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일본군 ‘위안부’ 역사와 관련된 일본·미국·한국의 논쟁을 다룬다. 특히 일본군이 주도한 ‘위안부’ 제도는 없었으며, 따라서 일본이 져야 할 ‘책임’ 또한 없다고 주장하는 일본과 미국 극우세력의 논변에 집중한다. 기자, 유튜버, 학자, 정치인 등 각계 극우 이데올로그들의 정치적·금전적·종교적 결탁 관계를 가시화한 것도 흥미롭거니와 이들의 (비)논리를 검증, 반박하는 감독의 편집술을 감상하다 보면 흡사 가상의 ‘법정’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한편의 유튜브 영상처럼 편집된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체험한 박진감이다. “할머니 증언 없는 위안부 다큐”라는 한 기사의 표현에서 보듯, ‘위안부’ 논쟁에 접근하는 이 영화의 온도와 각도는 그간 익히 봐온 ‘위안부’ 서사들과 전혀 다르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탁하고, 이들과의 연대의식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시도되는 ‘진정성의 정치’(문학평론가 허윤)가, <주전장>에는 없다. 이 예외적인 ‘차가움’이 유튜브 세대의 그것인지,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제3자적 포지션에 기인한 것인지 따져볼 일이다. ‘위안부’ 20만명 설을 주장함으로써 민족적 공분을 강화하려는 한국의 민족주의자들, 일본의 신군국주의는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에 동원될 뿐이라고 일본 대중에게 일침을 가하는 영화 말미는 참으로 정당해서 외려 얄궂을 정도다.
남는 의문도 있다. ‘위안부’ 역사를 부정하는 세력은 구체적인 정치적 목적을 가진 강력한 ‘소수’라지만, ‘위안부’ 역사에 대한 이야기 자체를 들어본 적 없다는 ‘선량한’ 시민들의 무지는 어떻게 대면해야 할까. 감독은 ‘위안부’ 문제는 이제 ‘국제법정’에서 논의돼야 한다고 말했지만, 영어를 기반으로 한 서구 신자유주의 사법체계에 ‘위안부’ 논의를 번역, 등재하는 일의 지난함은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 <주전장>이 ‘위안부’ 논의의 “끝판왕”이 아니라 ‘물꼬’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