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9일 오전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 KOFA는 <킬러들의 수다>와 박정민 배우를 보기 위한 이들로 북적였다. 1년간 배우 활동을 쉬겠다고 말한 그가 <씨네21> 창간 3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나섰기 때문이다. “<씨네21>의 제안은 거절을 못하겠어요.” 박정민 배우는 관객과의 대화 초입에 이렇게 털어놓았다. “데뷔 때 배우로서 <씨네21>의 인정을 받았으면 좋겠단 마음이 되게 컸어요. <씨네21> 스튜디오에 가면 옛날 선배님들의 사진이 붙어 있는데, 이분들이 사진을 찍었던 공간에서 내가 사진을 찍는다는 게 아직도 신기해요.” 그의 말처럼 박정민 배우는 데뷔 이래 수차례 <씨네21>과 만났다.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 <파수꾼>이 공개된 이후 지난 15년간 그에 관한 기사가 이 잡지에 실렸으니 30년 세월 중 절반을 동행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희 동네엔 <씨네21>이 토요일 지하철 편의점에 가장 먼저 들어왔어요. 토요일이면 달려가서 사서 읽을 만큼 저에겐 추억이 많이 쌓인 소중한 잡지예요. 기자님이 15년 동안 함께해왔다고 말씀해주셨지만 더 길어요. 전 어렸을 때부터 읽었거든요.”
박정민 배우가 이날 <씨네21> 구독자들과 다시 보고 싶다고 선정한 영화는 <킬러들의 수다>였다. 과거 <씨네21>을 뒤적이며 기사를 읽고 스크랩해둔 영화이기도 하다. 신현준, 정재영, 신하균, 원빈 네 배우는 허술하지만 실력만큼은 뛰어난 킬러로 등장하며, 조폭 코미디류가 쏟아져 나오던 2001년 극장가에 걸렸던 영화다. 친구들과 매주 극장에 가다시피 했던 중학교 3학년 박정민의 눈에 <킬러들의 수다>는 그동안 본 코미디영화와는 다르게 비쳤다고 한다. “좀 달랐어요, 이 영화는. 대사도 템포도 특별하죠. 장진 감독님 특유의 리듬이 있었어요.” 이 영화에 얼마나 빠졌던지 학생 시절 그는 영화 후반부에 상연(신현준)이 전화기와 모니터에 총을 쏘는데도 불구하고 조 검사(정진영)가 물건값만 내라고 말하며 풀어주는 신을 친구들과 따라 했다. “전화기 값 5만원 내고 가라”, “35만원만 내고 가라”란 조 검사의 대사를 “500 원만 내고 가라”라고 패러디해 말장난하며 친구들과 킬킬거렸다.
당시 박정민은 길눈이 어두워 마라톤을 그만둔 욱하는 성격의 킬러 정우(신하균)와 백발백중으로 타깃을 제거하는 믿음직한 킬러 재영 (정재영)을 유난히 좋아했다. 두 캐릭터를 연기한 선배 배우들을 향한 애정은 배우가 된 지금도 여전하다. “그냥 못 따라 하겠어요. 내가 못 따라 하는 걸 눈앞에서 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해요.” 두선배를 향한 애정은 그리고 장진 감독 특유의 영화적 리듬과 얽혀 있었다. 그가 보기엔 두 배우가 장진 감독의 텍스트를 가장 잘 살리는 배우란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만큼 장진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다는 의미다. “제가 장진 감독님을 정말 좋아했어요. 지금도 좋아하지만, 정말 제 아이돌이셨어요.”
이날 특별전에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조 검사가 킬러들의 집을 수색하는 시퀀스에서 영사 사고가 일어나 상영이 중단된 것. 박정민 배우도 관객도 영화가 다시 시작되길 기다리는 20분 남짓한 시간은 역설적으로 필름의 물질성과 힘을 실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필름 영화가 진짜 힘이 있다고 느꼈어요. 소리가 딱 꺼지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영화는 관객에게 낭만을 선물하는 매체라고 생각해요.” 이어 진행된 관객에게 질문을 받는 시간은 진지하게 흘러갔다. 요즘 한국영화 중 <킬러들의 수다>와 같은 작품이 없다는 말에 박정민 배우는 “한국영화 극장 상황이 안 좋다는 얘기들”이 “슬프고 속상하다”면서도 “이젠 떼쓸 타이밍은 아니다”라며 조심스러운 의견을 냈다. “관객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해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영화잡지를 사기 위해 달려갔던 마음, 스크린 속 배우 연기에 찬탄했던 순간, 친구들과 영화를 소재로 말장난을 주고받던 기억. 아주 사적인 순간부터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소신까지. 배우 박정민의 ‘지극히 사적인 영화관’은 이름에 걸맞게 흘러갔다. 마지막 인사말로 그는 오랫동안 함께한 영화잡지의 미래와 안녕까지 빌었다. “<씨네21> 30주년을 축하하고 100주년까지 꼭 가시길 바란다는 응원의 말씀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