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정 중에도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했다.
=3년 전인 2019년, 플랜B 프로듀서로 부산국제영화제에 <더 킹: 헨리 5세>를 들고 온 적이 있다. 그 이후 <미나리>라는 아주 작은 영화를 했고.(웃음) 지금은 안나푸르나에 몸을 담고 있다. 팬데믹 이후 직접 와서 보니 영화제의 에너지를 실감할 수 있어 너무 좋다. 방금 전까지 야외무대를 둘러보고 왔는데 객석을 꽉 채운 사람들을 보고 마침내 돌아왔구나 싶은 마음에 순간 환호를 지를 뻔 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인더스트리 커넥션’을 처음 선보였다. 세계 유력 산업관계자들과 한국의 신인 감독들을 직접 연결하고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여기 직접 참여하기 위해 부산을 찾았다고 들었다.
=부산국제영화제 박도신 프로그래머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취지를 듣고 나니 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한인 2세로서 한국과 미국 사이에 어떤 다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는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 뉴 커런츠 부문의 한국영화 2편과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의 한국영화 12편 중 몇 편을 볼 수 있었고, 그 중 세 편의 작품을 만든 분들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이미 몇 차례 미팅을 했는데 흥미롭고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어떤 감독들을 만났는지 궁금하다.
=<지옥만세>의 임오정 감독, <공작새>의 변성빈 감독, <Birth>의 유지영 감독을 만났다. <공작새>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독특한 영화였다. 퀴어, 무용 등 다양한 소재를 어우르는 가운데 세대 간의 상처를 치유하는 핵심적인 드라마가 와닿았다. <지옥만세>도 새로웠다. 쉽게 설명하기 힘든 에너지가 보는 내내 기분 좋은 긴장감을 준다. 물론 둘 다 완벽하진 않다. 하지만 젊고 역동적이고 새롭다. 영화제에서 만나고 싶은 건 다듬어진 세련됨이 아니라 갈고 닦고 싶어지는 가능성들이다. 특히 한국독립영화들은 배우들의 연기가 정말 남다르다. 틀에 박힌 표현 없이 공감의 폭을 넓히는 에너지에 절로 매료된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슬로건이 ‘다시, 마주보다’이다. 2019년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는 걸 너머 새로운 방향으로 다양한 만남의 확산을 시도하고 있다. ‘인더스트리 커넥션’도 그 중 하나다.
=완전 동의하고 응원한다. 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가 제작자와 미팅을 직접 주선하는 건 신선하고 좋은 아이디어다. 이런 새로운 시도들을 통해 영화제의 에너지와 역동성을 온 몸으로 실감하고 간다. 굳이 사례를 찾아보자면 독립영화의 활성화에 주력하는 선댄스영화제의 모델이 떠오르는데 올해 부산은 그보다 훨씬 역동적이면서도 편안하다. 스트레스나 압력 없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만날 수 있도록 세팅을 해주셔서 더 감사하다. 올해는 일정이 촉박하여 많은 감독들을 만나지 못해 아쉽지만 내년에는 훨씬 많은 분들과 만날 수 있길 고대한다.
-<지옥만세>, <공작새>가 눈에 들어왔다고 하니 가족적인 이야기에 호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프로듀싱했던 <옥자>나 <미나리>도 그렇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장르나 소재에 제한을 둔 적은 없다. 음악, 미술, 디자인, 연기까지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이 된다. 내가 하는 작업은 그 하모니를 이룰 수 있는 조합을 찾아내는 거다. 굳이 말하자면 내 심장은 진정성에 반응하는 것 같다. 액션에는 액션 나름의 감각적인 진정성이 있고, 드라마에는 드라마 나름의 감성적인 진정성이 있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직접 보았을 때 확인되는 것들이 있다. 연출자를 직접 만나는 게 중요한 이유다.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북미시장에서 <미나리> 이후 한국영화, 아시아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 한 가운데에서 맹활약 중인데.
=맞다.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다.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있어 <미나리> 등의 영화가 조금이나마 기여를 한 것에 대해 더없이 영광스럽다.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느낌? (웃음) 한국영화는 비로소 자신의 때를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여전히 더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크다. 내가 여기 와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이번에 돌아가면 스튜디오들을 만나서 부산에서의 경험을 나누게 될 것이다. 가보니 이런 재능있는 감독들이 있고, 시장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들이 있고, 흥미로운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퍼져 나가지 않을까 기대한다.
-플랜B에서 10년 넘게 일하다가 최근 안나푸르나 공동 총괄부사장으로 선임됐다.
=플랜B에서의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험이었고 내 삶의 소중한 페이지다. 브래드 피트와 함께 일하는 건 언제나 즐거웠고 나의 업무 능력은 물론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해주었다. 내 삶에서 다음 단계를 고민하던 시기에 안나푸르나 쪽에서 긍정적인 기회를 제안했고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야 할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만감이 교차한다고 해야 할까.아름답게 헤어지는 커플 같았다고 할까. 떠나는 날 차에서 이별 노래를 들으며 엉엉 울었다. (웃음) 지금은 안나푸르나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몇 개 맡으며 기분 좋은 흥분 상태다.
-<미나리> 이후 정이삭 감독과 진행하던 다음 프로젝트는 어떻게 진행 중인가. 뉴욕과 홍콩에서 벌어지는 멜로드라마라고 들었는데.
=그게 플랜B를 떠날 때 가장 슬픈 일 중 하나였다. 플랜B의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그쪽에서 잘 진행하고 있을 거다. 정이삭 감독님과는 계속 연락하면서 소통하고 있다. 머지 않은 시간에 다시 함께 작업하길 고대한다.
-최근 아시아 콘텐츠에 대한 할리우드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나.
=물론이다. <미나리>를 통해 이민자의 삶과 진실을 다루는 필요한 이야기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확인했다. 물론 한국계 미국인으로서의 책임감은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건 좋은 이야기와 창작자니까. 그럼에도 내가 지나온 문화적 유산과 피로 연결된 경험들을 바탕으로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단기적으로는 새로운 목소리를 찾는 게 목표이고, 길게 보면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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