 티모도 아닌 미키 17에게 자꾸만 적대의 대상을 환기하는 미키 18일 것이다. 에필로그 속, 미키 18이 사라진 자리에서 미키 17은 인간 프린팅 기계를 폭파하며 ‘다른 미키들이 살아볼 기회를 없앤 것 같아 죄책감’이 든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가 누르는 버튼, 폭파하는 기계의 맥락을 잘 알지 못한다. 그는 구조에 대한 인지가 없다. 그러니 이 결말을 미키의 성장담이나 해피엔딩으로 보는 견해에는 이견을 제출할 수도 있다. 그는 끝내 체제에 무감한 낭만적 감상주의자다. 식민국 최하층에서 지도자의 연인으로 등극한 어리둥절한 백인 남성, 굳이 이름 붙이자면 반행동주의자보다는 ‘비행동주의자’라는 말이 적합한 행태로 질기게 생존한 존재. 비행동주의자가 훼손되지 않은 말간 얼굴로 살아남아 신분상승에 성공하는 결말은 그런 세계를 향한 봉준호의 비관주의를 밝고 명징하며 왠지 인공적인 표면으로 가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초반, 미키가 우주를 부유하며 방사능에 노출되는 실험에 임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상부의 지시에 따라 장갑을 벗자마자 미키의 손은 툭 잘려 그에게서 멀어진다. 그 손의 기이한 움직임은 우주선 내부의 창을 통해 다시 보인다. 그간 봉준호의 세계에서 인물들의 행동력은 주로 손과 다리의 부단한 활동으로 재현되어왔다. 그것은 안쓰러움을 유발하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움직임으로 감당할 수 없이 거대한, 혹은 복합적인, 혹은 실체가 모호한 상대를 쫓고 쫓는다. 괴물을 피해 달리며 잡은 손은 딸의 것이 아니며, 화살을 쏘고 화염병을 던져도 괴물을 쓰러뜨리지 못한다(<괴물>). 대형트럭과 달리기로 겨뤄 작은 맨손으로 차에 매달리고 지하도의 인파를 헤집는 추격전으로 겨우 구출해낸 반려동물은 다시 납치된다(<옥자>). 인물들의 기동력이 목표에 명중하는 경우는 희박하고, 그리하여 이들의 손과 다리의 활동은 결국 요란한 헛수고로 씁쓸하게 돌이켜지곤 하지만 바로 그 면모가 봉준호의 장르에 기묘한 생기를 불어넣는 운동성의 요체다. <설국열차>에서 아들을 빼앗긴 후 메이슨(틸다 스윈턴)에게 감히 신발을 던진 하층민 남자는 어떤 대가를 치렀던가. 요원들의 강압에 기차 창밖, 빙하의 추위에 노출된 남자의 팔은 동상에 걸려 결국 절단된다. 손과 다리로 허구의 활기를 확보하는 봉준호의 영화가 상상할 법한 최악의 처벌인 셈이다.

<미키 17>에서 무중력을 유영하는 미키의 손은 활동보다는 풍경이라는 단어에 더 어울린다. 봉준호의 전작들에서 쳇바퀴를 돌지라도 기를 써보는 보잘것없는 신체의 가쁜 동작과는 성질이 한참 달라 보인다. 미키에게서 분리되어 광활한 우주를 둥둥 떠가는 손의 더없이 우아한 동선, <설국열차> 속 남자의 잘려버린 팔처럼 고통에 신음하지도 마비되지도 않으며, 아무것도 겨냥하지 않고 무엇도 ‘하지 않는’ 그 손의 운동성은 역으로 미키의 비운동성을 일찌감치 시사하는 것 같다.

밧줄의 동력

프롤로그에서 티모는 미키를 버려둔 채, 줄을 붙잡고 올라가며 말한다. “밧줄도 여기까지밖에 안 내려와.” 간사한 변명이지만, 어차피 미키도 티모의 줄을 잡을 생각이 없다. 수직의 형상으로 이뤄진 시공간 속 추락한 상태에서 남겨진 행동의 가능성은 그 줄을 붙잡는 일뿐이다. 밧줄은 사소하게 버려질 물건이 아니다. <괴물>에서 현서(고아성)가 죽은 이들의 옷가지로 밧줄을 만들어 하수구 위로 던지는 행위, 그리고 그의 키로 닿을 리 만무한 높이에 걸쳐진 그 줄의 형상은 무력하기 짝이 없으나 상승을 포기하지 않는 소녀의 안간힘을 표식한다. 하수구에 도착한 강두(송강호)가 딸 대신 남은 그 짧고 초라한 줄을 타고 내려가다가 줄 끝에서 현서의 이름표를 발견하고 흐느낄 때, 하수구 바닥에 닿을 수도, 지상으로 오를 수도 없는 애매한 위치에서 대롱대롱 매달린 아비의 뒤늦고 쓸모없는 짓은 그가 괴물을 쫓으러 그 위태로운 줄을 붙잡고 기어이 다시, 겨우겨우 올라가는 행동을 위한 것이다. <괴물>은 중력에 맞서 (부녀의) 소멸에 저항하는 바로 이 움직임에 강력한 허구의 힘을 허락한다.

