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에 오르기
시미즈 히로시의 1948년작 <벌집의 아이들>에서 주요 인물은 떼지어 거리를 떠도는 전쟁고아들이다. 헐벗은 나날에도 아이들은 나름의 방식을 터득하며 씩씩하게 살아가는데, 유독 한 소년의 연약함이 눈에 밟힌다. 바다에서 엄마를 잃은 후, 바다만 보면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요시보, 그는 다른 아이들의 활기와 속도에 언제나 뒤처져 결핍감과 슬픔을 호소하는 울보다. 움막에서 시름시름 앓던 요시보는 무리에서도 가장 어른스러워 보이던 아이가 찾아오자, 애걸한다. 산에 가면 바다가 보일 거야, 바다를 보면 병이 나을 거야, 나를 산에 데려가 줘, 부탁이야, 나를 업고 가줘. 둘의 눈이 프레임 바깥을 향한 지 얼마지 않아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업고 정말로 산을 오르는 광경이 펼쳐진다.
가여운 두 소년의 무리한 여정에 바다는 금세 화답하리라. 이 숏만 지나면 소년의 눈에 바다가 담기리라. 그러나 기대는 이내 부서진다. 무려 5분에 걸쳐 숏 수가 점점 불어나는 중에도 바다는 나타나지 않는다.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능선과 어느새 절벽에 가까워진 비탈을 한 아이가 온몸으로 기어오르는 동안, 다른 아이는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매달린다.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한다는 말인가. 영화가 그 고된 육체의 시간을 지연하기 위해 단순한 동선을 부러 여러 개의 숏으로 가혹하게 조각낸다는 인상마저 든다. 카메라는 산등성이에서 움직이는 아이들의 포개진 몸을 아주 멀리서 응시하거나 가파른 경사에 자꾸만 미끄러지는 소년의 헐벗은 발을 가까이서 쳐다본다. 이미 시작했으므로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멈출 수 없는 운동, 아픈 아이의 ‘보고자 하는’ 소망과 그 소망을 두 다리에 짊어진 한 소년의 책임만이 이 장면을 지탱한다. 이보다 절실한 ‘영화적인’ 움직임을 떠올릴 수 없다.
마침내 두 아이는 산꼭대기에 이른다. 산 아래로 바다가 보인다! 아니,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상에 이르자마자 요시보는 땅에 널브러진 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이 사실을 인지한 소년은 도움을 구하러 그 거친 산길을 다급히 되돌아 내려가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한자리에서 소년의 허망하기 짝이 없는 동선을 물끄러미 지켜볼 따름이다. 더없이 가혹한 이 순간의 진실은 단 하나다. 그토록 열망하던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으나, 정작 요시보는 바다를 볼 수 없다. 소년의 희생 덕분에 세계는 움막에서 바다 앞으로 가까스로 이행했으나, 그 움직임은 보상받지 못한다. 두 아이의 바람에 바다는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바다는 너무 늦게 반응하고 만다. 적확한 시간을 놓친, 어쩌면 거부한 바다의 반응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마주한다. 요시보는 두 눈을 감은 후에야 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 묻힌다.
인과 대신 관계
리액션, 자기 안에 액션의 잔상과 기억을 품고 또 다른 반응을 예비하는 운동. 영화는 그 운동의 연쇄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 과정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관성의 작용 혹은 논리적이거나 자연적인 질서이기 전에, 필사적인 마음과 실천의 산물임을 공들여 생각하지 않는다. 리액션을 기다리는 순간이 이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는 또 다른 순간으로 연결되는 건 다시 말하지만, 그저 당연한 일일 수 없다. ‘바다를 보면 병이 나을 것 같다’는 요시보의 고백이 들려주듯, 그건 변화를 향한 의지이기도 하다. 물론 <벌집의 아이들>처럼 그 의지가 늘 보답받는 건 아니다. 어떤 영화는 그 의지를 실패시켜 그것의 간곡한 가치를 쓰라리게 보존하는 길을 택한다. 무덤 뒤로 보이는 바다 앞에 더이상 요시보는 없어도 이 장면은 앞선 고행길을 망각하지 않으려 아이의 부재를 껴안고 뒤늦게 진동한다. 화면 한 귀퉁이에서 미약하게든, 스크린 전체에서 강렬하게든, 그러한 떨림을 발견하고 주시하고 느낌으로써 한편의 영화는 조금씩 달라지는 길을 찾아간다.
