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세계를 계속 욕망하다 보면 미치게 된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 속 황동만의 경우다. 8인회 동료들은 모두 데뷔의 영광을 누린 지 오래, 오직 그만 아직 ‘영화감독’이 못 됐다. 보기에 따라 이 남자는 자폭 상태일 수도 있고 아직은 살 만한 수준일 수도 있다. 세상을 죽도록 미워하면서 그 세상을 원하는 남자의 팔목에 <나의 해방일지> <나의 아저씨>의 박해영 작가는 감정 워치라는 SF적 장치를 사랑의 실마리로 채워둔다.
곁눈질하면 황동만은 구교환이 연출, 주연한 단편영화의 페르소나들과 닮아 있다.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2013)에서 무명배우 고기환(구교환)은 작품을 완성도 하지 못한 채 꺾여버린 감독들을 찾아나섰고, <플라이 투 더 스카이>의 독립영화 감독 교환(구교환)은 생계를 위해 굴삭기에 올라탔다. 동만은 어쩌면 그들의 더 우울한 미래를 짊어진 캐릭터이고, 또 다른 평행우주 어디쯤에선 구교환이 <대리운전 브이로그>(2022)를 찍으며 고군분투 중인 상황이다.
배우가 자신을 투영했던 인물형의 대중적 탄생을 구교환은 이렇게 묘사한다. “박해영 작가는 나를 창조한 사람처럼 나의 작동 원리를 안다.” 황동만은 구교환보다 때로 더 구교환스럽다. 독특한 자기다움을 더하는 데 능한 배우가 이번 작업에선 오히려 텍스트에 충실했던 이유다. 그에게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바라본 황동만은 과연 누구였느냐고 물었다. 배우가 천천히 입을 열면서 얼마 전에서야 자신도 정의 내렸다고 덧붙였다. “창의적으로 미친 사람. 영화를 만들 수 없어서 자기를 스크린으로 만든 남자. 나는 그에게서 스스로 극장이 되겠다는 어떤 의지를 느꼈다.”
- 제작자 최 대표(최원영)에게 모욕을 당한 후 외치는 동만의 대사, “그리고 난! 내 무가치함의 끝에서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릴 거야”로 시작할까요. 표현 방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동만의 저 대사를 마음에 품는 시절이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있겠죠. 구교환에겐 언제였어요?
지금도 매일 진행되고 있어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많은 것들이 빠르게 무가치해지거나 사라져버리니까요. 그래서 저한테 동만의 마음은 계속 실시간으로 진행되 중입니다. 이 반복 속에서 제가 얻은 생각은 무엇이 무가치하고 무엇이 가치 있는지 지나치게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자는 거예요.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어느 순간 가치 있게 변신해서 올 때도 있고, 너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경도되거나 함몰돼 있을 때 결국은 독이 되기도 했거든요.
- 창작하는 사람들에겐 어쩌면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느낄 정도의 절망이 좋은 것을 만들게 이끌어준다는 격려로 들리기도 하는 대사였어요.
맞아요. 그리고 빛나는 자기의 진실을 찾는 게 창작자만의 영역도 아니죠. 모든 사람들이 계속 스스로를 향해 질문하고 갱신되고 싶어 하지 않나요? 저도 요새 계속 F4 누르고 있어요.
- 1·2화를 보면서 주인공이 비호감이라고 느끼는 시청자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동만이 모두를 미워하는 ‘모두까기’의 제왕, 질투의 화신이고 그래서 종종 타인을 자신만큼 아프게 한다는 사실 때문이겠죠. 어쩌다 세상이 미울 때, 구교환의 처리 방식은 어떤가요.
조용히 속으로 일단 미워해요. 저주도 하고요. (웃음) 질투 같은 거 생길 때는 질문해봐요. ‘너 진짜 그게 하고 싶어?’ 혹은 ‘갖고 싶어?’ 저도 한창 동만이처럼 질투가 많은 시절이 있었거든요. 질투 가도를 달리던 시기에 질문을 돌려준 친구가 있었어요. 그게 정말 네가 부러워하는 게 맞냐고. 본질을 원하는 게 아니라 거기 따라오는 세속적인 것들, 성공, 명예 등등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아닌지 물어보는 거죠. 대부분 맞더라고요. 저도 비슷한 감정으로 흔들리는 누군가에게 똑같이 위로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 배우가 자기 캐릭터를 연민했다면 표면적으로 좀더 호감가는 인물로 표현했을까요? 해석의 방향을 놓고 얼마나 온건하게 혹은 가차없이 표현할지 질문했겠습니다.