<미키 17>을 보며 문득 <괴물>의 장면이 떠오른 건, 프롤로그 속, 밧줄에 무관심한 미키의 모습만이 아니라, 나샤와 아기 크리퍼 사이에서 줄을 두고 일어난 불시의 움직임 때문이다. 나샤와 아기 크리퍼의 장면에는 <미키 17>의 프롤로그에 깃든 태평함과 <괴물>의 하수구 대목이 자아내는 처절한 고립감과는 다른 활동의 기운이 선명하게 각인된다. 나샤는 크리퍼 집단 학살 계획을 세우는 케네스 앞에서 크리퍼가 미키를 구해준 일화를 언급하며 원주민으로서 크리퍼의 정당성을 소리 높여 외치고, 케네스는 어린 크리퍼가 한쪽 끝에 달린 줄을 사이클로 축에 걸어 불구덩이로 떨어뜨릴 상황을 만들며 위협한다. 그러나 케네스가 손에서 줄을 놓는 순간, 나샤는 수갑 찬 몸을 던져 입으로 줄을 단숨에 물더니 사이클로 내부로 기운 힘의 방향을 바꿔 자신의 몸으로, 정확히는 입으로 땅 위에서 버틴다. 그 운동성의 모양새는 일명 ‘도르래 작용’이라 불릴 만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봉준호는 이보다 한층 쾌활한 ‘도르래 작용’을 <옥자>에서도 시도한 적 있다.

미자(안서현)와 옥자가 여느 날처럼 누리던 오후의 평온함은 미자가 절벽에서 갑자기 추락하며 한순간 요동한다. 다행히 미자는 밧줄을 붙잡은 상태고, 옥자는 커다란 발로 밧줄을 밟고 있으나 점점 절벽쪽으로 미끄러지자 그 줄을 재빠르게 입으로 낚아챈다. 그러나 옥자의 무게로도 절벽 아래로 향하는 힘을 이기지 못하는데, 이때 옥자의 결단이 위기를 타개한다. 옥자의 머리를 스친 신통한 묘수를 그의 시점숏으로 대담하게 삽입한 이 대목에서 옥자의 눈에 띈 건 절벽 끝에 말뚝처럼 박힌 나무다. 옥자가 그리로 내달려 입에 줄을 문 채 나무를 한 바퀴 휘감자, 옥자의 몸이 땅으로 떨어지는 동안, 그 육중한 움직임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자의 몸이 절벽 위로 상승한다. 이 장면이 그저 동물의 희생을 신비화한 구도에 그치지 않는 건 옥자와 미자를 잇는 도르래 운동이 옥자의 재빠른 판단력과 결연한 행동력의 과정임을 세밀한 리듬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수풀 속으로 추락한 옥자가 죽지 않고 마치 잠에서 깨듯 일어나 미자와 마주 보는 광경은 일촉즉발의 수직적 흔들림이 최선의 움직임을 거쳐 마침내 평온한 수평의 지대에 안착했음을 보여준다. 옥자가 여기서 주관한 자율적이고 지혜로운 활동의 쾌감과 그것을 끌어안은 영화의 상상력은 이후 옥자의 주체성이 완전히 박탈당하는 실험실과 공장에서는 발현되지 못하고 경직되어 수축한다.

줄을 잡는 옥자의 입이 동물성의 충심을 부각한다면, 나샤의 입은 부자유한 조건에서 움직임을 확보해내는 인간의 본능을 펼쳐내는 것이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기 크리퍼에 연결된 줄을 무는 그 입의 즉각적인 실행력은 나샤가 아기 크리퍼의 운명을 좌우하기 직전 케네스를 향해 쏟아내던 정의감에 찬 말들이나 케네스와 일파가 끊임없이 주절대는 허언을 압도한다. 옥자와 미자의 도르래 운동이 상호 교감의 애틋한 역사를 바탕으로 한다면, 나샤와 아기 크리퍼의 그것은 ‘추락을 막는다’라는 단 하나의 목적에 직감적으로 복무한다. 옥자와 나샤의 도르래 운동의 공통점은 힘의 우위를 점한 존재가 타자의 추락을 감각하고 그와 관계하는 방식을 시각적으로 활성화하는 데 있다. 이 운동이 대단한 이타심의 발로라고 서사적인 의미를 치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봉준호는 <옥자>와 <미키 17>의 서스펜스를 절벽에 걸친 줄에 의지해 발버둥치는 존재보다는 상층에서 그 줄을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자에게서 발견하려는 것 같다. 적어도 이런 장면에서 그가 의도하는 건 그의 세계에 줄곧 따라붙는 풍성한 은유와 수사가 아니라, 필사적인 행동력 그 자체일 것이다.