리액션이 세계에 일으킨 변화에 관해서라면, 가장 감동적인 언급은 구로사와 기요시가 강연록(<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에 적은 짧은 후기에 등장한다. 그는 30여년 전 로베르 브레송의 <몽상가의 나흘 밤>(1971) 상영에 앞서 하스미 시게히코가 관객에게 내준 과제를 떠올린다. “주인공이 어떻게 자살을 단념하는지 ‘잘’ 보십시오.” 영화가 시작되자 구로사와는 인물이 자살하지 않는 이유가 전혀 나오지 않아 “어안이 벙벙해졌다”라고 당시의 기분을 묘사한다. 누군가 죽으려고 하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자, 그가 시도를 멈추고 자리를 뜨는 모습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구로사와는 이어 자신이 본 장면을 이렇게 정리한다. “인간이 무언가를 행한다. 주위가 그에 반응한다. 그걸 촬영하기만 하면 ‘왜’라는 묘사는 아예 필요가 없다. 모두가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은 채 다음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아무래도 그런 표현인 듯하다.” 그가 적어 내려간 다섯개의 평범한 문장은 단순한 배열만으로 세계의 굳건하고 아름다운 내적 규칙에 도달한다. A가 세상에서 사라지려 한다-B가 A를 본다-A는 동작을 중지하고 세계의 시간은 지속된다. 대사도 이유도 필요하지 않다. 응시의 반응만으로 벼랑 끝 존재가 구해진다. 아니, 세계가 누군가를 잃지 않는다. 이 얼마나 고요하게 이루어진 강력한 변화인가. 브레송은 말했다. “한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들과의 접촉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변형이 없이는 예술도 없다.”
구로사와가 쓴 반응의 마법에 사로잡혀 가물가물한 기억을 안고 <몽상가의 나흘 밤> 도입부를 다시 보는 동안, 그의 언술이 누락한 세부에 눈길이 갔다(돌이켜보면 구로사와가 말한 ‘반응’을 낯선 이가 던진 무언의 응시로 신비화해서 그 영향력을 과장한 쪽은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여자가 다리 난간에 서자, 그를 지나쳐 길을 가던 남자가 뒤돌아 여자에게 향하고 근처를 지나던 차에서 두 사람이 내려 다리로 다가온다. 경찰차도 주변에 멈춰 상황을 주시한다. 남자가 여자 곁으로 와서 팔을 붙잡는다. 직접적인 대사와 동선과 행동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자살을 막는다. 여자를 죽음에서 삶으로 당기는 힘, 심오한 서사 내적 이유는 아니라 해도 여기 물리적인 동력이 명백하게 작용하므로 ‘왜’라는 묘사가 전무하다는 구로사와의 감상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왜’라는 묘사는 아예 필요가 없다”는 그의 확신에는 여전히 매혹적인 구석이 있다. 그것은 영화에서 한 장면과 다른 장면을 잇는 ‘왜’가 고정된 의미로 주어진 게 아니라(행여 감독이 부여했더라도), 무형의 에너지로 장면 사이에 꿈틀대며 우리의 발견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나는 이 말에서 자유를 느낀다.
<몽상가의 나흘 밤> 도입부에서 서로 모르는 채 흩어져 있었을 사람들의 숏은 마치 쇠붙이들이 어느새 자석에 이끌리듯, 한 장소에서 일시적일지언정 단단히 엮여 같은 곳을 바라본다. 이 순간은 증명한다. 인과는 미약해도 관계는 강력할 수 있다. 인과를 내세우지 않아도 관계는 일어날 수 있다. 어쩌면 관계에서 비로소 인과가 시작될 수 있다. 영화의 조각들은 그렇게도 꿰어진다. 영화의 장면은 서사의 세세한 인과율보다 같은 시공간을 지나는 존재의 운동 양식만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영화가 우연의 얼굴을 한 파편적 운동을 서로에게 반응하는 필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때로 그 움직임들이 바로 그 시간, 그곳에 있다는 사실만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존중하는 마음가짐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니 영화의 고유함이란 반응의 방식을 탐구하는 모험심과 반응의 시간을 조율하는 골똘함에서 빚어질 것이다. 물론 알고 있다. 이러한 비평적 단언은 얼마나 손쉬운가. 다행히도 2024년 새해를 맞이하며 만난 몇편의 작품들이 이 단언에 여러 개의 구체적인 길로 인도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은퇴를 번복하고 만든 <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 켄 로치가 은퇴작이라고 선언한 <나의 올드 오크>(2023), 자파르 파나히가 출국금지 상태에서 찍은 <노 베어스>(2022)가 그들이다.