가차없는 쪽으로 가고 싶었죠. 사실 전 제 표현이 혹시 과하지는 않을지 많이 되묻곤 하는데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를 할 땐 외려 걱정이 적었어요. 이 문제적 인간을 던져놓고 시청자들에게 같이 한번 살펴보자고 말 걸고 싶었어요. 유독 평가가 분분한 사람이 있잖아요. 사람들이 다 다르게 보는. 황동만은 그렇게 살아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동만은 색이 강한 캐릭터지만 그만큼 뾰족한 리얼리티를 품고 있어요. 시청자가 자기 삶에서 겹쳐볼 만한 사람을 떠올리게 하고요. 굳이 빗대자면 구교환이 쓰고 연출한 작품에 나오는 남자들도 사실 비슷한 과 아닌가요.
저 사람 보고 있으면 되게 힘든데 시나리오 주인공으로는 쓰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간. (웃음) 전 친절하고 멋진 신사를 주인공으로 쓰고 싶은 욕망은 없거든요. 내가 쓰고 싶은 인물을 연기하게 된 거죠. 과거엔 비슷한 텍스트가 있을 때 배우인 제가 캐릭터를 황동만스러운 쪽으로 일부러 좀더 데리고 갔달까. 그런데 이번엔 “아니, 나보다 더 한… 내가 더 데리고 안 가도 되는 사람이네!’ 싶은…. 과일 따가지고 어떤 첨가물도 없이 최대치로 쭉 짜야 하는 일 같았어요. 항상 시청자와 관객에게 어떻게 도달할지 고민을 많이 하는데,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를 하는 동안엔 제가 제1관객으로서 쾌감이 있었어요. 결과물로 평가받기 전에 동만이란 인물이 제게 충만함을 준 거죠.
- 기벽이라 부를 만한 동만의 습관들이 그에 관해서 많은 걸 말해줍니다. 마을 동산에서 자기 이름을 외쳐 부르고 스스로 대답하는 일종의 의식부터 이야기해보죠.
제가 현장에서 모니터 앞에 잘 안 가요. 자기 이름 외쳐 부를 때 그렇게 큰소리를 내는지, 얼굴 근육을 그렇게 희한하게 쓰는지 나중에 보고 조금 놀랐어요. 그 순간이 동만에겐 구호나 다짐 이상이죠. 처음 대본을 읽을 땐 기합을 넣는 의식이자 아침 루틴 정도로 봤는데 막상 외칠 때 진짜 눈물이 났어요.
- 감정 워치가 허기라 명명하는 감정이 동만에게 폭식을 불러요. 공허감을 폭식으로 채우는 상태를 미디어가 다소 상투적으로 재현해온 감이 있는데, 동만의 경우를 어떻게 표현하고 싶었나요.
스트레스 상황에서의 자기 파괴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노력으로 보고 싶었어요. 저는 정말 그런 마음으로 몰입했어요. ‘허기’잖아요. 동만은 감정 워치의 진단을 보고 어떻게든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취한 게 아닐까요. 약과를 고추장에 막 찍어 먹죠. 맛이 없어도 약을 먹듯이. 근데 약과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무슨 맛이 나는 줄 아세요? 튀겨서 양념 묻힌 떡꼬치 맛이 나요. 어릴 때 먹던 그거요. 찍다가 그런 생각이 들던데요. 박해영 작가님은 미식가구나, 이걸 알고 계셨구나.
- 첫 채널 드라마 주연작인데요. 영화 현장에서는 구교환 특유의 말맛과 즉흥적 디테일을 테이크마다 열어주는 연출자들이 많았죠. <만약에 우리>나 <탈주> 등에서 감독님들이 직접 회고한 바도 있고요. 드라마 현장은 작가가 쓴 대사를 충실히 옮기는 작업이 보다 중시되는 분위기일 텐데 어땠나요.
비유하자면 원작 애니메이션이 있는 작품을 실사화하는 작업에 참여한 느낌?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라는 애니메이션을 실사화시키는 데 황동만 역을 무려 제가 하게 된 거죠. 원작 팬들을 설득시키고 나도 설득당하자, 그런 마음이었달까.
- 황동만 버전의 <룩백> 같은 거네요.
너무 좋아해요! 마치 원작이 있었던 것만큼 잘 옮기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로서는 이번 드라마 작업을 하면서 스타일도 살짝 바꿔봤는데 혹시 느끼셨어요? 대사를 또박또박 씹어서 치기.
- 동만은 불안하면 상대방은 신경 안 쓰고 자기 페이스대로 와다다다 내뱉는데 신기하게도 그 말들이 방백처럼 다 잘 들리죠.
