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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경험한 해외영화제는 작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였다. 영화제의 주인공은 레드카펫 위의 거장과 스타였고, 언론과 평론가들은 이들의 권위를 재확인했다. 그것은 발견이나 즐김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반년 뒤, 선댄스 영화제를 찾았다. 지난 1월19일부터 26일까지, 솔트레이크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마을 파크시티. 영화를 만든 이들과 관객이 주인이 되는 그곳은 축제의 장이었다. 관객은 어떤 영화를 보거나 보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곳곳에서 토론은 벌였다. 황혼이 깃들면 관객과 감독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파티가 줄을 이었다. 그곳에서 ‘저널리스트’는 별다른 소용이 없어 보였다.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택시 안. 출품영화의 스탭이거나, 배급업자이거나, 필름메이커를 대상으로 포럼을 진행하는 후반작업 회사의 직원 틈에 합승한 이국 땅의 기자는 왠지 모르게 외로웠다. 이를 부추기는 것은 선댄스가 엄연한 미국 영화제라는 사실. 월드시네마 경쟁부문이 지난해에 신설되었다지만, 선댄스의 주력 부문은
2006 선댄스 영화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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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이 지난 1월29일(한국시각 1월30일) 미국 마이애미에서 숨을 거뒀다. 예술가로서는 한창 나이라 할 수 있는 일흔네살에 ‘아리랑’과 ‘엄마’를 흥얼거리며 먼 이국에서 눈을 감았다. 십대 후반에 조국을 떠나 일본과 독일과 미국을 떠돌며 지구적 예술가(글로벌 아티스트)로 살았던 그는 말년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한국에 돌아가기를 원했다. 경기도 용인에 자신을 위해 세워질 백남준 미술관이 일종의 종착역이었으나 아쉽게도 개관이 늦어지고 말았다.
백남준은 전세계에 통하는 브랜드를 지닌 거의 유일한 한국 출신 예술가였다. ‘비디오 예술의 선구자’, ‘전위 음악가’, ‘행위 예술가’라는 소개 뒤에 따라붙던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과격한 별명은 그에겐 훈장이자 별점이었다. 서구예술의 우월주의에 맞서 뚝심으로 ‘백남준표 예술’을 밀고 나간 그는 아시아 또는 한국 문화의 가능성을 낙관하고 있었다. 그가 1995년에 쓴 다음 글은 이런 믿음을 잘 보여준
[추모기획] 비디오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을 추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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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콘, 16mm 카메라 제작까지
누군들 제 능력을 맘껏 펼쳐보고 싶지 않겠는가. “카메라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촬영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충무로에서 그의 꿈이 영글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한동안 “카메라 고쳐주고 얻은 수입만으로도 짭짤했다”는 그가 1980년대 들어 CF 촬영을 주업으로 삼았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기계라는 게 복잡한 거 같지만 실은 간단해. 자연처럼 암수로 짝지워져 있다는 단순한 원리만 몸으로 깨달으면 되거든. 거기까지가 어려운 거지.” 깨달은 이치를 밑천삼아 “응용을 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타올랐던 것도 그때부터였다. “돈이 조금 모이면 남대문과 청계천을 돌아다녔어. 공구와 부품 사모으는 데 모조리 쏟아부었다고.”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그는 일종의 모니터였던 비디콘과 16mm 무인카메라를 만들어 CF 현장 등에서 인정받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재주만으로 밀고 나가는 건. “10번 시도하면 8, 9번은 실패야. 그건 당연한 건데
충무로의 전설, 허남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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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손에 꼽을 고수(高手)라고 했다. 디지털로도 불가능한 일을 눈대중과 손재주만으로 해낸다고 했다. 누구는 그저 그런 범인(凡人)이라고 했다. 별것 아닌 기술을 밑천으로 갖고 있을 뿐이라 했다. 허남진. 어쨌든 들어본 적 없는 인물이었다. 수소문 끝에 그의 연락처를 알아냈지만, 약속 장소로 향하면서도 불안을 떨치진 못했다. 전설의 고수가 맞긴 한 걸까. 그의 종적은 안개 속이었다. 그의 과거와 현재를 단번에 보증하는 이는 없었다. 그를 고수라고 칭한 이는 그의 과거를 몰랐다. 그를 범인이라고 부른 이는 그의 현재를 몰랐다. “손재주가 있긴 했는데, 지금은 뭐하는지 몰라.” 얼마되지 않는 동료들도 애매모호한 답변을 남겼을 뿐이다.