보이지 않는 바깥
보이지 않는 세계에 반응하는 영화는 어떤 모습일까. 현실의 압력을 견디면서도 그 현실을 자기 몸에 새기는 허구는 어떤 형상일까.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자문한다. 가난한 노동자 안사의 집에서 유일한 사치품은 식탁에 놓인 라디오, 지친 심신을 달래줄 음악의 거처다. 그러나 라디오를 켜자마자 바로 들려오는 소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소식을 전하는 뉴스다. 전쟁의 참상과 무고한 죽음을 알리는 앵커의 건조한 목소리가 비좁은 실내에 흐르는 장면에는 의아한 점이 있다. 인물들은 마치 무엇도 듣지 못한 것처럼 동요하지 않고, 화면에도 별다른 균열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음성은 이들의 일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럴 의지도 없어 보인다. 이런 상황과 인상은 반복된다. 스펙터클도 극성도 제거된 바깥의 리얼한 목소리는 허구의 막을 찢어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인물의 세계로 밀고 들어오면서도 정작 그들의 반응을 기대하거나 유도하지 않는다. 그 자세에는 무서운 무감함, 이상한 꼿꼿함이 있다.
이 음성의 정체를 체감하게 된 순간은 안사와 홀라파가 가라오케 바에서 우연히 만나 호감을 표현하는 대목에서다. 영화는 이들을 한 화면에 동시에 담지 않고 다소 고집스럽게 두개의 숏으로 나눠 나열한다. 안사를 주시하는 홀라파의 숏, 홀라파를 응시하는 안사의 숏이 교차할 때, 편집상 이는 둘의 시선 교환을 의미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화면 바깥 어딘가를 바라보는 안사와 홀라파 각각의 초상을 대면한다. 영화가 둘을 거듭 엄격하게 분리한 다음 이어 붙인다는 인상(이러한 방식은 이후 무대 위 가수와 객석의 관중을 담을 때도 고수된다), 그로 인해 느껴지는 두숏의 물리적, 심리적 간격과 시차에 의해 엉뚱한 의문이 고개를 든다. 이들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두숏 사이에 오직 기운으로만 잠재된 지대를 가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가 감히 정착할 수 없는 곳, 이미지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 섣불리 허구의 서사로 만지기 어려운 곳, 라디오 음성이 불러오던 비가시적 바깥. 말하자면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이 생략된 지대를 환기하고 의식해야만 다음 숏에 이를 수 있다. 안사와 홀라파의 눈은 보이지 않는 그 지평을 통과한 후에야만 비로소 상대의 얼굴에 닿을 수 있다. 그렇게 서로에게 도달한 둘의 사랑을 그저 달콤한 낭만과 기적의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카우리스마키의 단출하고 평면적인 프레이밍은 동시대 피 흘리는 세상과 접속하기 위해 은밀하게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인가. 많은 이들이 안도하는 이 영화의 충만한 결말이 나는 불안하다. 마침내 한 화면에 모인 안사, 홀라파, 강아지 채플린이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카메라가 바라볼 때, 앞서 영화를 지탱하던 간격, 거리, 시차의 흔적은 지워진다. 홀라파의 절뚝이는 걸음마저도 다른 요소들과 쾌활하게 조응한다. 이 장면의 리듬은 매끄럽다. 이들이 향한 곳에서도 라디오 음성은 들릴까. 이들의 여정은 보이지 않는 그 소리를 여전히 감지할 수 있을까. 나는 모두가 기쁘게 맞이한 결말을 헤집으며 어딘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그림자를 찾아 자꾸 두리번거린다.
