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어느 저녁 7시 반 무렵인가, 휠체어 고정벨트 함이 있는 지하철 9호선의 한 칸에 서게 되었다. 쿠션은 아니지만 폭신한 등받이가 기둥으로 붙어 있어 가능할 때는 내 등을 기대도 된다는 의미로 읽었는데 순간 이 안내문이 눈에 띄는 것이었다. ‘뚜껑을 열고 안전벨트를 당겨 휠체어 팔걸이에 걸고 고정하십시오. 사용 후에는 벨트를 원위치시키고 뚜껑을 닫아주십시오.’ 살피가 겹겹 붙게 쪄낸 만두처럼 내 살과 네 살이 붙어가게 생긴 마당에 휠체어가 과연 이 시루 열차 속으로 바퀴를 굴려 들어올 수나 있을까. 휠체어라는 마차를 이 공간에 세우고 저 과정을 행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이 사람들이 제 자리들을 내어주기는 할까. 양보를 한다손 치자면 대체 그들은 어디까지 밀려나야 살 수 있단 말일까. 갈 데가 있기나 할까. 징의 울림을 따라 퍼지는 것도 아니고 치솟는 전세금에 서울의 중심부로부터 서울의 외곽으로 점점 밀려나는 우리에게 어디로 더, 더 가란 비유의 비루함일까.
먹고사는 게 그만큼 어렵고 더럽다는 증거야. 그 치사함을 견디면서 너희들을 키웠어. 쓸쓸하지. 부질없지. 허무하지. 그렇지만 삶이 다 그런 거야. 안 죽는 사람이란 없잖아. 너나 할 거 없이 모두가 그렇게 왔다 가잖아. 그걸 평생 위안 삼는 거지.
칠순을 넘긴 아빠가 푸념처럼 내뱉던 이 빤한 말들이 확연히 이해되는 공간, 지하철. 서민을 위한 교통수단이라고 소위 나랏일 좀 하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그렇게 떠들어댔으니 그들이 애용해야 개선의 여지가 생길 공간, 지하철. 그 지하철에서 내가 빼먹지 않고 따라 읽는 게 하나 있으니 ‘문화시민이라면 꼭 지켜달라’는 광고 보기다. 그 가운데 남에게 불편을 주는 자세는 ‘안돼요’, 열차 안에서 음식물 섭취는 ‘안돼요’라는 두 문장이 유독 거슬렸다. 직업병이라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으나 맥락상에 ‘안 돼요’라고 띄어 써야 할 부분들이 ‘안돼요’라고 죄다 붙어 있는 탓이다. 비단 이 광고뿐일까. 무수히 많은 공공장소의 안내문이나 광고 문안 속 바로잡아야 할 우리말이 수없이 많음은 익히 경험한 바이거늘, 그 책임자들은 글자가 종이가 되기까지 국어사전이나 국립국어원 사이트를 몇번이나 들락거렸을까. 나 혼자 볼 일기장도 아닌데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의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올바르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일말의 불안감도 없었을까.
어른들로부터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종종 혼이 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는 이 말을 삼키곤 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낫을 딱 기역 모양으로 놓아두시든가요. 국어는 국어시간에만 배우는 게 아니라 국어를 쓰는 일상에서 언제든 배우는 것이거늘, 왜 우리에게 배움은 늘 수업이라는 형식을 통해라 하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나중에, 라고 편의대로 말하지만 과연 그 나중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게 될지는 미지수가 아닌가.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에 우리 모두는 죽고 없어질 테니 소용을 따지자면 무용이랑 얘기할밖에.
1 Comments