대면 외엔 방법이 없었다. 부천 지나 부개역. 약속 시간보다 10분 정도 늦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일단 남쪽 방향 출입구로 나오라고 한다. 본 적 없는 그이지만,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모가 특이한 분이에요.” 전날 통화했던 이재한 감
충무로의 전설, 허남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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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덴 형제의 <로제타>에서 로제타와 어머니가 다툼을 벌이다 로제타가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장면은 당혹스럽게 흥미로웠다. 물속에서 온통 진흙투성이라며 소리 질러대는 로제타를, 카메라는 대상에 가깝게 다가가곤 하던 이전 태도와는 다른 태도로 대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이의 위험에 대한 방관자가 될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이의 곤경을 지켜보면서도 그 앞으로는 두렵다는 듯 더이상 다가서길 꺼려하는 것처럼 보인다(주인공의 위험을 대하는 이런 식의 거리는 <더 차일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때 다르덴 형제의 다분히 이기적이면서 편의적이기도 한 카메라는 인간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의 손에 들려 인간과 함께하는 기계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바로 그것이 결국에 로제타가 물에서 빠져나왔을 때 영화를 보는 우리의 손을 잡고서 재차 집요한 관찰의 행보에 따라나서게 만든다.
은근히 젖어드는 피로의 감각
비록 엄정한 분류 방식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어떤 영화를
<더 차일드>를 보는 네 가지 시선 [4] - 홍성남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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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1999년의 칸영화제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바로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와 브뤼노 뒤몽의 <휴머니티>라는 발군의 리얼리즘 작품들이 동시에 발표됐기 때문이다. 원래 프랑스영화는 리얼리즘 전통이 강하다. 특히 로베르 브레송의 엄격한 리얼리즘은 전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브레송의 적자를 찾자면, 단연 다르덴 형제와 뒤몽이 맨 먼저 눈에 띈다. 다르덴 형제는 프랑스어권 벨기에 출신 영화인들인데, 그들의 미학적 태도는 그 어느 프랑스 감독들보다 더욱더 브레송적이다. 현재 유럽의 리얼리즘을 보면, 이들 프랑스어권 영화인들과 그리고 ‘도그마95’로 출발한 라스 폰 트리에와 그의 동료들이 큰 두 축을 이루고 있다.
다르덴식 정치적 리얼리즘
다르덴 형제가 다루는 인물들은 프롤레타리아도 되지 못하는 극단적인 주변인물들이라는 점에서 파졸리니와도 자주 비교된다. 처음으로 형제들의 이름을 알리게 된 작품인 <약속>(1996)에선 불법이민자 거래꾼들을,
<더 차일드>를 보는 네 가지 시선 [3] - 한창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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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헬드, 영화의 윤리성, 효과음의 배제, 진보적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사회파 감독 등…. 다르덴 형제를 일컬을 때마다 등장하는 수식어다. 그러나 나의 다르덴 형제와의 첫만남은 이런 거창한 언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아들>이라는, 좀 지루하게 생겨먹은 영화제목의 광고를 어디선가 보고 대학로의 상영관으로 갔었을 게다. 초반부 내내 이상하게 생긴(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아저씨가 뒷모습만 보이며 어린 남자아이를 스토킹하고 있었다. 흠, 나이를 뛰어넘는 좀 파격적인 성애 스토리인가, 보 비더버그 감독의 <아름다운 청춘>의 퀴어버전인가보군, 근데 카메라가 너무 흔들리잖아, 쩝, 하며 영화를 쫓고 있다가, 글쎄 푹 잤다고 보는 게 맞을 게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 종종 자는 편이라 그러려니 하고 집에 가려는데, 이상하게 그 소갈머리 없던 아저씨의 ‘뒤통수’가 눈에 밟혔다. 그 뒤통수는 보통 뒤통수가 아녔다. 취한 듯 정신없이 흔들리는 카
<더 차일드>를 보는 네 가지 시선 [2] - 최진성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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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덴 형제의 신작 <더 차일드>가 1월27일 개봉한다. <아들>에 이어 한국에서 개봉하는 두 번째 작품이고,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수작이다. <아들>이 우리에게 준 충격은 컸다. 그래서 <더 차일드>에 대한 기대도 적지 않았다. 다르덴 형제의 무엇이 우리를 감동시키는지, <더 차일드>에는 또 어떻게 담겨 있는지 궁금했다. 하나의 목소리를 들려주기에는 모자란 듯싶어 두명의 감독과 두명의 평론가에게 <더 차일드>와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 대한 감상문을 청탁했고, 이윤기, 최진성 감독, 한창호, 홍성남 평론가가 각각 숨결 고운 애정의 에세이를 보내왔다.
