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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이도 준 지음 / 김선영 옮김 / 비채 펴냄
작은 상점가에 대형 마트가 들어선다. 상점가 사람들은 대형 마트 개점을 반대하지만 대기업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업을 밀어붙인다. 여기까지만 봤을 때, 굳이 강자와 약자로 나눠 독자에게 한쪽을 편들라고 하면 대다수는 상점 문을 닫고 이사를 가야 하는 작은 상점을 안타까워할 것이다. 여기에 이런 질문을 추가해보자. “대형 마트에는 뭐든지 있을까? 대형 마트에서 불가능한 판매 전략을 작은 상점에서 할 수는 없을까?” <아키라와 아키라>는 영세공장과 은행, 상점가와 대기업 마트, 대기업 안에서도 해운과 상회, 관광업 등 자회사간의 다툼 등 ‘경제’라는 이름 안에 얽힌 복잡한 문제를 호쾌하게 풀어나가는 소설이다. 소설가 이케이도 준의 이름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은행원 출신이라는 그의 이력과 대히트했던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의 원작자라는 것이다.
전작 <육왕>이 소규모 기업이 열정과 아이디어 그
씨네21 추천도서 - <아키라와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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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 모건 지음 /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펴냄
무료로 이용 가능한 실내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사회에서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읽고 빌리는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취약 계층에 도서관은 더위와 추위를 피해 시간을 보내는 곳이고, 컴퓨터를 잠시 빌려 쓸 수도 있으며 물을 마시거나 개인위생도 돌볼 수 있는 공공시설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도서관에 대해 혹은 거기서 일하는 사서의 역할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은 없다. <사서 일기>는 도서관 사서의 실감나는 에세이이지만, 적재에 배치된 생기 어린 캐릭터와 그들이 일으키는 소동 덕분에 소설의 박진감까지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우울증으로 고통받던 앨리는 도서관에서 보조사서로 일하게 된다. 책을 사랑하던 앨리에게 도서관 근무는 간절히 원하던 일이었지만, 막상 거기서 일하기 전까지 ‘도서관 사서’가 얼마나 자질구레한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지는 자세히 몰랐다. 어린이 노래 교실과 뜨개질 클럽 진행, 도서관 단골 이용자의 만성질환
씨네21 추천도서 - <사서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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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혜 지음 / 창비 펴냄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김지혜 작가가 두 번째 책 <가족각본>으로 돌아왔다. 이번 책은 가족제도에 숨은 차별과 불평등을 파헤친다. 그 시작은 “며느리가 남자라니!”라는 시위 구호를 들여다보고, 한국의 가족제도에서 며느리의 위치를 파악하는 작업이다. 2007년, 차별금지법 입법 예고에 대한 반대 시위에서(차별금지법은 지금까지도 입법에 실패하고 있다) 처음 등장한 이 문장은 지금도 볼 수 있다. 며느리와 사위를 구하는 설화를 각각 분석하며 이 책은, 예능으로 치면 ‘사위 고르기’는 단발성 순발력 테스트에 가깝고, ‘며느리 고르기’는 장기전인 서바이벌 리얼리티쇼에 가깝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며느리라는 역할은 “주도성이 요구되는 종속 상태라는 모순적인 위치”인데, 남성의 역할 역시 모순적이다. “남성에게 기대되는 역할은 사회적 출세인데, 이를 이루지 못했을 때 가족 내의 권위는 형식만 남는다.”
<가족각본>은 가족에 대한 한
씨네21 추천도서 - <가족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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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대븐포트 지음 /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펴냄
정물화는 과일이나 꽃, 생선처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대상을 가리킨다. 영어로 스틸 라이프(still life)라고 불리며,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같은 주제에 이르면 움직이지 않는다(still)는 데서 필연적으로 연상되는 죽음을 은유하는 그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박한 예술이다. 문학의 형식에서 비슷한 것을 찾자면 소네트와 같다. 미국의 작가, 학자, 교육자, 번역가, 삽화가인 가이 대븐포트는 문학과 예술에 관한 글을 폭넓게 썼는데, 그중에서 <스틸라이프>는 미술사 속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했으나 현대에 들어오며 가장 실험적인 장르가 된 정물을 (인)문학적으로 살펴보는 저술이다. 정물화에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빵과 와인이 기독교에서 예수의 살과 피를 상징하듯이, 사과와 배는 ‘한쌍의 이미지’로 자주 다루어지며 정물화뿐 아니라 시와 소설, 산문에서도 유구하게 함께 언급되는 소재였다.
씨네21 추천도서 - <스틸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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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라이프> _ 가이 대븐포트 지음
<가족각본> _ 김지혜 지음
<사서 일기> _ 앨리 모건 지음
<아키라와 아키라> _ 이케이도 준 지음
<프닌> _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8월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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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혁이 <씨네21>을 3개월 만에 다시 찾았다. 그새 이준혁은 비리 경찰 주성철로 분한 주연작 <범죄도시3>로 또 한번 천만 배우가 됐다. 배우 고유의 다정한 성정으로, 시네필적 영화 사랑으로, 그리고 변치 않는 자기 관리 능력으로 영화 홍보를 위해 출연한 방송마다 큰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이준혁은 씨네21 X 셀럽챔프가 뽑은 2023년 상반기 최고의 셀러브리티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지난 몇달간 세상의 열렬한 환호와 지지 속에서 바삐 보내다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인 이준혁은 “팬들에게 무척 고맙다”라며 배우 데뷔 이래 가장 가시적인 성과를 남긴 2023년 상반기를 갈무리해주었다.
