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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오후의 벤치는 한산하다. 바람이 제법 매섭다. 넘실대는 파도 위로 햇빛이 비쳐 눈이 부시다. 하얀빛이 물결 위에서 반짝이며 춤을 춘다. 시인 L씨라면, 텅 빈 벤치 하나를 즐거이 차지한 채 이 즉흥적인 춤을 분명 두어 시간은 넋놓고 바라봤을 것이다. 구름이 해를 가려 빛의 춤이 일시적으로 멎어도 감상은 여전히 지속된다. 이번엔 구름과 해의 숨바꼭질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풍경의 명암을 시시각각 바꾸는 이 숨바꼭질은 하늘과 땅 전부를 대상으로 하는 큰 스케일의 장난처럼 느껴진다. 드넓은 풍경 전체의 분위기가 끊임없이 바뀐다. 인상파 화가라면 이 변화무쌍한 빛의 유희에 황홀해하며 그 과정을 붓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시인 L씨에게는 이 위대한 놀이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그저 바삐 제 갈 길만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멍청해 보인다.
직장의 룰, 잉여생활의 적
열정적인 잉여생활을 위해 드러머 K씨는 최근에 학교 강의를 중단했다. 직장은 단연코 정규 잉여생활 최대의 적이다. 직장의
밤이 되면 그곳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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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자질구레한 생활상을 주 소재로 삼아 웃음을 양산하는 생활툰 작가에게 ‘잉여’란 꽤 친숙한 어휘로 느껴지겠지만, 막상 잉여됨을 주 소재로 삼는 작가들의 실생활은 의외로 빠듯하다. 간단해 보이는 그림체를 사용하지만 아이디어를 구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할 때가 많으며, 형편없는 아이디어로 분량을 채우다 보면 댓글란에 올라올 각양각색의 비난성 댓글에 시달리는 망상에 빠진다. 이렇게 빠듯하고 규칙적이고 건전한 마감생활을 지키다 보면, 어김없이 게으르고 나태하며 한없이 남아돌던 시간들을 동경하게 된다. 아마도 잉여의 의미는 직업과 직군, 개인의 성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나의 경우 잉여질이란 그간 즐겨왔던 무수한 콘텐츠들, 그리고 ‘덕질’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를테면 옛날 영화 보기. 최근엔 크리스토퍼 놀란의 데뷔작, <두들버그>와 <미행>을 봤다. 어쩌면 놀란은 초기에 자신이 만들고자 했던 비전과 스타일을 확립해놨는지도 모른다. 앨프리드 히치콕
쓸데없어 쓸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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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영화를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를 꼽자면 주저없이 ‘잉여’를 고르겠다. 주변부에서 쑥덕거리던 잡담에 불과했던 잉여들의 이야기는 먼지처럼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더니 어느새 온 방 안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채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단순히 캐릭터의 소재로 차용하던 것을 지나 이제는 제목 전면에 ‘잉여’를 내세우며 호기롭게 잉여로움을 외치는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청춘들은 나이가 들어도 변변한 벌이도 없이 엄마 집에 빌붙어 살면서(<고령화 가족>), 때로는 현피(현실에서 직접 싸움을 벌이는 것)에 몰두했다가(<잉투기>), 어느 순간 인터넷 성인만화 사이트를 그리겠다고 호들갑을 떨더니(<네버다이 버터플라이>), 갑자기 돈 한푼 없이 유럽 여행을 간다고 나서기도 한다(<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주위의 걱정어린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정작 본인들은 천하태평, 유유자
우린 안 될 거야, 아니 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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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아니다. 잉여로 넘쳐나는 대한민국에서 이제야 전면에 나온 것이 외려 더 신기할 정도다. 올해 한국영화의 핵심 키워드로 부상한 ‘잉여’는 실상 익숙하고 보편적인 문화코드다. 처음에는 낙오자쯤으로 인식되던 잉여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더니 이제는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는 중이다. 혹자는 잉여들의 시각에서 색다른 창조력을 발견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웃음의 도구로 활용한다. 좋든 싫든 당신도 언제든 잉여가 될 수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우리는 잉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그들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오늘도 그들의 잉여로움을 보며 웃고 즐기고 있지만 여전히 잉여의 정체가 궁금한 당신, 지금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바로 당신을 위해, 여기 2013년 잉여인간 생태보고서를 마련했다.