뒷목을 뻐근하게 만드는 차가운 공명
교도소 면회실의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 커피를 놓고 마주 앉은 두 젊은 남녀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남자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여자의 손을 잡는다. 그의 오열이 점점 소리를 더해가자 여자도 눈물을 흘린다.
<더 차일드>를 보는 네 가지 시선 [1] - 이윤기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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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마티, 자신이 탄 차가 타임머신이 아니라 컨버터블 리무진이란 걸 알고 놀란다. 차 안에는 케네디 대통령, 재클린 여사, 브라운 박사가 함께 타고 있다)
마티: 여기가 어디삼?
박사: 텍사스주 댈러스다. 참고로 난 텍사스 주지사 코날리 역이지. 으하핫!
(마티, 1963년 12월22일자 <선데이 월드>를 활짝 펼친 채 ‘JFK 암살’이란 글자를 보며 깜짝 놀란다)
마티: 엥? 오늘이 케네디 인생 종치는 날이삼?
박사: (신문을 빼앗으며) 욘석아! 지금은 카퍼레이드에나 신경 쓰거랏.
(그때 어디선가 세발의 총성이 탕, 탕, 탕 하고 울린다. 첫 발에 케네디 쓰러지고, 둘째 발에 코날리를 명중시킨다)
박사: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꼴까닥!
마티: (뒷좌석에 뒷통수가 4분의 1이나 날아간 케네디를 바라보며) 존, 존!
재클린: 얘, 넌 언제 봤다고 존이니? 그건 나밖에 못 부르는 호칭이얌~.
마
마티, 브라운 박사와 함께 떠나는 ‘백 투 더 패스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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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은 1972년 뮌헨 올림픽 때 있었던 끔찍한 테러사건을 폭로하는 영화다. ‘검은 9월단’의 인질극은 11명의 희생자를 낸 채 끝날 뻔했다. 이스라엘 정부의 치밀한 복수작전 이후에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영토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현대사는 민족·종교·인종 등 미묘한 갈등에서 출발해 비참하게 끝난 사건들로 점철돼 있다. 그래서 <ME>가 객원기자 2명을 과거로 급파했다. <백 투 더 퓨처>로 미래여행을 다녀온 마티와 괴짜 발명가 브라운 박사가 이번엔 현대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직접 체험하고 돌아왔다. 피비린내가 조금 날 테니 코를 틀어막고 봐야 할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야식이 땡기는 한밤중. 교회 탑 앞에서 아인슈타인 짝퉁 티가 물씬 풍기는 괴짜 발명가가 페라리를 수리하고 있다. 이때, 스케이트보드를 탄 밝고 건강한 청소년의 대명사 마티가 로큰롤이 흘러나오는 mp3 플레이어를 귀에 꽂은 채 교회 앞을 지나다 이
마티, 브라운 박사와 함께 떠나는 ‘백 투 더 패스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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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만들기 3학기 - 쩐 만들기
롤모델은 박찬욱 감독이고, 써놓고보니 <올드보이>야? 그래도 장해. 아무리 엉성한 거라도 시나리오로 완결했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이야. 이제 감독의 길로 접어들기 위한 여러 단계들 가운데 뭐가 가장 너랑 잘 맞는지 고민해야 할 때가 온 거지. 매시간 영화를 생각하는 지옥으로 들어온 걸 축하해. 영화 촬영하면서 감독들이 수면제 먹고, 영화 망하면 머리칼 쥐어뜯는 건 생각도 못해봤겠지? <늑대와 춤을> 작가가 40살이 넘어서야 첫 시나리오를 세상에 냈다거나, <세븐>의 작가가 낮에는 타워레코드에서 일하고 밤에는 밤새 시나리오를 썼다는 건 별로 알고 싶지 않겠지? 할리우드에선 보통 15번째 시나리오가 입봉작이 된다는 얘기는 어때?