리액션의 결기
액션보다 큰 리액션이란 무엇일까. 단지 강도의 차원이 아니라, 관점과 태도의 측면에서 액션보다 ‘큰’ 리액션은 어떻게 일어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는 상상하고 실현한다. 흑백의 스틸 이미지 속, 백인 몇몇이 어딘가를 향해 사진 찍지 말라며 고함친다. 얼마 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멈추고 컬러영상으로 이 소란의 현장이 베일을 벗는다. 버스 안에서 사진을 찍던 야라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이제 막 폐광촌에 도착한 시리아 난민이다. 버스 밖, 백인들은 이들을 반기지 않는 주민이다. 그중 한 남자가 카메라를 빼앗아 부순 후에야 사태는 끝난다. 분노하는 백인들의 초상은 난민과 관객의 눈에만 잠시 비친 뒤, ‘사진’이 되지 못한 채 증발한다. 그들이 적대와 혐오에 사로잡힌 자기 얼굴을 마주할 기회는 사라진다. 이제 영화는 생채기만 잔뜩 새겨진 도입부의 흑백 이미지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두 힘이 불화한다. 야라의 카메라 앞에서 마을 주민들이 꾸밈없는 얼굴로 화답할 때, 난민과 주민의 사진이 어둠 속에서 따스한 빛으로 영사되어 마을 역사의 일부가 될 때, 영화는 타인의 삶과 물리적,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카메라의 선한 역량을 되새긴다. 그러나 도입부의 성난 무리는 여전히 같은 자리다. 아니, 오해, 불신, 미움으로 요란한 첫 시퀀스의 상태는 변화의 계기를 밀쳐내며 점차 악화한다. 혐오를 합리화하는 자들은 처벌될 것인가, 개조될 것인가. 예상과 달리, 켄 로치는 이들의 장면에 더이상 접근하지 않고 서사의 방향을 틀어 다른 목적지로 향한다. 야라 아버지의 부음에 조문객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할 무렵에는 그다지 특별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앞서 아예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사방에서 끊임없이 나타나 조문 행렬을 이룰 때, 이 장면은 범상하지 않다. 가족조차 정확한 행방을 모르던 야라의 아버지, 영화에 제대로 나온 적도 없는 한 남자의 죽음은 어떻게 모두의 간절한 애도 대상이 된 것일까.
난민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었을 마을 주민들이 그의 부음을 듣고 한순간 각성했다고, 공감과 연민의 주체가 되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이들은 마치 이 대목을 위해 서사 바깥에서 모여들거나 동원된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여기서 영화가 자아내거나 의도한 파토스는 개연성을 개의치 않는다. 다분히 인위적이고 웅변적인 비약은 그러나 서사적 타협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첫 시퀀스에 대한 켄 로치의 대답이다. 그는 도입부의 분노가 해결될 분기점을 마련하지 않는다. 이들의 상투적이고 맹목적인 논리, 호소, 감정에 서사적 해법으로 대응하지 않고 그들을 영화 어딘가에 고립시킨다. 대신, 영화 안에서 구체적으로 서사화된 적 없으나 각자의 사연이 새겨진 육체성으로 타인의 죽음에 이제 막 동요하기 시작한 사람들을 깨운다. 추모 장면에서 켄 로치가 믿는 건 익명의 존재들이 아직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은 이야기의 가능성이다. 이들의 표정, 눈물, 걸음, 제스처, 시선은 도입부 스틸 이미지의 경직성에 대항하는 구체적이고 유연한 운동이다. 편협하고 공격적인 액션에 반응을 지연하다 마침내 주먹을 불끈 쥐고 함께 일어서는, 액션보다 확장된 리액션이다. 이 리액션의 결코 과시적이지 않은 결기를 나는 노장이 준비한 최후의 선언으로 깊게 받아들인다.
속박된 반응
부자유한 몸으로도 반응을 일으킬 수 있을까. 그 반응이 구속된 몸을 조금이라도 구할 수 있을까. <노 베어스>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버티는 땅은 내내 흔들린다. 장면들은 구심점과 정박지를 찾지 못한 채 혼란하게 얽혀 있다. 내부와 외부, 다큐 형식과 극양식은 맞물리고, 입구와 출구는 헷갈린다. 그러나 여러 겹이 각축한다고 해도 이 영화는 어찌 보면 그리 복잡하지 않다. 영화를 교통하는 모든 요소의 중심축에는 자파르 파나히가 있다. 오랜 시간, 이란 정부의 체포, 가택연금, 출국금지 명령에 항의하며 어떻게든 작품 활동을 이어온 감독. <노 베어스>를 만든 감독이자, <노 베어스> 속 영화를 국경 근처의 시골 마을 자반에서 노트북으로 원격 연출하는 감독. 튀르키예에서 유럽으로 망명을 준비하는 두 연인이 있다. 둘은 파나히가 화상으로 지휘하는 영화 속 인물이다. 동시에 이들은 촬영 중, 갑자기 가발을 벗어던지며 이 모든 게 가짜일 뿐이라고 체념하는, 아마도 실제 자신의 현실을 연기하던 사람들일 테다. 그 와중에 파나히는 카메라를 들고 마을을 돌아다니는데, 마을 주민들이 다짜고짜 그가 찍은 사진을 달라며 집요하게 요구한다. 사진 속 여인이 결혼 약정을 어기고 함께 찍힌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 남자도 파나히를 몰래 찾아와 사진을 넘기지 말고 일주일만 시간을 달라고 부탁한다.