“한 존재가 구덩이로 추락하니, ‘나’는 붙든다.” 이것이 <옥자>와 <미키 17>이 형상화한 도르래 운동의 유일한 논리다. 물론 나샤에게 돌연 정치적 각성이 일어났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는 이전 장면에서 케네스에게 총구를 겨눈 미키 18을 제지하며 케네스를 보호하던 요원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케네스의 교활한 액션을 순식간에 중지하는 나샤의 육체적 리액션에는 미키 17의 비운동성과 확연히 대비되는 생동감과 돌파력이 있다. 미키의 손은 무력하게 잘려 우주를 방랑하지만, 나샤는 손이 없어도 입으로 (말하지 않고) 실천한다. 미키 17이 엄마 크리퍼와 번역기를 사이에 두고 웅얼웅얼 언어를 교환하는 동안, 나샤는 입에 줄을 물고 손이 묶인 채 뛰어올라 일파를 내리치며 그의 목을 조른다.

봉준호의 지난 세계에서 상층에 닿으려는 아귀다툼 속에 추락하고 서로 추락시키는 인간들의 얽히고설킨 행각과 관계를 떠올리면, 옥자와 나샤가 일으킨 움직임이 단순하고 이상적으로 보이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타인을 구출하고 구원한다는 고귀한 메시지에 앞서, 가는 줄 하나에 자신의 존재를 걸어 타인의 무게를 버티는 본능적인 행동으로 경험된다는 점을 주목하고 싶다. <옥자>와 <미키 17>에서 도르래 운동은 반드시 추락과 결부되어 두 항 사이에 일어나, 불균형한 힘으로, 그러나 어느 한쪽의 포기 없이 지탱된다. 추락, 두 항, 불균형한 힘, 무엇보다 지탱. 그러니 <괴물>에서 현서의 밧줄이 기능하지 못한 건, 상층에 가까스로 닿은 그 줄을 기꺼이 쥐고 버텨줄 존재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사실이 이 영화가 두고두고 곱씹는 외로움과 서글픔일 것이다. 한편 <플란다스의 개>에서 윤주(이성재)의 찌질함이 가장 강조되는 대목은 도르래 운동이 비열하게 시도되는 장면에서다. 개와 인간의 수평적 동행을 위해 고안된 목줄을 그는 지하실 천장 파이프라인에 걸어 수직의 구도를 만들어서 살해 도구로 사용하려 한다. 평지를 걷던 개의 발을 공중에 띄운 채, 줄의 한쪽 끝을 잡고 쪼그려 앉은 그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 그 형상은 수치스럽다. 오용된 도르래 구도는 다행히도 금세 중단되지만, 윤주는 이후 또 다른 개를 옥상에서 던져 기어코 죽여버린다. 우스갯소리처럼 들릴 가정이지만, 봉준호는 이미 첫 장편에서 이렇게 선언하는 것만 같다. 악행은 직접, 너의 손으로. 도르래 운동을 더럽히지 말라.

도르래 운동의 꿈

생사를 걸지 않아도 되는 도르래 운동의 예외적인 경우라면, <설국열차>의 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초반, 주요 인물들 사이에서 조용하게 등장해 화면에 깊은 존재감을 새기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꼬리칸의 삽화가다. 2층 침대에 앉아 혁명을 준비하는 이들을 내려다보며 그림을 그리던 그는 도르래 원리를 이용한 장치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다. 비좁은 기차 내부에서 1층과 2층의 높이 차가 그리 크지 않아 보이므로 한쪽에는 삽화가를, 다른 쪽에는 추를 얹은 이 장치의 움직임은 서사 내적 필연성을 지니기보다는 수평으로 거침없이 연속될 시공간의 호흡을 잠시 거르는 수직의 소박한 운동 정도로 보인다. 동시에 그 운동은 1층과 2층을 오가며 하층민들의 일상과 혁명의 풍경을 정밀하게 바라보면서도 그 풍경에 직접 뒤섞이지는 않는 삽화가의 시선의 유동성과 연동되기도 한다. 그러나 <설국열차>는 이러한 도르래 운동을 다시 재현하지 못한다. 열차의 머리 칸이 필요로 하는 건 대상과의 거리를 확보하고 기록하는 관찰자의 눈이 아니라, 도르래를 가동할 새도 없이 바닥 아래의 기계에 손을 뻗어 그곳에 갇힌 아이를 꺼내며 부서지는 신체의 직접성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편의 영화가 감내해야 할 운명은 그런 것일까. 세계를 응시하는 삽화가의 안정적이고 유연한 도르래 운동을 꿈꾸지만, 스케치 속 풍경을 넘어서 어느새 무섭게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세계의 한가운데에 손을 갈아넣으며 그와 함께 피 흘릴 수밖에 없는 운명. <미키 17>은 그 사이 어디쯤에서 창조되었을까. 미키 17의 비운동성을 경유해서 나샤의 도르래 운동을 지나 이 글은 이처럼 엉뚱한 물음이 피어나는 곳에 도착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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