작품을 준비하면서 챗GPT한테 혹시 구교환이란 배우의 연기 스타일은 어떤 것 같냐고 한번 물어봤더니 “구교환은 장단음 신경 안 써”라는 거예요. 그동안 연기할 때 장단음 구분을 지나치게 의식하기보다 자연스럽게 하자는 주의였는데 일단 녀석이 그걸 알길래 놀랐고(웃음), 이번엔 한번 제대로 지켜보고 싶었어요. 저 자신이 작가의 글자라는 마음으로. 감정을 소화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어미나 대사의 디테일을 달리 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제가 알아서 다시 한 테이크만 더 가보자고 요청하기도 했던 것 같아요.
- 역대 맡은 작품 중 대사량이 가장 많은 작업이었을 텐데 대본 암기는 평소에 수월하게 하는 편인가요.
아뇨. 그런데 어떻게 다 되어버려요. 아마도 제가 이 대사들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돼서 그런가봐요. 읽을 때부터 재미있어 하니까. 적응하고 나니 읽는 노하우도 생겨서 점점 더 금방 외워지기도 하고.
- 신기한 건 ‘이건 구교환식 대사다’ 싶은 표현들이 곳곳에 있다는 거죠.
동만의 감정은 정말 현실적이지만 대사의 흐름은 노래 같아요. 제가 원래 대사를 리듬감 있게 치는 걸 좋아하는데 덕분에 신이 나죠. 박 작가님은 지문도 굉장히 자세하게 쓰시거든요. 근데 그게 저랑 취향이 너무 잘 맞아요. 2화 후반부에 동만이 최필름 대표실을 박차고 들어가서 최 대표한테 따질 때를 예로 들어볼게요. 최 대표가 “오케이. 들어줄게, 해봐” 하는데 정작 동만은 기세좋게 덤벼놓고 준비한 말이 안 떠오르는 상황이죠. “까먹었잖아 씨… 아” 한 다음 “다시 한다, 잘 들어!” 하곤 혼자 조용히 “레디, 액션!”을 읊조려요. 그러곤 곧장 능숙하게 “수많은 살인사건이 왜 일어나는지 아나?” 하고 연극투로 다가가고요. 실제로 대본에 어떻게 쓰여 있었냐면 “레디, 액션!” 다음에 “(연기하듯 능숙하게)”라는 지문이 있는 거예요. 아까 기자님이 처음 질문하신 “그리고 난! 내 무가치함의 끝에서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릴 거야”라는 대사는요. “그리고 난” 다음에 “(살짝 울컥)”이라고 쓰여 있어요. 둘 다 똑같이 했지요. 지문들이 없었다고 해도 저는 비슷한 호흡으로 해석했을 거고요. 혜진(강말금)이 아지트에서 동만을 쫓아낼 때 이 친구가 그 와중에 “내일 봐” 그래요. 제가 애드리브를 했을 것 같은 대사인데 그게 대본에 그대로 있어요. 작가님의 대본, 즉 인물의 ‘순정’ 상태하고 싱크가 너무 잘 맞으니 신기할 따름이죠. 후반부에 동만의 코미디 장면이 있는데, 제가 거기서 딱 한번 작가님이 쓰신 것보다 더 나아갔어요. 몇개 더 얹은 거죠. 나중에 뒤풀이에서 작가님을 만났을 때 물어보니 작가님이 그 대목 쓸 때부터 왠지 그럴 것 같았다고. (웃음)
- 오늘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박해영 작가가 배우의 DNA를 살뜰히 파악한 덕분일까 싶기도 하네요.
작가님에게 전화 한번 드린 적이 없어요. 물어보면 오히려 어긋날 것처럼 조심스럽기도 하고. 결과물로 이야기 나누고 싶었어요. 촬영본 모니터링을 작가님도 하실 테니까. 촬영 후반부부터는 서로 대화하는 기분이었어요. 촬영 중반에 후반부 대본들이 나오는데 앞서 제가 해석한 블로킹(동선)이나 동작들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은 대본처럼 느껴졌어요. 작가님은 대본으로, 저는 연기로 주고받은 펜팔 같은 게 된 거죠.
- 드라마 작업에서 배우는 늘 많은 시간을 얼굴에 바짝 붙은 카메라와 함께하죠. 도피처를 어디로 삼나요.