- <신과 함께> 연작으로 쌍천만 관객 동원의 기록을 갖고 있긴 하지만 주연작으로 천만 관객의 기록을 갖는 기분은 남다를 듯하다.
= 한동안 주연 히트작이 적었던 터라 히트작을 갖고 싶었다. 여러 작품을 오가며 배우로서 하고 싶은 작품은 대부분 거쳤고 각 작품
[인터뷰] '너클볼처럼, 어디서든 융통성을 발휘하며', 배우 이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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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의 우진은 수혁(정우성)을 해하라는 성준(김준한)의 지시를 받고 진아(박유나)와 함께 지구 끝까지 수혁을 쫓는다. 진아는 수혁의 딸 인비(류지안)를 납치하지만 정작 우진은 수혁에게 납치돼 오도가도 못한다. 별안간 수혁과 우진의 로드 무비가 이어지는 와중에 우진은 수혁을 사살하길 포기하지 않는다. 사람을 해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는 사이코패스도 김남길을 거치면 특별해진다. 우진은 등장마다 비장함으로 팽팽한 영화에 숨통을 틔우고 단선적인 내러티브에 놀라운 박진감을 부여한다. 캐릭터를 섬세히 구축하고 이를 유려하게 표현해내는 김남길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 평소 목소리보다 톤을 높여 노래하듯 대사를 소화해 우진이 유년기에 천착하는 캐릭터로 느껴졌다. 우진의 대사 톤을 어떻게 만들어갔나.
= 우진은 그의 대사처럼 어린 시절 발생한 일련의 일들을 환각인지 실제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캐릭터다. 멀쩡한 성인이라면 과거의 고통을 직시하고 깨부수어 갈
[인터뷰] 배려하는 연기, <보호자> 김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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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의 수혁은 러닝타임 내내 평범한 삶의 가치를 찾아 헤맨다. 그런 수혁을 평범과 가장 거리가 먼 정우성이 연기한다는 점이 놀랍다. <보호자>의 서사는 폭력의 세계에서 벗어나길 희구하는 한 남자의 몸부림이다. 그런 영화를 한국영화 역사에서 숱한 액션 명장면을 끊임없이 만들어온 배우 정우성이 연출한다는 점 또한 의미심장하다. 일견 모순으로 가득해 보이는 <보호자>는 영화인 정우성이 커리어 내내 고심한 의문에 대한 결론이라는 점에서 그가 만들 수밖에 없는 영화기도 하다.
- 수혁은 주인공임에도 대사가 많지 않고 수혁의 전사도 극 중에서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다. 연출자이자 각색 작가로서 의도한 여백인가.
= 영화를 만들다보니 지금과 같은 여백이 생겼다. 출소 전 수혁의 모습도 촬영해두었지만 편집 과정에서 전부 걷어냈다. 수혁은 폭력 조직에 몸담았던 스스로에 대한 회한으로 가득한 인물이다. 수혁은 언어보다는 물리적 폭력이 우선되는 세계에서만 살
[인터뷰] ‘평범’과 ‘몸부림’의 딜레마, <보호자>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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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의 감독 데뷔작 <보호자>가 8월15일 개봉했다. <보호자>는 정우성이 직접 쓴 <폭력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출소 후 어린 딸에게 평범한 아빠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수혁(정우성)을 통해 (한국)영화가 답습해온 폭력 재현과 약자 묘사의 정당성을 묻고, 고질적 문제의 개선안을 탐구한다. 한편 청부살인콤비 세탁기의 일원인 우진(김남길)은 무차별 범죄를 즐기며 폭력에 무감해진 사회를 삽시간에 경각한다. 이처럼<보호자>는 폭력의 주체와 이를 거부하기 위한 감독 겸 작가의 분신을 영화에 공존시킴으로써 한국영화가 누적해온 폭력 묘사의 현주소에서 벗어난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다. 데뷔 초부터 품어온 영화연출의 꿈을 마침내 이룬 감독 겸 배우 정우성과 등장하는 장면마다 관객을 무장해제시키는 배우 김남길을 만났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보호자> 정우성, 김남길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기획] 평범을 향한 이정표, ‘보호자’의 정우성, 김남길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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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가려진 시간> <잉투기> 등 연출
'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오퍼: ‘대부’ 비하인드 스토리>
영화 한편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 너무 상세해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올 지경이다. 영화를 위해 뭔가를 계속 시도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노력이 불발될 때의 상황을 보면 내가 다 지치는 것 같다. 하지만 고난만큼 행복의 강도도 크다. 코를레오네 가족을 맡은 배우들이 처음 모여 즉흥극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찍힌 프랜시스 코폴라의 표정이 딱 <콘크리트 유토피아> 반상회 촬영 현장에서의 내 얼굴 같더라. 이 순간, 이 사람들이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입이 귀까지 걸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더 크라운>
최근 본 영화, 드라마를 통틀어 가장
