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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생 백전노장 임재영 조명기사부터 스물다섯살 터울의 1978년생 강동균 현장편집기사까지 현장영화인 스무명이 마음에 품었던 책을 꺼냈다. 경험과 연령차는 있지만 이들은 공히 장편영화 3편 이상을 작업한 각자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노련한 기사급 스탭이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작업하고 있거나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는 그들에게 책을 추천받고 자필 원고를 청탁했다. 그 결과 영화작업에 실용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전문도서에서 예술적 영감을 주는 화집이나 산문집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맞은 다양한 책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현장영화인 20인이 바쁜 시간을 쪼개어 직접 써내려간 추천사와 함께 그들이 오랫동안 탐독했던 책 스무권의 첫 페이지를 이제 넘겨본다.
오감으로 그려낸 인간의 얼굴
<존 버거의 글로 쓰는 사진>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열화당 펴냄
수전 손탁은 이렇게 존 버거를 치켜세웠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의 작가들 중에서 존 버거에 견줄 만한 작가는 없다. 로렌스
현장영화인 20인의 추천도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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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강혁과 교도소 부소장의 대립 - 영화를 위해 창조한 허구의 ‘공권력’
“니가 아무리 날뛰어도 내 손바닥 안이야! 너희는 나라가 인정한 쓰레기들이구, 난 대한민국 국가 공무원이거든. 공권력은 언제나 신성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거란 말야, 새끼야!(김안석의 대사)”
지강혁(이성재)은 빈 차나 털어 겨우 먹고 사는 잡범이다. 그가 사는 곳은 판자촌이다. 그런데 올림픽이 열리면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마을은 강제 철거되기 직전이다. 용역 깡패와 주민들의 대치 중에 강혁을 따르는 마을 동생이 깡패 우두머리 김안석(최민수)의 총에 죽자, 강혁은 김안석에게 덤벼들다 도리어 교도소에 가는 신세가 된다. 게다가 강혁이 갇혀 있는 교도소에 어느 날 부소장이 부임하는데 그가 바로 김안석이다. 안석을 죽이려는 강혁의 계획은 번번이 실패하고, 안석은 더욱더 강혁을 괴롭힌다. 결국 강혁은 같은 감방 동료들과 탈주 계획을 세워 이감 도중 실행하지만, 마침내 탈주의 끝에서 경찰과 대치하게 되고, “죄
<홀리데이>는 어떤 영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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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전 서울 한쪽에서 벌어졌던 한 사건이 세월의 무게를 떨치고 영화로 만들어졌다. 탈주와 인질극 끝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남기고 죽은 지강헌 일파의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홀리데이>다. 그동안 이 소재를 둘러싸고 몇몇 영화사가 동시 다발적으로 준비를 했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세월을 건너온 실화는 과연 어떻게 영화가 되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가서 알아보는 사건의 경위와 당시 언론의 반응, 영화 제작 기간 중에 드러난 새로운 사실들, 그리고 실제와 허구가 뒤섞여 탄생한 영화의 전모에 대해서 살펴본다.
