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사람들
85년의 삶, 84편의 영화
2001-03-26

커크 더글러스

“여러분은 다들… 나보다… 영어가 유창… 하군요.” 존경의 염을 품은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그를 보려고 발돋움하고 선 제51회

베를린영화제 기자 회견장에서 커크 더글러스(85)는 띄엄띄엄 말문을 열어 왁자한 웃음부터 자아냈다. 돌연 가슴이 먹먹해졌다. 특별히 좋아하는

배우라 여겨본 적은 한번도 없었건만. 어린 시절, “저 남자 멋있지 않니?” 하며 어머니가 불러앉혀 보여주곤 했던 TV 화면 속의 더글러스는

건장한 바이킹이었고 노예장군이었고 율리시스였다. 그런 그가 이제 뇌졸중의 내습으로 힘겹게 입술을 떼고 있었다.

사슬에 비끄러매져 육체적 모욕을 겪고 있는 영웅을 보는 기분이 이럴까. 그러나 커크 더글러스는 여전히 연민 따위는 용서치

않는 전사다. 1995년 첫 뇌졸중 발작 이후 자신에게 던졌던 “말을 할 수 없는 배우가 무슨 쓸모가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뇌졸중

마비가 온 은퇴 권투선수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다이아몬드>(1999)와 적극적인 자선 활동과 저술 그리고 시들지 않는 특유의 위트로 당당히

답해왔다. 그리고 미국 영화연구소와 베를린영화제는 평생공로상이라는 훈장을 바쳤다. 영화인에게 평생공로란 과연 무엇을 뜻할까. 커크 더글러스에게

그것은 아마, 스크린 안팎을 구별할 수 없도록 일관되게 견지해온 자존심과 열정, 의지로 충만한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른다. <바이킹>에서

눈을 잃고 <스팔타커스>에서는 책형당하고 <삶의 열정>에서는 귀를 잘리고 <빅 스카이>에서 손가락을 잃고도 다음 영화에서는 다시 온 세상을

상대로 주먹을 쥐었던 더글러스의 모습은 현실의 거울상이다. 넝마를 줍는 유대계 러시아 이민의 아들로 태어나 마초 험프리 보거트와 메소드

배우 말론 브랜도 사이에 굳건히 서서 할리우드 아이콘으로 50년을 살아남은 이 노장은 성장기의 빈곤을 시작으로 스튜디오의 횡포, 뇌졸중,

연예계의 허영, 헬리콥터 사고 등 다른 이름의 ‘골리앗’을 때려눕혀왔다.

베를린 회견장에서는 더글러스 본인이 생각하는 최고의 ‘평생 공로’를 묻는 질문이 나왔다. “제작과 주연을 맡은 <스팔타커스>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달턴 트럼보를 작가로 기용하고 그의 이름을 크레디트에 올리겠다고 고집한 일입니다. 스튜디오는 그를 사무실에 오지도 못하게

하려 했지만, 나는 그의 이름을 적은 출입증을 수위실에 맡겨 두었죠.” 재능과 카리스마, 프로정신, 명사로서의 사회적 책임감. 어떤 종류의

일에는 속성의 편법도 지름길도 존재하지 않는다. 커크 더글러스처럼 온전한 클래식 스타를 만들어 내기까지는 85년의 삶과 84편의 영화가

있었다.

러시아계 이름을 바꿨다. 이슈르 다닐로비치는 발레 댄서를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이름이지만 배우가 되고 싶다면 영 별로였다.

가장 좋았던 감독은. 빈센트 미넬리는 과소평가된 감독이다. <삶의 열정>를

찍을 무렵 현장에 구경을 오곤하던 눈이 큰 소녀 라이자가 지금도 기억난다. 스탠리 큐브릭은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지만 조금 차갑다. <아이즈

와이드 셧>은 전혀 섹시하지 않은 영화였다. 너무 차가웠다.

후회가 있다면. 좀더 일찍 믿음(유대교)을 갖고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못한

것. 하지만 회한은 없다. 나의 평생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으니까. 물론 나는 너무 자기중심적 인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를 찍고 또 찍었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나르시시즘일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내 영화는 80여편 중 20편 정도다. 찍지 말았어야 할 영화? 그 이야기를

하면 너무 길어진다.

요즘 영화보다 옛 영화가 더 훌륭하다고 말했는데. 최근에는 기술과 특수효과,

과도한 폭력이 영화를 점령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에게 언젠가 “예전에 나는 단 한발로 상대를 쓰러뜨렸는데 자네는 기관총으로 많이도 쏘더군”

하고 말해준 적도 있다. 예전 영화는 캐릭터와 인간에 더 의존했고 나로선 그편이 더 흥미롭다. 기술에 대해서는 발언 자격이 없다. 휴대폰도

없는 기계치니까. 한번은 아내가 사준 말하는 메르세데스 벤츠를 아내의 차와 바꿔버렸다. 나는 나한테 말 거는 차 싫다.

글 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

사진 이혜정 기자 hy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