밥은 먹고 다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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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의 <풍경>을 두번 보았다. 장률이 <풍경>을 두번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올해 전주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 세편 중 하나로 고바야시 마사히로, 에드윈과 함께 ‘이방인’이라는 주제 아래 <풍경>을 찍었다. 이 영화는 42분이다. 그런 다음 다시 <풍경>이란 제목으로 이 영화를 96분으로 만들었다. 장률은 두 영화 사이에 일부 장면이 겹치긴 하지만 단순히 늘리는 대신 완전히 다시 편집을 했다. 그래서 앞의 영화를 보았다 할지라도 뒤의 영화를 볼 때 마치 다른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만나게 될 것이다. <풍경>은 장률의 5 1/2번째, 그리고 여섯번째 영화이다. 하여튼 두 영화는 기묘한 방식으로 공존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환기시키고 싶다. 그리고 동시에 <풍경>은 장률의 첫 번째 다큐멘터리이다. 당신이 장률 영화를 알고 있다면 이 말 앞에서 잠시 멈칫할지 모른다. 과도할 정도로 황폐한 풍경 앞
안개 속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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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미안해. 수고해. <변호인> 현장에서 감독, 배우, 스탭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라고 한다. 부림사건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는 소재때문에 쉽지 않았던 제작 과정을 정면 돌파할 수 있었던 것도 제작진이 서로를 끌어주고, 챙겨준 덕분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투자부터 상영까지 제작의 전공정을 힘들게 이끌어온 위더스필름 최재원 대표가 이 세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했을 것이다. 펀드매니저 출신의 투자자였던 그는 전 아이픽쳐스 대표, 전 바른손 대표 등을 거치며 많은 영화의 투자와 제작을 결정해왔다. 그런 그가 ‘변호사 시절’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계기인 부림사건을 스크린으로 불러들인 이유가 무엇일까
-언론/배급시사회 반응이 좋다. 예상했나.
=못했다. <링컨> 같은 정치인을 소재로 한 영화는 영화 자체로서 평가를 받았다. <변호인>처럼 특정 인물이 논란이 된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그게 불편했다. 영화를 보고
“이 영화의 변호인은 관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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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사건에 휘말린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벼랑에서 뛰어 내려 자살함으로써 사건을 종결시키는 일이 전세계 역사상 몇번이나 있었을까. 없거나 희귀할 거다. 그 죽음은 이례적이다. 그리고 그 죽음의 방식 자체가 강력한 전언이다. 문화평론가 남재일은 2003년 8월경 <씨네21>에 자살의 유형에 관한 무척이나 인상 깊은 글을 쓴 적이 있다. 먼 훗날 발생한 노무현의 죽음도 그의 지적과 관련 있어 보인다. 예컨대 강물에 뛰어내리는 사람이 남기는 전언이란 “우리는 가요. 찾지 말아요”라고 한다. 반면에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뛰어내리는 사람이 남기는 전언이란 “더 이상 할 말 없다. 똑바로 쳐다봐라”라고 한다.
자살을 결심한 누구라도 나의 주검이 혹은 죽음이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남게 될 것인지 부지불식간에 떠올리게 될 것이므로 그 지적은 타당한 것 같고 노무현에게도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은 그의 죽음으로 어떤 정확한 해결보다는 당장의 종결을 촉구했다. 사건의 종결
똑바로 쳐다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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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다. 이 영화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권 변호사를 시작하던 시기의 일들을 주요한 동기로 삼았다고 한다. 영화를 보니 정말 그렇다. <변호인>이 노무현이라는 중요한 인물을 동기로 삼아 어떤 영화로 탄생한 것인지 그 내용을 전한다. <변호인>의 주인공을 맡아 열연한 송강호와의 긴 인터뷰도 실었다. 또한 이 영화를 제작한 최재원 대표와의 인터뷰도 있다. 자, <변호인>의 세계로 가보자.
자꾸만 떠오르는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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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담은 망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박순찬(왼쪽) 만화가는 무려 18년째 <경향신문>에 네컷 시사만화 <장도리>를 연재한다. 그것을 엮어서 펴낸 단행본 <516 공화국>의 표지는 압권이다. 이번 대담은 이 표지에서 시작됐다. 그 표지가 담고 있는 2013년 한국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시사만화가의 입을 통해 들어보려 했다. 박순찬 만화가의 대화 상대로 <시사IN>에 <본격시사인만화>를 연재하는 만화가 굽시니스트를 떠올렸다. 두 사람 모두 시사만화로 독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으니 재밌겠다 싶었다. 마침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두 만화가는 잘 아는 사이였고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으니 둘은 그간 하지 못한 일상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시사만화 이야기는 언제 할 겁니까.’ 속이 타들어갔지만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왜냐하면 재밌었으니까. 그중 압권은 ‘수제 육포 제조 논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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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는 되고! 소주는 안 되고! 왜죠?
우선 모든 극장에서 술을 파는 것은 아닙니다. 롯데시네마는 주류를 일절 판매하지 않으며, CGV와 메가박스는 일부 지점에서 맥주와 와인을 팔고 있습니다. 주류 판매 여부는 기본적으로 인허가 문제와 관련이 있는데요, 주류를 판매하려면 해당 구청과 세무서에 일반음식점 영업신고와 주류판매 신고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맥주는 되고 소주는 안 될까요. CGV는 “영화 관람 환경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팩소주와 같은 도수 높은 주류는 판매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맥주 또한 무한으로 사다 마실 수는 없습니다. 극장 매점에선 만 19살 이상 성인에게 1인당 2잔까지만 맥주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취객 역시 상영관 입장이 거절될 수 있습니다. 문득 든 생각으로, 소주를 팔면 소주 안주도 개발해야 할 텐데 극장에서 알탕이나 꼼장어를 팔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담, 안주 없어도 쭉쭉 넘어가는 ‘소맥’을 프리미엄주로 개발해 팔면 어떨지. 아차,
극장에서 궁금증이 팝콘처럼 내려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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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안경 세척팀이 따로 있나요?