1. 비지스의 노래, 스콜피온스로 바뀌다 - 실화 지강헌 사건
“탈주범 가정집서 인질 대치극 2명 자살 1명 사살 1명 검거”(동아일보 10월17일자 1면)
“탈주극 끝내 유혈로 마감”(경향신문 10월17일자 1면)
“탈주 사건 관계 장관 인책 불가피”(한국일보 10월18일자 1면)
1988년 10월16일 오후 서울 북가좌동에서 벌어진
<홀리데이>는 어떤 영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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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영화 소식’은 새로운 관객을 만들고 소통하는 공간
김지석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천편일률적인 영화문화를 바꾸는 데 일조했으나, 그 달라진 환경 때문에 딜레마에 처해 있다고 설명한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타이영화를 수입하겠다고 나선 곳은 없었다.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데뷔작부터 애정을 쏟아온 펜엑 라타나루앙의 신작 <보이지 않는 물결>만 하더라도 국내 투자·배급사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3월에 개봉하겠다고 하더라.” 좀처럼 볼 수 없는 아시아영화들이 수입돼서 공개되는 것이야 바람직한 일이지만, 이젠 “부산이 아니면 볼 수 없다”는 희소가치를 내세우는 것으로는 도약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것이 말처럼 쉽진 않다. “여전히 한국의 영화문화는 일본, 중국, 이란, 여기에 기껏해야 타이 정도에 관심이 맞춰져 있다. 2년 동안 인도네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뛰어난 작품들을 소개했지만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아시아영화를 연구하고자 하는 후배들조차 이들
아시아영화 전문가, 김지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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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하나. 아시아영화에 관한 최근 소식을 확인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씨네21> 홈페이지에 접속하라, 고 말하고 싶지만 정답이 아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알아보라는 조언은 꽤 그럴듯한데 특효를 발휘하진 못한다. 무엇이든 물어보면 답을 일러준다는 한 포털 사이트의 지식 검색, 무용지물이다. 알 만한 사람 다 알지만, 지름길은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다. 뉴스를 놓치는 경우, 기자들은 ‘물먹었다’고 한다. 솔직히 아시아영화에 관한 뉴스 전달에 있어 <씨네21>은 여러 번 물먹었다.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에 개설되어 있는 ‘핫 영화 소식’ 때문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나 그렇다고 분노할 필요까진 없다. ‘핫 영화 소식’에는 현지언론보다 발빠른 짭짤한 정보들이 매일 오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대만 뉴웨이브의 산실이었던 중앙전영이 재정난으로 언론그룹인 중국 시보그룹에 매각됐다는 소식이 대표적이다. 아시아 영화계 현황에 관한 기사를 인터넷에서 한번 찾아보라. ‘
아시아영화 전문가, 김지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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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빠른 사극도 있다니
“시대극이라 하면 이런저런 것을 떠올리게 되는데, <왕의 남자>의 소재는 기존의 시대극의 틀을 깬다. 공길이 대표하는 코드도 그렇고, 왕이라는 캐릭터도 그렇고 굉장히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과거를 다루되 젊은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돋보였다.”(김미희 싸이더스FNH 공동대표)
충무로 대다수 관계자가 <왕의 남자>의 최종 스코어를 300만 정도로 예측했던 이유 중 하나는 사극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90년대 이후 과거 충무로와 단절을 선언하며 등장한 새로운 프로듀서와 감독들은 사극을 회피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나 <혈의 누> 같은 성공작도 있었지만, ‘관객은 사극이 진부하다고 생각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TV에서는 <다모> <대장금> <해신> <불멸의 이순신> 같은 드라마가 사극에 대한 통념을 혁파해왔고, <왕의 남자&
<왕의 남자> 성공요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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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영화’의 성공요인을 분석하는 것은 언제나 결과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따르다 보면 아주 사소한 일도 ‘하늘의 뜻’을 이룩하기 위한 정해진 수순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마련이다. 개봉 20일째인 1월17일 전국 관객 500만명(이하 배급사 집계)을 돌파한 <왕의 남자>의 흥행 원인을 따져묻는 온갖 매스컴의 기사 또한 이런 ‘결과론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글 또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이 영화의 성공 이면을 들춰보려는 것은 남의 잔칫상에 수저를 올려놓거나 누군가를 영웅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그건 이 영화의 성공이 이전의 어떤 흥행영화와도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왕의 남자>가 써나가고 있는 흥행 신화의 뒤편으로 조심스레 들어가보자.