일단 좋은 건 그렇게 주야장천 보여줘도 황동만은 여전히 미스터리한 사람이라는 점 같아요. 카메라가 거의 귀 옆에까지 들어와 있는데도 저 자신도 아직 동만을 다 모르겠다고 느낄 때가 있었어요. 그 모름은 기분 좋게 모르는 거고요. 그래서 힘들다기보단 에너지 넘치는 현장이었어요. 제가 항상 추구하는 거지만 감독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최대한 편안해지려고 해요. 서로 잘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못난 걸 빨리 고백하는 거예요. 차영훈 감독님은 다정한 사람이에요. 작품으로도 이렇게 친해질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 100회차에 육박하는, 물리적으로도 육중한 시간이 다 끝난 다음 여운이 꽤나 남는 작품이었겠습니다.
나중에 후폭풍이 오긴 오더라고요. 마지막 촬영 끝난 날 밤에 밥 먹다가 저도 모르게 ‘아, 대사 외워야지’ 하는데 외울 대사가 이제는 없는 거죠. 이런 얘기 좀 촌스러운가요?
- 박해영 작가가 꾸리는 일종의 ‘동네 유니버스’에서 친구이자 이웃의 존재는 절대적입니다. 그렇게 자주 욕하고 싸우면서도 동만은 제 발로 늘 8인회의 아지트 문을 두드려요.
결국 친구인 거죠. 우리가 말하는 그런 친구. 너무 쉽고도 어려운 얘기예요. 경세는 영화를 5편이나 했고 동만이는 한번도 못했고…. 두 사람이 서로 편안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후반부에 그 해답이 기막히게 제시되는데 저는 정말 한방 맞은 것 같았어요. 그 신을 연기하는 내내. 자세한 이야기는 아직 공개 전이라 할 수 없지만 동만의 결심을 듣는 경세를 오정세 배우가 정말 탁월하게 연기했어요. 제가 맞은편에서 신기할 정도로요. 강아지가 모르는 말을 처음 듣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거예요. 꼭 그 버전이 편집본에 실렸으면 좋겠어요. 그러고보니 <모자무싸>는 저한테 제가 기억하는 프레임 속 모든 등장인물들의 얼굴이 있는 작품인가봐요. 동만은 모두를 만나니까요. 그걸 저도 얼른 다 보고 싶어요.
- 준환(심희섭)과의 관계를 놓고는 벌써 이쪽이 멜로가 아니냐는 반응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그러게요. 스킨십도 있고. (웃음) 찍는 동안 동만이 기댈 곳이 지금 준환이밖에 없구나, 싶었지요. 저도 준환에게 더 애정과 다정함을 보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심희섭 배우를 보고 있으면 진짜 편하기도 했어요. 저절로 엉덩이 탕탕 치면서 연기하게 되고요.
- 자기를 리트머스지에 비유하는 황동만 표현처럼 모든 관계마다 조금씩 내보이는 얼굴이 달라요.
이전에도 몇번 한 얘기지만 누가 제 성격을 물어보면 속해 있는 집단에서 다 다르다고 말해요. 어디 가서는 막 날뛰고 어디 가서는 내내 조용하고 그렇죠. 동만이도 비슷한 게 아닐까 싶어요.
- 동만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세를 보다못해 혜진이 아지트에서 동만을 내치기로 합니다. ‘어른의 손절’ 신에서 혜진이 동만에게 연애하라는 조언을 해요. 세상에 한 사람, 딱 한 사람만 자기 편이 돼주는 사람이 있으면 회복할 수 있다는 의미일까요?
그게 사랑이든 우정이든 저도 그걸 믿는 편이죠. 연애가 아니라 영화 찍는 것도 똑같아요. 제가 항상 ‘한명만 있으면 된다’고 하거든요. 나와 함께 작품을 온전히 사랑해줄 동료 한명만 있어도 그 영화는 잘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이때 저랑 싱크가 잘 맞을 필요도 없어요. 그저 나만큼 그것을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싸우고 서로 힘들게 해도 괜찮아요. 그리고 혜진의 조언은 동만에게 제발 일단 무언가를 사랑해보라는 부탁일 수도요. 무언가를 사랑하면 시선이 바뀌니까.
- 이제 은아(고윤정)가 등장할 차례네요. 은아의 감정 워치엔 곧잘 ‘알 수 없음’이라고 뜨고 코피가 함께 찾아오는데, 의사의 진단으론 “분노·절망·슬픔이 90%이고, 나머지 10%는 간절함” 정도라고 하죠. 동만에게 은아가 필요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만큼 은아에게도 동만이 필요한 시절인 거죠.