[LIST] 엄태화가 말하는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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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운 미소, 작은 생명체라도 밟을까 조심하는 듯한 걸음걸이, 아이들을 인솔하고 기도를 올리는 신실한 손. <지옥만세>의 채린(정이주)은 누가 봐도 낙원행이 가장 유력한 청소년 신도다. 그런 그에겐 미소 띤 얼굴로 천천히 걸어가 제 손으로 친구의 얼굴에 케이크를 엎던 과거가 있다. 자신이 괴롭힌 나미(오우리)와 선우(방효린)가 선교회를 찾아왔을 때 채린은 새로 태어났다며 그들을 반기지만 겁먹은 두 친구를 본 관객은 그에 대한 의심을 시작한다. <지옥만세>를 말하는 배우 정이주는 명확했다. “두 인물에게 정확한 타이밍에 적절한 자극을 주는 역할”이라며 맡은 캐릭터의 쓰임을 간명히 소개했고, 가해자의 서사가 피해자의 그것보다 커져서는 안된다며 거듭 강조했다. 채린이 알 수 없는 인물로 정확히 표현될 수 있었던 건 캐릭터를 간파하고자 한 배우 정이주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임오정 감독이 “중전마마처럼 우아해 캐스팅했다”라고 하더라. 오디션 때 어떤 모
[인터뷰] 연기의 쾌감, ‘지옥만세’ 정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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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듯한 몽환적인 표정, 껄렁한 목소리, 성의 없는 말투. 황선우는 학교 친구들의 괴롭힘으로 죽음을 자주 생각하지만, 기질적으로 타고난 엉뚱함과 명랑함은 어떤 것으로도 가려지지 않는다.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학교 폭력 가해자 박채린(정이주)이 회개하고 낙원에 가겠다는 반전의 모습을 보여도 선우는 그를 끝까지 믿지 않는다. 누가 용서하고 누가 벌할 것인가.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지막까지 자전거 페달에 힘을 더하는 선우는 그간 외면한 지옥을 포용한다. 모든 게 쑥대밭이지만 마침내 “웰컴 백 헬이다”를 인사치레로 건넬 수 있게 된 두 여자아이를 보며, 어쩌면 이들 곁에 진짜 낙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얻는다. 오랫동안 선우를 생각하고 선우를 그려낸 배우 방효린을 만났다.
- <지옥만세>에 합류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오디션을 복기해보자면.
= 비대면 오디션으로 진행된 1차에서는 송나미와 황선우 모두
[인터뷰] 단단한 내면의 수호자, ‘지옥만세’ 방효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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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억눌리고 상처받으며 살았을 때의 나 같다.” 배우 오우리는 <지옥만세> 속 송나미와 본인의 모습을 하나로 겹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소위 ‘오글거리는’ 대사를 무리 없이 소화하는 특유의 감성, 종종 본인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왈가닥 같고 어리숙한 모습들. 최근 5년간 20편이 넘는 독립 장·단편 영화에 얼굴을 내비치면서 주로 사회의 그늘, 성장기의 아픔을 그려냈던 오우리의 본성은 이처럼 명랑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그는 본인의 얼굴을 두고 영화의 문제의식과 서사성을 관객에게 던질 줄 아는 “물음표의 눈”을 가졌다고 규명한다. 배우로서 자신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적확히 아는 자신감, 그리고 그 자신감을 밀어붙이기에 충분한 활동량이 만나서 지금의 ‘배우 오우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 대략 5년째 매해 4~5편의 장·단편 영화에 출연 중이다. 그동안 3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워커홀릭인가.
= 맞다. 내가 봐도 일중독이다. (웃음) 사실
[인터뷰] 물음표의 눈, ‘지옥만세’ 오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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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채린(정이주) 얼굴에 흉터를 남겨서 평생 고통스러워하게 만들자.” 고등학생 나미(오우리)와 선우(방효린)가 세운 무시무시한 계획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미와 선우는 채린에게 지독한 학교 폭력을 당했던 피해자들이다. 둘은 복수심을 참지 못하고 이사 간 채린을 찾아가기에 이르는데,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다. 채린은 미지의 종교 단체에 빠져 영 딴사람이 돼 있다. 낙원으로 가기 위해서 지난 죄를 회개하고 있다며 배시시 웃기만 한다. 나미와 선우는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하다. “이거… 복수를 해야 해? 말아야 해?”
무겁고 쓰라린 주제이지만, <지옥만세>는 우울함에 지배되지만은 않는다. 한시도 몸과 입을 가만히 두지 않는 나미, 침울해 보이다가도 당차게 “오키오키!”를 외치는 선우,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채린이 사춘기 시절의 다채로운 감정을 연신 뿜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또래 친구 셋의 현실감은 스크린을 뚫고 <씨네21> 촬영장에서도 이어졌다. 촬영을 앞두고
[커버] ‘우리들의 천국’, <지옥만세> 오우리, 방효린, 정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