<왕의 남자>가 보여주는 흥행의 가속도는 아찔할 정도다. 개봉 20일 만에 전국 500만명을 극장
<왕의 남자> 성공요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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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로 접한 에릭 바나는 스크린에서보다 훨씬 상냥하고 밝아 보였다. <헐크> <트로이>에 이어 <뮌헨>에서도 고뇌에 가득 찬 인물을 연기했던 그는 뜻밖에도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 멀리서 온 기자들에게 먼저 친절한 인사를 건넸다. <뮌헨>에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암살단의 우두머리 아브너로 출연한 에릭 바나와의 인터뷰를 정리한다.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 캐릭터에 공감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특별히 어렵지는 않았다. 신경쓰였던 것은 내가 평소에 알지 못하던 세계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중동의 역사와 문화, 정치, 팔레스타인 현실 등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는데, 내가 맡은 역할을 위해서는 당연히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다.
-아브너라는 캐릭터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아브너는 무엇보다 변화하는 캐릭터다. 처음에는 순진한 민족주의자에서 의심과 불안, 편집증이 깊어지고 자신이 하는 일의 진정
<뮌헨> LA 시사기 [3] - 에릭 바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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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은 사랑의 한 종류다
만약 이 영화의 감독이 스필버그가 아니었다면,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보여줬던 그가 아니었다면, <뮌헨>은 화제의 중심에 놓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주제를 건드릴 때부터 친구를 잃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그는 도대체 왜 이 영화를 만든 걸까. 스필버그가 <E.T.> 때부터 함께 작업해온 프로듀서 캐슬린 케네디로부터 이 영화의 연출을 제안받은 것은 1998년이었다. 케네디는 유니버설의 프로듀서 배리 멘델로부터 “스필버그에게 캐나다 저널리스트 조지 요나스가 쓴 <복수>의 영화화를 제안해주지 않겠냐”는 부탁을 받았던 것. 스필버그의 첫 반응은 회피였다. 이 이야기는 그에겐 너무 민감한 정치적 사안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케네디의 거듭된 설득에 프로젝트의 제작을 검토하기 시작했지만 2001년 9·11사태가 일어나자 “국가적 재앙을 이용한다는 비난을 받을 것”을 우려한 스필버그는 이 프로젝트를 포
<뮌헨> LA 시사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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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9월5일은 테러리즘의 검은 깃발이 현대사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날이었다. 그날 새벽, 스스로를 ‘검은 9월단’이라 부른 8명의 팔레스타인인이 뮌헨올림픽 선수촌의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로 침입했다. 이들은 코치 2명을 사살했고 9명의 선수를 인질로 붙든 채 이스라엘과 독일의 감옥에 갇힌 200여명의 정치범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그 뒤로 21시간 동안 세계는 TV를 통해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고, 결국 9명의 인질 모두와 5명의 테러리스트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그것은 진정 현대적 의미의 테러가 세상에 첫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또한 그것은 테러리즘을 응징한다는 논리를 가진 또 다른 폭력인 ‘맞테러’의 시작을 의미했다. 그 뒤 수년 동안, 이 사건에 개입된 것으로 추정된 세계 곳곳의 팔레스타인 인사들은 이스라엘 모사드의 개입 속에서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뮌헨>은 이 민감한 세계 정치역학의 한가운데로 용기있게 뛰어드
<뮌헨> LA 시사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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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투어 전 과정의 영화화 결정