레스토랑에 설거지를 전담하는 팀원이 있는 것처럼 극장에도 3D 안경을 세척하는 팀이 따로 있습니다. CGV의 경우 여러 차례 사용 가능한 3D 안경을 구매해 관객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회용 안경인 만큼 영화상영이 끝난 뒤 관객이 사용한 3D 안경을 수거합니다. 별도의 인력을 구성해 3D 안경 전용 클리너와 세척액으로 관객이 사용한 3D 안경을 깨끗하게 닦습니다. 또, 정기적으로 전용 세척기를 통해 미세 먼지를 제거함으로써 관객이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위생에 각별히 신경 쓴다고 합니다. 반면 롯데시네마와 메가박스에는 3D 안경을 관리하는 팀이 따로 없어요. 일회용 3D 안경을 사용하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니 상영이 끝난 뒤 3D 안경을 기념품 삼아 집에 가져가도 상관없어요.
‘알바’로 시작해 점장이 된 경우도 있나요?
점장들은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 뒤 해당 멀티플렉스에 공채 입사한 이들입니다. 점장을 따로 모시진 않습니다. 극장에 입사하
극장에서 궁금증이 팝콘처럼 내려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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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팝콘이 맛있어요? 3D영화 관람료가 비싼 이유가 뭔가요? 상영관에 개도 데리고 들어갈 수 있나요? 극장 점장이 되는 방법이 뭔가요? 포털사이트의 검색창에 ‘멀티플렉스’를 치면 별의별 질문들이 수두룩합니다. 저런 것도 궁금한가 싶은 질문도 있었고, 오랫동안 궁금해했던 질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질문에 달린 대답을 보니 궁금증만 더욱 커져갈 뿐이었어요. 그래서 <씨네21>이 관객의 궁금증을 대신 풀어주기 위해 멀티플렉스에 물어봤습니다. 다음 장부터 팝콘 씹다 문득 떠올린 소소한 궁금증들을 속시원하게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싱글 관객입니다. 커플을 피하고 싶은데…
커플석(CGV의 스위트 박스, 롯데시네마의 프레스티지 커플석, 메가박스의 커플석)을 따로 만들어 ‘격리’해놓긴 했어요. 요즘은 멀티플렉스 어플로 예매하거나 현장에서 발권할 때 관객이 직접 자리를 정할 수 있어요. 커플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낀 채로 앉는 게 싫다면 좌석 가운데보다 복도쪽 좌석을 선택할 것을 추천합
극장에서 궁금증이 팝콘처럼 내려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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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에서 일한 흑인 집사 알론소 필즈는 회고록인 <백악관에서의 21년>에 이렇게 썼다. “너무 길게 말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지 마라.” 그것이 집사의 자세다. 필즈는 루스벨트 대통령 옆에서 진주만 폭격 소식을 들었고, 한국전쟁이 시작된 날엔 휴가지에서 황급히 돌아온 대통령과 수석 보좌관들의 모임을 준비했다. “우리는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역할은 매우 작지만, 어쩌면 하찮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없다면 그들은 그리 많은 일을 할 수 없다.” 필즈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럼에도 그림자로 남아야만 했다. 현대사의 결정적인 순간을 목격하면서도 누구도 의식하지 못하도록, 벽지에 새겨진 무늬처럼 희미하게 존재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21년도 아니고 34년 동안 자신의 존재를 지워야만 했던 사람의 세월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흘러갔던 것일까.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이하 <버틀러>)는 그 세월을 되짚는 영화다. 19
백인을 미소 짓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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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 시리즈와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가고 <헝거게임> 시리즈가 왔다. 1편은 대성공이었고 2편은 이제 막 뚜껑을 열었다. 즐길 만한 오락물이라는 평이 대세다. 게다가 요소요소마다 꽤 다양한 층위로 얽혀 있는 것이 흥미롭다. 1편을 지나 3편과 4편을 기다리는 시점을 맞아 중간점검하는 기분으로 몇 가지 핵심들을 정리해본다. <헝거게임> 관람자를 위한 7개의 키워드별 가이드다.
근미래의 독재국가 판엠. 수도인 캐피탈에 살고 있는 독재자의 지휘 아래 매년 이른바 ‘헝거게임’이라는 잔혹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수도를 제외하고 나머지 12개 구역에서 소년 소녀들을 뽑아 한 장소에 몰아넣고 단 한명의 생존자만 살아남을 때까지 싸우게 한 뒤 우승자에게는 윤택한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70여년 전 힘을 합쳐 반란을 도모했다가 실패한 주변 구역에 독재자가 내리는 피의 형벌인 동시에 많은 이들의 눈을 현혹시키기 위한 잔인한 엔터테인먼트다. 그
웰컴 투 정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