영화 안 파나히는 촬영 현장에서도 시골 마을에서도 진퇴양난에 빠진다. 튀르키예와 자반에 흩어진 예측 불가능한 힘들이 그를 점차 옭아맨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건 자파르 파나히가 자처한 운동의 결과다. 이 힘들의 동선은 영화 밖, 창작자이자 시민인 파나히가 강제된 환경에서 여기저기로 던져본 공의 궤적, 뻗어본 가지의 방향이다. <노 베어스>는 한정된 영토에 묶인 그 자신을 일관될 리 없고 통합될 수 없는 궤적과 방향으로 무모하게 당겨보고 팽창해보고 해체해보려는 시도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노 베어스> 속 파나히의 얼굴과 달리, 이 영화는 자기 몸을 찢는 고통을 감수하고 있다. 그 시도에 ‘나’의 육신, 영혼, 상상력, 창작 의지는 얼마나 반응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나’의 위축된 현실은 얼마나 넓어질 수 있을까. 자파르 파나히라는 다큐멘터리, 자파르 파나히라는 리얼리티보다 더 중대하게 이 허구를 추동하는 사실은 없다.
세 인물이 죽는다. 사진 속 연인은 마을을 탈출하려다 국경 수비대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튀르키예 촬영장을 이탈한 여자배우는 해안가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죽고 말았으니, 망명의 옅은 가능성마저 모두 소멸한다. 무엇도 남지 않은 실패다. 파나히는 영화 안에서라도 끝내 환상을 허락하지 못한다. 영화 초반, 그가 튀르키예로 넘어가려 언덕을 올라 국경선을 밟은 순간, 흠칫 당황하며 마을 숙소로 다시 걸음을 옮긴 것처럼. 결말에서 그는 피투성이가 된 남녀의 시신을 지나쳐 마을을 떠나려 하지만, 영화가 끝나기 직전, 불현듯 차를 세운다. <노 베어스>는 자파르 파나히를 어디로 데려다준 것일까. 자파르 파나히가 도착한 이곳, 혹은 돌아갈 그곳이 어디인지 그는 알고 있을까. 그의 세상은 <노 베어스> 이전에서 몇뼘이나 더 움직였을까.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그의 내면에는 답이 있을까.
유희의 일격
윤가은의 2016년작 <우리들>에는 초등학생 소녀 선과 말썽꾸러기 남동생 윤이 식탁에 마주 앉아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남매 모두 친구와 다퉈 선의 이마에는 밴드가 윤의 눈두덩이에는 붉은 멍이 보인다. 싸움의 상처를 안고 집에 돌아온 남매의 우울한 풍경이 단숨에 진귀한 차원으로 도약하는 건 전적으로 윤 덕분이다. 선이 동생을 맨날 다치게 하는 친구 연우를 탓하며 속상해하자, 윤이 이번에는 맞서 때렸다고, 그래서 연우가 다시 자기 눈을 친 거라고 의기양양해한다. 다음 상황을 궁금해하는 누나에게 동생이 태연하게 말한다. “그래서 같이 놀았어.” 이 어이없는 대답에 선은 분을 참지 못한다. “다시 때렸어야지!” 그러자 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그럼 언제 놀아, 연우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는 놀고 싶은데.
이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어린 남매의 대화에 대단한 철학이나 의미가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믿는 정당하고 적합한 반응이 때로 얼마나 습관적이고 반동적인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지루한가. 저 귀여운 소년의 본능적인 반문이 심장에 날카롭게 꽂힌다. 때린다. 다시 때린다. 다시 때린다. 다시 때린다…. 세계는 ‘때린다’라는 행위만으로 둔탁하게 불어나는 무색무취의 자기동일적 덩어리가 될 것이다. 반응의 연쇄는 작동하겠지만, 반응의 성질에는 아무런 차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세계는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너덜너덜하게 제 몸을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소년의 기상천외한 반응의 태도야말로 우리를 구할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혁명이라고, 가끔은 천진하게 상상하고 열심히 골몰해도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유희의 욕망이 판을 갈아엎으리라. 구태의연한 인과의 사슬을 끊으리라. 두려움 없이 단절하고 용감히 뒤흔들고 즐겁게 끌어안는 ‘다른’ 반응으로 영화는 다시 살리라. 이 마음에 닿으려 긴 글을 돌아왔다.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영화의 육체와 마음을 비평의 기억과 선율로 연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