은아에게 감정 워치 없이도 자기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존재가 동만이었음 해요. 감정을 알려주는 사람이기도 하겠죠. 동만 입장에서도 은아는 감정 ‘사부’죠. 상대를 천재라고 생각하고 영감을 주는 관계, 서로에게 꼭 필요한… 그리고 전 그게 좋아요, 동만은 말이 진짜 많은데 은하는 말이 진짜 없거든요. (웃음) 약간 이런 걸까 싶은데, 퍽퍽한 살을 좋아하는 사람이랑 껍질을 좋아하는 사람의 궁합? 그게 무적이 되거든요. 상대가 얼마나 유능한가 따질 게 아니라 조합 자체가 중요한 거죠. 위력을 발휘하는 시너지가 나려면요.
- 동만은 형 진만(박해준) 앞에선 소년 같아요. 울고 생떼를 부리다가도 아픈 부모 돌보는 아이처럼 의젓해지죠.
형 집에 얹혀 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동만이 형을 지켜주는 지점이 보이는 거지요. “밥 안 먹어서 그래, 내려와. 김치볶음밥 해줄게.” 자살 시도하는 형 앞에서 담담하게 이런 대사를 할 때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형제의 삶에서 따뜻한 밥 담당은 항상 동만이에요. 동만이 형을 진짜 좋아해요. 나중에 은아한테 자랑도 막 하고. 둘이 막 거칠게 싸울 때 누가 봐도 그 아래 사랑이 있는 게 느껴지고요. 해준 선배의 멋진 연기가 한몫해주죠. 사랑을 깔아놓은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막 성을 내는 게 진짜 어려운 경지라고 생각하는데,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아무튼 베이스는 사랑이에요.
- <모자무싸>에 관한 제 마지막 질문은 동만의 회심작 ‘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의 운명입니다. 데뷔의 향방은 숨겨두어야 할 것 같고, 실제 감독 겸 작가인 구교환의 크리틱이 궁금합니다. 이 작품 괜찮은가요?
흠… 제 평가는… 봐야 알겠다? (웃음) 일단 짚고 넘어가자면 저는 또 시나리오만으로는 평가를 안 하는 타입이어서요. 글로만 본 ‘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에 대한 평가는 ‘내가 출연하고 싶다, 나 캐스팅 되고 싶다’ 정도입니다. 동만이 같은 연출자라면 제게 없는 걸 채워줄 것 같아요. 그래서 오디션을 보고 싶어요.
황동만의 구성 요소
테마곡 “영화판, 특정 리그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동만과 함께할 때는 유독 신들마다 대중가요를 많이 들었어요. 길버트 오 설리번의 <Alone Again>, 좋아하는 이소라 누나의 음악들. 그리고 <엉뚱한 상상>! 이 노랜 SF적이에요. 몇년째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지 않아서 세상 사람들 모두가 기다리는 상황인데 후렴구에서 갑자기 “창밖을 봐, 눈이 와” 하고 기뻐하니까. 아마 눈은 오지 않았겠죠. 어쩐지 동만 같아요.(<엉뚱한 상상>은 1996년 여름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원하는 캐럴을 들고 나온 가수 지누(작곡가 히치하이커)의 데뷔곡이다.-편집자)
애장품 “동만의 헤드폰이 제가 실제로 쓰는 것과 같아요. 제작팀에서 같은 제품을 구입하고 스크래치까지 똑같이 만들었어요. 그냥 내 거 써도 되는데…. 드라마는 호흡이 기니까 황동만 핸드폰에다가 유튜브 뮤직을 설치하고 언제든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뒀어요. 버스 장면은 진짜 음악을 들으면서 찍은 거죠. 물론 동만은 헤드폰 쓰고서 음악을 안 들을 때도 많아요. 아지트 앞을 지나갈 때라든가. 경세가 그런 동만에게 ‘너 다 들리잖아. 못 듣는 척하지 마’ 할 정도로 티가 나요.”
제2의 피부 “베를린국제영화제에 갔다가 빈티지 마켓에서 구해왔다는 구멍난 군용 롱 재킷은 의상팀이 촬영 중에도 꾸준히 데미지를 입혔어요. 후반부에 가면 옷이 더 맛있게 익습니다. 동만은 스토리를 좋아하니까 옷에도 스토리가 느껴지게 노력했고요. 이번에는 정말 제 옷을 많이 입었어요. 주변에서 많이들 알아차릴 정도로.”
인생 영화 “황동만의 인생 영화는… 초반에 집에서 보던 <봄날은 간다>외에도 <빌리 엘리어트><이터널 선샤인>정도? 연기하는 저는 제 최애 영화들을 생각했죠. <키즈 리턴>을 많이 떠올렸던 것 같네요. 그런데 동만은 과거보다 영화를 많이 안 보는 상태라고 봤어요. 아, 못 보는 것이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