꽤 “무모한 도전” 같던 유럽 투어 계획은 뜻밖에 윤도현밴드 음악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의 도화선이 됐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나쁜 교육> 등 독립영화 및 예술영화 수입사로 알찬 이력을 쌓아온 스폰지의 조은운 대표는 평소 친분이 있던 ‘뜨거운 감자’의 김C를 통해 윤도현밴드의 유럽 투어 소식을 듣고 이를 다큐멘터리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구상을 하게 됐다고. 델리 스파이스의 데뷔 음반 녹음 과정을 담은 비디오 다큐멘터리 <팝!>, 한국 포크록의 선구자였던 한대수의 음악과 삶을 현재에서 되짚어가는 <다큐멘터리 한대수>라는 선례가 있긴 하나 국내에서는 여전히 생소한 음악 다큐멘터리 제작은 계속 염두에 두고 있던 터였다. 극장에 개봉됐던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과 스폰지에서 수입, DVD로 출시한 <더 블루스> 연작에 대한 반응이 괜찮았기에 음악 다큐멘터리가 국내시장에서 전혀
<온 더 로드, 투> 제작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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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곧 ‘길 위에서’란 문구가 갖는 어감이란 언어의 차이를 막론하고 비슷한 게 아닐까. 어디로 가야 할지 조금은 막연한 표랑, 또는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거라는 미묘한 설렘이 함께 숨쉬는, 그렇게 끝이 아니라 아직은 진행 중인 미완의 여행 같은 정서. <온 더 로드, 투>는 2005년 봄 유럽 투어의 길에 오른 윤도현밴드의 궤적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이자, 음악이란 길 위에서 10여년 동안 쉼없는 여행을 계속해온 그들의 걸음을 곱씹게 만드는 현재형 기록이다. 국내 대중음악 환경에서는 쉽지 않은 꾸준함으로 대중적인 록밴드의 입지를 다져온 윤도현밴드와 공포영화의 얼개를 빌려 조숙한 십대 소녀들의 성장기를 촘촘한 세밀화로 담아낸 데뷔작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이후 6년 만에 장편 연출을 맡은 김태용 감독의 음악 다큐멘터리. 국내에서 전례가 별로 없는 장편 음악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생소함도 생소함이지만, <온 더 로드, 투>는 무
<온 더 로드, 투> 제작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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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 호랑이와 유적과 인간을 보호하라
<투 브라더스>에는 30마리의 호랑이가 동원되었다. 클로즈업 장면에서는 표정이 풍부한 호랑이가 필요했지만, 액션이 필요한 장면에서는 스턴트맨 역할을 하는 액션이 좋은 호랑이가 필요했다. 언제 어디서나 촬영에 투입할 수 있는 7∼12주 사이의 새끼 호랑이가 필요했기 때문에 세계 방방곡곡에서 태어나는 모든 호랑이를 찾아다녔다. 대부분의 새끼 호랑이는 프랑스에서, 일부는 타이에서 데려왔다. 어미에게서 버려진 갓 태어난 새끼들을 데려다 젖병의 우유를 먹이며 키우기도 했다. 곰과 달리 호랑이는 눈, 입, 귀로 감정을 표현했다. 마치 사람처럼! 차이가 있다면 호랑이들은 나를 육체적으로 상처입히고 죽일 수 있고, 할리우드 스타 배우들은 전화 한통으로 감독의 사회적 위신을 추락하게 할 수 있다는 것 정도일까.
우리는 호랑이들을 관찰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안전을 고려해서 호랑이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곳에 우리를 만들어 사람들이
<투 브라더스> 제작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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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아노 감독은 표정이 풍부하고 친절하며 말을 즐긴다. 그는 호랑이의 표정과 몸짓을 흉내내가며, 마치 손녀에게 “옛날 옛적 숲 속에서…”로 시작되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생동감있게 두 호랑이의 로드무비 <투 브라더스> 제작에 얽힌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투 브라더스> 제작기를 아노 감독의 목소리를 빌려 쓰고 싶었던 건 그래서였다. 다음 글은 2005년 제10회 부산영화제 기간 중에 있었던 장 자크 아노 감독과의 인터뷰와 장 자크 아노 감독이 제작과정을 쓴 <투 브라더스: 영화에 관한 우화, 그리고 촬영 뒷이야기>를 참고해 재구성한 것이다. 다음 글을 읽거나 <투 브라더스>를 볼 때, 솜사탕을 쓴 것처럼 하얀 머리칼을 한 인상 좋은 프랑스 할아버지가 호랑이들을 어르고 달래며 영화를 찍는 모습을 상상하면 더욱 즐거울 것이다.
우리가 ‘호랑이’라고 부르면 호랑이는 우리를 잡아먹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호랑이 님’이라고 부르면
<투 브라더스> 제작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