1. 시나리오 공모전 당선
연출력은 당대 최곤데 시나리오가 꽝이라구? 어떤 제작자가 네 연출력을 알아보고 널 쓰겠니. 김기덕, 김지운, 김대우, 김현석, 윤제균 감독 같은 이들이 시나
얼렁뚱땅 어깨너머 감독 되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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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셜 맥루한의 말대로 미디어는 메시지다. 우리 시대의 에스페란토, 만국공통어는 영어도 아니고 중국어도 아니며 한국어는 더더군다나 아니다. 그것은 바로 영화다. 영화로 소통하는 방식 자체가 메시지이며 이 메시지는 누구나 만들고 보내고 받을 수 있는 평등과 자유를 담고 있다. 그러니 친구들이여, 영화가 천재의 언어라는 편견을 버리고 직접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 친구와 소통해보라.
감독 만들기 1학기 - 너만의 별을 찾아라, 롤모델 찾기
슛, 액션. 야아~, 뭐 해. 뭐 그렇게 떫은 표정 하고 있니. 영화감독 되려고 들어왔으면 인사방법도 달라야지. 그래 첫 학기야. 꿈은 부풀어 오르고 머릿속엔 아무것도 없지? 나도 마찬가지야. 같이 시작하는 기분으로 하자구. 먼저 감독이 되고 싶으면 자기가 따라하고 싶은, 벤치마킹할 롤모델이 있어야 할 것 같아. 각 감독들의 유형별 연구가 필요한 거지. “난 스필버그도 좋아하고요, 박찬욱도 좋아해요.” 이러지 마. 그럼 우리 힘들어져. 아무도 볼
얼렁뚱땅 어깨너머 감독 되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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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단기적이고 편협한 결정인가
스크린쿼터가 반으로 축소됐다. 미국에서 한국영화에 관심을 갖고 지지하던 이들에게 심란한 소식이다. 다들 예측하지 못했던 일도 아니지만,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의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에 대해 롭 포트만 미국 무역대표는 “한국인들에게는 영화에 대한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공정한 경쟁조건을 갖게 해줄 것”이라고 논평했다. 이 진술에서 냉소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미국은 세계의 영화무역을 지배하고 있으며, 할리우드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큰 국내시장을 보유하면서 다른 나라보다 저가인 수출품으로 해외시장을 쓸어버릴 능력이 있어 전략적이고 경쟁적인 이점을 지녔다.
쿼터야말로 실제로 공정한 경쟁조건을 유지시켜주는 것이다. 이에 재경부 또한 한국 영화산업에 대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으로 이익을 볼 다른 산업들을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이라는 브랜드”가 통합적으로 문화콘
스크린쿼터 붕괴 [6] - 보론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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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손익을 따져보긴 했나요?
“스크린쿼터에도 집단 이기주의가 있다” “한·미 FTA 추진을 위해 미국과 스크린쿼터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협상한 적이 없었으며 잠정적인 합의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 “스크린쿼터를 현행 146일에서 73일로 축소하겠다” “영화계에 4천억원을 지원하겠다”
한편에선 욕하고, 다른 한편에선 거짓말을 늘어놓고 그리곤 돌아서서 빰 때리고 얼르고…. 설을 앞둔 일주일 동안 정부의 책임있는 관료들이 영화계를 상대로 행한 처사입니다. 기본적인 예의도 없고 음모적이며 부도덕하기까지 합니다. 자신들의 결정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기엔 참으로 치졸한 행동입니다. 자국민을 상대로 욕하고 기만해서라도 미국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애쓰는 정부 관료들의 모습은 실로 애처로울 뿐입니다. 스크린쿼터가 정녕 전 국민의 이익을 볼모로 한 영화인들의 집단 이기주의라면 굳이 속일 필요도 없고 ‘특별지원’할 이유도 없습니다. 당당히 영화계와 국민을 설득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
스크린쿼터 붕괴 [5] - 보론 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